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2화
아직까지 뻣뻣하게 굳어 있던 이지운은 집에 오라는 소리에 화들짝 놀랐다.
나 안 두들겨 맞아? 냉정한 인상의 비서가 내 세간살이 들어내면서 나를 문밖으로 쫓아내고, 그런 거 없어? 이거 상황이 어떻게 돌아가는 거야?
“밥…이요?”
“그렇습니다. 식사하면서 자세하게 이야기 듣고 싶습니다.”
“아… 알겠습니다.”
하늘 같은 회장님이, 어른이 권하는 약속인데 차마 거절할 수는 없었다. 이지운이 서먹하게 고개를 숙이자, 서태천이 쐐기를 박듯 대답했다.
“내일 평창동으로 같이 찾아뵙겠습니다.”
“그래. 그럼 난 이만 가 보마. 일정이 있어서.”
서 회장이 일어났다. 이지운은 굽실굽실 인사를 하며 서 회장을 배웅했다. 몇 분이 지나고서야 정신이 들어온 그는 사태의 심각성을 깨달았다.
아니, 이혼을 향해 달려가는데 어머님에 이어서 아버님까지 만나게 됐네…? 나 이래도 돼?
“저기… 제가 괜히 긁어 부스럼 만든 거 아니죠.”
이지운이 서태천의 눈치를 살피며 물었다. 서태천은 고개를 저었다.
“아닙니다. 어차피 아까 그렇게 마주쳤을 때 신분을 속이기도 어려웠을 테고, 속여 봤자 얼마 안 가 다시 비슷한 일이 일어났을 거예요. 그러니 있는 대로 말하는 게 나았겠죠.”
“그건 그렇지만….”
굳이 제 임시 배우자입니다. 굴러들어 온 가짜 배우자입니다. 이렇게 말하지 않고 ‘제 오메가입니다.’라고 말해 준 게 이지운은 못내 신경이 쓰였다.
솔직히 말해 심장이 쿵 떨어질 정도로 낭만적인 표현이었다. 수명이 깎이는 건 아닐까 싶을 만큼.
제 오메가입니다. 제 오메가… 제 오메가….
이지운이 혼자서 아까의 상황을 곱씹고 있는데, 식사 트레이가 도착했다.
“서태천 환자님. 식사 시간입니다.”
벌써 병원 밥시간이 되었나 보다. 이지운은 서태천 몫으로 나온 환자식 식판을 받아들어 테이블 위에 올렸다.
“본부장님, 어서 드세요.”
그런데 수저를 쥐는 서태천의 손동작이 어색했다. 오른손으로 국을 뜨는 것만 간신히 하고, 집어먹는 반찬에는 젓가락을 가져다 대지 못했다.
“어…? 본부장님 그러고 보니까.”
이 사람 왼손잡이였지. 그런데 왼 손목을 다쳤으니 힘들 것이다.
“오른손으로 밥 못 드시는 거죠.”
이지운이 묻자, 서태천이 고개를 끄덕였다.
“네. 오른손은… 좀 서투릅니다.”
그러고는 메추리알 장조림을 집으려고 하는데, 어설픈 젓가락질에 메추리알이 쏙쏙 빠져나갔다. 보는 이의 마음을 안타깝게 하는 장면이었다.
“어… 저기, 제가 먹여 드리면 어떨까요.”
“이 주임이요?”
“네. 제… 제가.”
이지운이 침을 꿀꺽 삼키고 조심스럽게 대답했다. 아픈 사람이니 마땅히 도와줘야 한다는 생각에서였다. 이지운은 그렇게 믿고 싶었다.
“그래 주면 나야 고맙습니다만.”
서태천이 멋쩍은 듯 이지운의 제안을 수락했다.
“그럼 어… 제가 하나씩 떠먹여 드릴게요. 입만 준비해 주세요.”
“그럴게요.”
이지운은 숟가락으로 밥을 적당량 뜬 다음 서태천에게 몸을 숙였다. 서태천이 입을 벌려 밥을 받아먹으려 하니 두 사람 사이의 간격이 급격하게 가까워졌다.
짙은 이목구비, 잘생긴 얼굴 윤곽이 한눈에 들어오자 이지운은 심장이 벌렁거렸다.
밥 먹는 게 뭐라고 이렇게 잘생겼냐? 부담되는 비주얼이네, 정말.
“자… 장조림도 드릴게요.”
“네.”
이지운은 숟가락으로 장조림을 살살 주워 담는 데 성공했다. 신중하게 숟가락을 움직여 서태천의 입가에 가져다 대니, 그가 마치 아기 새처럼 메추리알을 꼴깍 삼켰다.
어… 이거 되게 보람차네.
동생도 없고 어린 사촌도 없는 이지운은 누군가에게 밥을 떠먹여 주는 게 처음이었는데, 이게 하다 보니 재미가 있었다. 이 맛에 육아를 하는 건가?
아니, 잠깐만. 지금 내가 밥을 떠먹여 주고 있는 사람은 덩치 커다란 성인 알파라고. 귀여운 아기나 작은 동물이 아니라.
“멸치 좀 드려요?”
끄덕.
“나물도 먹어야죠?”
끄덕.
“국도 한 숟갈.”
와, 가까이서 잘생긴 남자 들여다보면서 밥 먹이니까 되게 떨리면서 재밌어.
이지운은 자기가 활짝 웃고 있다는 것도 모른 채 밥 먹이기에 열중했다. 물론, 그 환한 미소에 서태천의 시선이 완벽하게 사로잡혀 있다는 것도 몰랐다.
***
밤이 깊어지자 병실에는 고요함이 찾아왔다. 한 손으로 어설프게 씻고 나온 서태천을 위해 이지운은 수건으로 머리도 말려 주고 얼굴에 로션도 발라 주었다.
서태천의 얼굴에 손을 댈 때, 약간 손끝이 떨리기는 했다. 잘생긴 윤곽을 따라 손을 미끄러트리는 것은 이지운의 심장에 그다지 좋지는 않은 행위였다. 이지운은 일부러 과장되게 소리를 내며 박수를 쳤다.
“하하하. 다 됐습니다!”
배우자의 책무를 다 했으니 이제 자 볼까. 오늘 하루 많은 일이 일어났기에 피로감이 상당했다.
이지운은 보호자용 간이침대를 꺼내고 몸을 눕힐 준비를 했다. 조금 불편한 감이 있었지만 그래도 다른 선택지는 없었기에 자연스럽게 취침을 선택했는데, 서태천이 수면등을 켜고 말했다.
“거기서 자지 말고 여기로 올라와요.”
“네?”
“여기서 같이 자자고요.”
“거기는… 어… 제가 올라가면 좁을 텐데요.”
집에 있는 침대야 광활하기 짝이 없으니 둘이 올라가서 뒹굴기 충분하지만, 이곳 병원 침대는 그에 비하면 작았다.
“그래도 간이침대에서 자는 것보다는 나을 겁니다. 올라오시죠.”
“그래도 된다면… 네.”
이제는 서태천과 눕는 게 하나의 습관이 된 데다가, 여기서 잤다가는 허리가 아플 것 같기는 했기에 이지운은 몸을 일으켰다.
“읏차.”
그런데 막상 침대 위로 올라오자 공간이 턱없이 좁았다.
“어… 똑바로 자기는 무리겠어요.”
“그럼 옆으로 눕죠.”
“네.”
그러고 둘 다 동시에 모로 돌아누웠는데 바깥이 아니라 안쪽을 보고 누웠다. 둘은 예고도 없이 얼굴을 정면으로 마주쳐 버렸다.
“아.”
얼굴이 가까워도 너무 가까웠다. 숨결이 서로의 얼굴에 닿을 정도였으니.
이지운은 자기도 모르게 마른침을 삼켰다. 긴장감이 감돌며 손끝이 차가워졌다. 차마 눈을 마주칠 용기가 나지 않아, 이지운은 눈을 내리깔았다. 갈색 속눈썹이 파르르 떨렸다.
“…….”
“…….”
침묵이 흘렀다. 이지운은 자꾸 얼굴에 열이 오르는 것만 같아, 달아오른 얼굴을 식히고 싶었지만 그러면 긴장한 티가 날까 걱정이 됐다.
“…안 주무세요?”
“잘 겁니다. 이 주임 자는 것만 확인하고.”
서태천이 낮게 읊조렸다. 목소리가 과하게 그윽했다. 이지운은 얄팍한 이불을 꽉 움켜쥐었다.
하아. 돌겠다. 내가 자야 이 인간이 잔대.
“그러면… 저 먼저 잘게요. 좋은 꿈 꾸세요.”
이지운은 하는 수 없이 눈을 질끈 감고 억지로 자는 척을 했다. 한참 동안 눈을 감고 있자니 격렬한 스트레스에 시달린 몸이 조금씩 나른해졌다.
으음… 진짜 졸리네. 아이고… 졸려.
이지운은 그대로 잠 속으로 빨려 들어갔다.
어디선가 나지막한 웃음소리가 들리는 것도 같았지만, 너무 졸려서 확인할 길이 없었다.
***
다음날 정오. 서태천은 검사 결과 ‘이상 없음’을 최종 진단받았다. 팀장에게 미리 전화해 오늘 하루 연차를 쓰겠다고 말해 놨기에, 이지운은 서태천의 퇴원 길에 동행할 수 있었다.
추돌 사고로 인해 망가진 차량은 견인 당했으므로 두 사람은 택시를 타고 집으로 돌아왔다. 그리고 현관문을 열고 들어서기가 무섭게 이지운은 선전포고를 했다. 병원에서 돌아오는 길에 내내 생각했던 것이었다.
“아무것도 하지 마요!”
“…뭘 말입니까?”
“본부장님은 지금 환자입니다. 절대 집안일이나 힘쓰는 일, 업무 이런 거 하지 말고 가만히 누워 있어요.”
“네?”
“자, 이리 오세요.”
이지운은 서태천을 끌고 안방으로 가 그를 침대에 눕혔다. 그러고는 침대 밖으로 나올 생각조차 하지 말라며 엄포를 놓았다.
“오늘 식사 준비, 빨래, 설거지, 각종 집안일. 다 제가 합니다.”
“그렇게까지 안 해도 되는데….”
“쉿! 얼른 누워서 주무세요. 제가 천하무적으로 모든 집안일을 해치울 거니까요.”
이지운이 위풍당당하게 안방을 나섰다. 그리고 정확히 5분 뒤, 와장창 접시 깨지는 소리가 온 집안에 울려 퍼졌다.
다음 순간에는 삐리릭삐리릭 전자레인지가 울었으며, 세탁기에서는 에러를 알리는 경보음이 났다.
…뭘 하고 있는 거지?
서태천이 살짝 바깥을 내다보려 했으나, 이지운이 득달같이 달려와 문 앞을 가로막았다.
“본부장님! 누워 계시라니까요.”
“…지금 이 주임 등 뒤로 연기가 보이는 것 같은데….”
“아! 맞다! 죽!!!”
이지운이 후다닥 오븐 레인지로 뛰어갔다. 인덕션이 있는 구역에서는 정체불명의 회색 액체가 끓으며 그을음을 내고 있었으며, 그 밑에 딸린 오븐에서는 시커먼 연기가 악마의 트림처럼 용솟음쳤다.
“…괜찮은 겁니까.”
“네! 들어가 계세요!”
이지운은 요리를 빙자한 주방 망가뜨리기와 설거지를 가장한 그릇 깨부수기를 마친 뒤, 옷 정리를 시작했다. 드레스룸에 들어간 그는 일단 옷장을 열어젖혔다.
“이게 뭐야.”
옷장 한구석에 검은 가운이 주르륵 걸려 있었다. 무려 수십 벌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