24화
어리바리한 사이, 이지운은 윤기가 반질반질 나는 식탁에 앉혀졌다. 큼직한 상 위에는 연꽃 모양 초가 올려져 있고, 전통 문양이 음각된 은수저가 세팅되어 있었다.
“손 괜찮아요?”
이지운이 묻자 서태천이 왼손으로 숟가락을 들어 보였다. 많이 회복돼 수저질을 하는 데에 큰 문제가 없었다.
“전채와 죽부터 드리겠습니다.”
“잘 먹겠습니다.”
위생모를 쓰고 앞치마를 두른 셰프가 이지운과 서태천, 그리고 서 회장 앞에 요리를 놓았다.
아니. 이 집은 상주 요리사까지 있단 말인가.
이지운은 생전 처음 경험해 보는 부유함에 기세가 눌려 얌전히 흑임자죽을 먹었다. 엄청나게 진하고 깊은 맛이 우러나오는 죽이었다.
“…!”
진짜 맛있다. 어떡해.
전채로 나온 냉채 또한 환상적인 맛이라, 이지운은 그릇을 빠르게 초토화시켰다. 이지운은 상기된 얼굴로 다음 요리를 기다렸다. 그리고 나오는 족족 음식들을 맛깔나게 먹어 치웠다.
어떻게 된 게 육전, 꼬막무침, 갈비탕에 이르기까지 메뉴들은 이지운이 좋아하는 것투성이였다. 누가 이지운의 취향을 조사해다가 밥상으로 구현한 것처럼 말이다.
“입맛에 맞나 보군요.”
“엄청나게 맛, 아… 네! 맛있습니다.”
“정말 잘 먹는 모습이 보기 좋습니다.”
서 회장은 흐뭇하다는 듯 이지운을 쳐다봤다.
“…저… 회장님. 저 밥 한 그릇만 더 먹어도 될까요.”
어느새 공깃밥을 클리어한 이지운이 물었다. 서태천은 이지운이 보지 못하는 각도에서 피식 웃었다.
“밥 한 그릇이 아니라 두 그릇, 세 그릇 들어도 됩니다.”
“정말요? 감사합니다.”
곧 셰프가 이지운 앞으로 연잎밥을 내왔다. 이지운은 눈을 휘둥그레 뜨며 찰지고 향기로운 밥을 열심히 먹었다.
“연잎밥에는 떡갈비죠.”
서태천이 이지운의 숟가락에 잘 쪼개진 떡갈비를 하나 올려 주었다. 이지운은 너무 놀라 흡 하고 숨을 멈추었다.
지금 내 밥숟가락에 음식을 올려 주었어? 엄청 자상하게?
“어서 먹어요.”
당황한 이지운과 상반되게 서태천은 태평한 표정이었다. 이지운은 어쩌지 하다가, 자신 맞은편의 서 회장을 생각해 꿀꺽하고 떡갈비를 삼켰다.
이 사람 대체 어떤 의중을 갖고 있는 거지? 나랑 4달 반 지나면 이혼할 거면서 자녀 계획이 어쩌고 하질 않나, 반찬을 얹어 주질 않나. 종잡을 수가 없다.
이지운이 본부장을 슬쩍 훑어보았지만 서태천의 표정에는 미동도 없었다. 오히려 연근조림을 다시금 그의 숟가락에 하나 얹어 줄 뿐이었다.
이러다가 체하겠네. 대체 왜 이러는데…!
환상적이고 분위기는 멜랑꼴리한 식사가 끝났다. 매실차까지 야무지게 마신 다음, 이지운은 부른 배를 이끌고 서 회장 그리고 서태천과 정원으로 나왔다.
“제가 아끼는 정원 구경 좀 시켜드리려 합니다.”
“정말 감사합니다, 회장님.”
아까 집으로 들어오면서 봤을 때도 충분히 넓어 보였지만 정식으로 둘러보니 정원은 상상을 초월하는 규모였다. 서 회장이 이끄는 방향으로 계속 가니 울창한 소나무 숲이 나왔다.
개인 집에 숲이 있어도 돼…? 이 집은 대체 얼마나 넓은 거야.
수목원을 방불케 하는 피톤치드 향에 이지운은 감탄 또 감탄했다. 울창한 숲에 둘러싸인 기분이 꽤나 상쾌했다.
아, 삼림욕 제대로 하고 가는구나.
어느새 아까의 부담되었던 기분은 사라지고 여유를 만끽하는 이지운에게, 별안간 서 회장의 말이 날아들었다.
“그런데 태천아. 식은 언제 치를 생각이냐?”
컥.
이지운은 아까 먹고 진작 소화된 밥이 이제 와 얹히는 기분이었다.
“혼인 신고부터 한 거는 뭐, 네놈이 워낙 특이한 구석이 있으니 그러려니 했다만 왜 식은 안 치르는지 궁금하구나.”
이지운은 땀을 삐질삐질 흘리며 흐린 눈으로 허공을 봤다. 대신 서태천이 대답했다.
“요새 프로젝트가 여러 건 겹쳐서 굉장히 바쁩니다. 급한 건들 정리되는 대로 치르려 합니다.”
이지운은 그 말에 어이가 없었다.
뭐야. 시간 나면 식을 올리겠다는 거야? 마치 바쁘지만 않으면 이번 주말에도 결혼식을 하겠다는 말투네, 뭐지? 그리고 나랑 식 올려도 되는 거야? 우리 네 달 조금 더 있으면 바이바이할 사이 아니었던가?
“음… 그랬군. 잠시 이야기 좀 하자꾸나.”
서 회장이 뒷짐을 지며 서태천에게 고갯짓을 했다. 이지운은 눈치껏 소나무 한 그루를 붙잡고 관찰하는 척 뒤로 빠졌다.
하지만 거리가 멀지 않아 두 부자가 나누는 이야기가 잘 안 들렸다. 대충 추출할 수 있는 단어는 네 어머니, 알고 있는지, 그 사람도 식에 부를까. 대충 그런 내용이었다.
어… 회장님 눈빛 되게 아련해. 어머님하고 무슨 사연이 있으신가?
이지운은 순간 서 회장과 최영희 여사 사이에 무슨 사연이 존재하는지 궁금해졌지만 자신은 어디까지나 이방인. 가족이 될 지간이 아니니 더 이상 호기심을 가지는 건 무리였다.
난 연못 구경이나 해야지. 이지운은 구름다리에 올라 널찍한 연못을 내려다보았다, 그 안을 헤엄치는 잉어가 굉장히 많았다.
“우와아… 저 잉어는 내 종아리보다도 굵직하고 기다랗네.”
이지운이 유유히 헤엄치는 잉어를 보고 감탄하자, 어느덧 옆으로 다가온 서태천이 시니컬하게 물었다.
“설마 저 잉어 잡아다가 매운탕 해 먹을 생각은 아니죠?”
“저라고 해서 늘 먹는 생각만 하는 건 아니거든요? 그냥 예뻐서 본 거예요.”
이지운이 구름다리를 건너가 연못가로 다가갔다. 그러고는 쪼그려 앉아 미끌미끌 헤엄치는 잉어들을 자세히 구경하려 했다.
“와. 이 잉어 진짜 예쁘고 크다.”
그가 손가락을 뻗은 순간이었다. 자신을 향해 다가오는 손가락을 포식자의 공격으로 오해한 잉어가 펄쩍 뛰어올랐다.
“아이고!”
도망갈 새도 없이, 이지운은 검지를 물렸다.
“아야!”
“괜찮아요?”
서태천이 급하게 뛰어와 이지운의 손가락을 살폈다.
“피 나는 건 아니죠?”
“그런 건 아니고 사람 이빨에 깨물리는 기분인데… 으아, 잇자국 났어.”
간질거림과 찌릿의 중간 정도 고통이었다. 잉어한테 물렸다니 기분이 너무 이상해, 이지운은 인상을 썼다.
“안 되겠군요. 어서 집에 가서 치료합시다.”
“치료요?”
“소독도 하고 밴드도 붙여야죠. 무슨 증상이라도 생기면 바로 병원으로 가고요.”
서태천이 이지운의 검지를 쥐고 걱정스럽게 말했다. 이지운은 손가락이 간지러워 숨을 꾹 참았다. 잉어에 물려서 간지러운 건지 서태천이 만져서 간지러운 건지 도통 구분이 가질 않았다.
***
“그럼 저희 이만 가 보겠습니다.”
“살펴서 가라.”
“오늘 정말 잘 먹었습니다, 회장님. 초대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잘 드셨다니 다행입니다. 그럼 자주 와요.”
또 오라고?
이지운은 여길 또 올 일이 있을까 싶었지만, 아까 먹었던 환상적인 밥상이 떠올라 자기도 모르게 그러겠노라 대답했다.
“그럼 정말 갈게요!”
“가 보겠습니다.”
두 사람은 기사가 운전하는 차를 타고 다시 집으로 왔다. 기사는 당분간 이 차를 타시면 된다고, 신차가 나오는 대로 연락드리겠다며 돌아갔다.
이지운은 현관문을 열고 들어서자마자 서태천을 노려봤다.
“뭐예요. 본부장님, 아까 그 이야기들?”
“내가 뭘요.”
“아니, 자녀 계획이니 결혼식이니 그 이야기들 왜 하셨냐고요.”
자신이 서태천을 예전과 다른 시선으로 보고 있는 것과는 별개로, 이지운은 아까의 황당함에 대해 따지고 싶었다.
이지운은 아직 완전한 폴인러브를 인정하지 않은 채 난 이 사람 안 좋아해. 이 사람이 멋있긴 하지만 나랑은 남남이야. 이렇게 스스로를 세뇌시키고 있는 중이었으므로 더욱더 따지고 싶은 마음이 컸다.
“회장님 입장에서는 우리가 철석같이 식 올리고 애 낳을 거라고 생각하시지 않겠냐고요.”
“그렇게 믿으실 수 있겠죠.”
“그게 아무렇지 않아요?”
“불쾌했다면 미안해요. 하지만 그 상황에서는 최선의 대답이었습니다.”
가만히 생각해 보니 서태천의 말이 맞기는 했다. 이미 ‘내 오메가요’라고 말한 시점에서 이야기는 꼬여 버렸다.
그걸 다시 정정해서 실은 저희 페이퍼 부부고요, 몇 달 후에 남남으로 돌아가요. 이렇게 말하면 서 회장은 농락당한 기분이 들 것이었다.
“어… 그렇긴 한데. 제가 많이 놀랐어요.”
“놀라게 해서 미안합니다.”
서태천이 이지운을 지그시 내려다보며 낮은 목소리로 사과했다. 순간적으로 느껴지는 지독한 잘생김에, 이지운은 침이 꿀꺽 넘어갔다.
“아, 아니 뭐 이렇게 사과를 들으려고 한 건 아니었고요….”
“사과의 의미로 제가 차 한잔 대접하죠.”
“차요?”
“아까 아버지가 우롱차랑 다과 세트 주셨어요. 같이 나눠 먹읍시다.”
우롱차? 다과? 틀림없이 맛있을 거야.
“좋아요.”
이지운은 그새 기분이 풀려 배시시 웃었다. 서태천에게 휘말려 든 것도 깨닫지 못하고.
서태천이 보글보글 찻물을 끓이는 동안 이지운은 옆에서 보자기에 싸인 고급 한과 포장을 열었다. 유과와 강정, 전통 다식과 이름도 모르겠는 예쁜 한과들이 가지런히 담겨 있었다.
“제가 차 우리는 게 오랜만이라 좀 서툽니다.”
곧 응접실 테이블에 다기 세트가 세팅되었다. 채반 비슷한 받침대와 찻주전자, 거름망을 쫙 늘어놓고 순서대로 차근차근 차를 우려내는 서태천의 모습은 영화의 한 장면 같았다.
좀 멋있는데? 집중하고 있는 모습 좀 근사하잖아.
“드셔 보세요.”
곧 작은 잔에 담긴 영롱한 차가 이지운 앞에 놓였다.
“잘 마실게요.”
호록, 한 모금을 마셔보니 따끈하면서도 개운한 게 산뜻함을 줬다.
“와! 맛있어요.”
“다음 잔이 더 맛있을 거예요. 우릴 때마다 맛이 조금씩 변하거든요.”
“우와… 재주가 좋으시다. 다도도 할 줄 아시고.”
“뭘요. 이렇게 해줄 사람이 생기니 저야말로 좋네요. 맨날 혼자 해 먹으니 별 재미가 없었거든요.”
서태천의 말에 이지운은 기분이 살짝 싱숭생숭해졌다.
평생을 독신주의로 살아왔다는 알파의 입에서, 차를 건넬 사람이 생겨서 좋다는 말이 나온다.
…이 사람도 혹시 나처럼 조금씩 생각이 변해 가고 있는 건 아닐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