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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공적인 이혼을 위한 신혼생활-21화 (21/100)

21화

이지운은 병실 문을 열기가 너무나 두려웠다. 이 안에 서태천이 어떤 모습을 하고 있을지 확인할 용기가 나지 않았다.

하지만 언제까지고 우두커니 서서 두려움에 떨고만 있을 수는 없는 일, 그는 눈을 질끈 감고 문을 열어젖혔다.

“어…?”

그런데 병실 안이 텅 비어 있었다. 1인실 침대 위에는 아무도 누워 있지 않았으며, 간병인이나 간호사도 보이지 않았다.

“이게 어떻게 된 일이지.”

순간 불길한 예감에 사로잡힌 이지운은 사방을 두리번거리며 지나가는 간호사를 찾았다.

“저기, 간호사 선생님. 잠시 말씀 좀 여쭐게요.”

“네. 보호자분이신가요?”

옆구리에 차트를 끼고 바쁜 걸음으로 걷던 간호사가 멈추어 섰다.

“예. 제가 이 병실 환자 보호자인데… 환자가 어딜 갔는지 안 보여서요.”

“아… 이 방 환자분 방금 긴급 수술 들어가셨는데요?”

“뭐라고요?!”

이지운이 두 눈을 크게 떴다. 엄청나게 많이 다친 건가. 긴급 수술에 들어갔다면 살짝 다친 정도가 아니란 소린데…!

간호사가 그의 곁을 무심하게 스쳐 지나갔다. 이지운은 추풍낙엽처럼 힘없이 미끄러져 무릎을 꿇으며 주저앉았다.

“수… 수술….”

손이 덜덜 떨리고 목소리마저 메어 왔다.

이렇게 사람 일이란 한 치 앞도 알 수가 없다. 불과 십수 시간 전만 해도 나와 살을 맞대고 살던 사람. 티격태격거리기도 하고 가끔 날 설레게도 하고….

“이럴 줄 알았으면 더 잘해 줬을 텐데.”

이지운은 완전히 절망에 사로잡혔다. 다시는 BBG의 건강한 모습을 볼 수 없는 것인가. 아니면 설마 영원한 이별…?

안 돼. 절대 안 돼.

“흐흑.”

그가 손바닥에 얼굴을 묻고 흑흑거리고 있는데, 뒤에서 누가 이지운의 어깨를 툭툭 쳤다.

“흐흑… 누구세요.”

이지운이 눈물을 쏟으며 뒤를 돌아봤다. 그는 눈을 크게 떴다. 믿을 수 없게도 한쪽 팔에 깁스를 한 서태천이 이지운을 빤히 쳐다보고 있었다. 이지운은 너무 놀라 벌떡 일어났다.

“헉. 수술 들어가신 것 아니었어요? 간호사 선생님이 분명히… 이 방 환자가 긴급 수술 중이라고.”

“난 이 옆 방인데.”

이지운이 뒤를 돌아보니 이곳은 609호가 아니라 608호 앞이었다. 민망함과 창피함, 수치심이 폭포수처럼 그를 덮쳤다.

병실을 잘못 알고 혼자 드라마를 찍은 것도 부끄러웠지만 무엇보다도 자신이 지금 흘리고 있는 눈물. 이게 문제였다.

“이 주임. 웁니까?”

“아, 아니요!”

이지운은 고개를 저으며 은근슬쩍 눈물 자국을 지웠다.

서태천은 딱 봐도 멀쩡해 보였다. 그냥 왼쪽 손목에 깁스를 하고 있을 뿐이었다. 얼굴에도 작은 생채기 외에 이렇다 할 부상은 보이지 않았으며 무엇보다도 제 발로 걸어 다니고 있지 않은가.

“우는 것 같은데요.”

“눈에 뭐가 들어가서 비비고 있었어요.”

이지운은 필사적으로 눈물샘에 힘을 줬다. 서태천은 피식 웃더니, 이지운의 머리에 손을 올렸다.

“나 괜찮으니까 울지 마요.”

그 목소리와 말투가 너무도 그윽해, 이지운은 취할 것 같았다. 그뿐인가. 부정맥 증상도 다시 시작되었다. 심장이 급격하게 두근거리기 시작한 것이다.

간호사 선생님…! 입원할 사람은 저 같아요. 살려 주세요.

“딸꾹!”

이지운은 내적 비명을 지르며 딸꾹질을 시작했다.

***

이야기를 들어보니, 서태천은 외부 일정을 마치고 회사로 돌아오던 중 추돌사고에 휘말렸다고 한다.

다행히도 크게 다치진 않았지만 그래도 뒤늦게 아플 수 있는 게 교통사고이다 보니 하루쯤 입원해 경과를 지켜보는 게 좋겠다는 의사의 소견이 있었다.

“회사 복귀해도 괜찮을 것 같은데요.”

“아니에요! 교통사고 후유증이 얼마나 무서운데요. 절대 안정. 무조건 누워요.”

“그 정도는 아닌데….”

“제가 도와드릴 테니까 무조건 오늘은 병원에서 보내요. 제발요.”

한사코 괜찮다는 서태천을 붙잡고 이지운은 병실로 향했다. 침대에 그를 밀어 넣고 물을 먹이고, TV를 틀어 주고 리모컨을 쥐여 주었다. 어설픈 듯 정성 어린 보살핌이었다.

“왜 이렇게 해 줍니까?”

서태천의 물음에 이지운은 잠깐 말문이 막혔다. 내가 왜 이렇게 잘해 주느냐고? 그거야….

“우리는 어쨌든, 부부잖아요.”

부부.

둘 사이를 규정지을 수 있는 가장 단순하고도 정확한 단어.

그럼에도 불구하고 둘 사이에 암묵적으로 금기시되고 있었던 단어, 부부.

이지운은 호기롭게 말을 뱉은 후 밀려오는 민망함에 머리를 긁적였다.

진짜 부부도 아닌데 내가 너무 설쳤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서태천은 그 말에 꽤나 부드럽게 반응했다.

살짝 입꼬리를 올리더니 ‘그래요, 그럼.’ 하고 나지막하게 대답한 것이다.

“맞네요. 우리 부부 맞죠.”

“아… 네. 부부.”

어색한 분위기가 펼쳐지기 시작했다. 이지운은 괜스레 창문을 열어 환기를 하고 에어컨 온도를 높였다 낮췄다 하며 부산스럽게 움직였다. 도저히 뻘쭘함을 견디기 어려웠기 때문이다.

청결? 오케이. 물건 정리? 오케이. 어… 더 할 거 없나? 병실을 두리번거리던 그때 마침 할 일이 생각났다. 간호사 스테이션에 가서 오늘 입원에 있어 주의점이나 필요한 물품을 물어보고 오면 좋겠다는 데 생각이 미쳤다.

“저 간호사 선생님들 좀 뵙고 올게요.”

“그래요.”

이지운은 병실을 빠져나와 간호사들이 모여 있는 곳으로 갔다. 입원에 대해 설명을 듣고 또 보호자로서 해야 할 역할을 잘 듣고 숙지하는 데 생각보다 시간이 제법 걸렸다.

간호사들에게 인사를 하고 긴 복도를 되돌아와 609호 앞에 섰는데, 낌새가 이상했다. 안쪽에서 낯선, 하지만 어디선가 들어본 적 있는 것 같은 중년 남성의 목소리가 들려오고 있었다.

이지운은 살짝 열린 문틈 사이로 병실 내부를 살폈다.

누구지? 정장을 입고 있는 걸로 봐서 의사는 아닌 것 같은데.

중년 남자는 침대 근처 의자에 앉아 서태천과 대화를 나누고 있었다. 귀를 가만히 기울이니 그들의 말소리가 들렸다.

“그러니까 내가 진작 결혼하라고 하지 않았느냐.”

“아버지는 또 그 이야기시네요.”

헉…! 본부장님 아버지다!

이지운은 두 눈이 튀어나올 만큼 놀랐다. 서태천의 아버지 서형호. 그는 곧 세화 리조트 앤 호텔 그룹의 총괄 오너이므로 이지운에게는 까마득한 회장님인 셈이었다.

회, 회사에서 제일 높은 사람이다…!

아직 신입급에 해당하는 이지운으로서는 커다란 산처럼 여겨지는 사람이었다. 그런데 자신은 하필이면 그런 회장의 아들과 결혼했다.

이지운은 새삼스럽게도 이 상황이 난감했다. 어떡하지? 병실에 들어가야 하나 말아야 하나.

그런데 듣고 있자 하니, 부자는 결혼에 관해 이야기를 하고 있었다.

“이번에야말로 맞선 나가거라. 삼경 물류 막내딸인데 아주 똑똑하고 참한 오메가야. 만나보면 분명히 맘에 들 거다.”

맞선…? 참한 오메가와 만나 봐…?!

순간 이지운의 이마에 핏줄이 투둑 튀어나왔다.

아니. 유부남이 무슨 맞선이에요!

이지운은 방금 전까지의 조심스러운 태도를 집어치우기로 했다. 그는 병실 문을 발칵 열어젖히고 안으로 대뜸 들어갔다.

서형호 회장이 미간에 주름을 잡으며 이지운을 돌아봤다.

“…누구십니까?”

이지운은 어리둥절해하는 서 회장의 면전에 대고 자신을 뭐라고 소개해야 할지 알 수 없었다.

저요? 저… 저로 말할 것 같으면… 음….

패기 넘치게 문을 연 것까지는 좋았는데 대체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모르겠는 그 순간이었다.

“제 오메가입니다.”

서태천의 목소리에 서형호가 두 눈을 부릅떴다. 이지운은 너무 당황스러워 입을 틀어막았다.

“뭐라고? 태천이 네… 네 오메가라고?”

서 회장이 고개를 홱 돌려 이지운을 똑바로 쳐다보았다.

“아… 네. 제, 제가… 그… 본부장님의 오메가입니다.”

이지운은 엉겁결에 장단을 맞췄다. 서태천 입에서 먼저 관계를 인정할 줄은 몰랐지만 어쨌든 사실은 사실이었다.

“그, 그러면 둘이 사귀는…?”

“어… 혼인 신고… 했…습니다.”

“뭐?! 혼인 신고까지?”

회장의 눈이 경악으로 크게 뜨였다. 이지운은 두려웠다. 며칠 전 본 아침 드라마 때문일까. 이런 상황에서는 오메가가 천대를 받고 길거리에 내쫓긴다는 편견에 사로잡혀 있는 이지운이었다.

드라마는 어디까지나 드라마이지만, 워낙에 과몰입을 좋아하는 성격 탓이었다.

이번에야말로 내 아들과 헤어져! 인가…?!

긴장감이 극에 달해 이지운은 손을 떨었다. BBG의 어머니를 만날 때와는 상황이 달랐다. 그때는 클리셰를 즐기고 싶은 마음이 더 컸다면, 지금은 당장 눈앞에 불똥이 떨어지지 않을까 두려웠다.

그사이에 자신이 BBG를 보는 시선이 달라졌기 때문이었다.

그런데 의외의 일이 일어났다.

충격적인 발언을 접한 서 회장의 표정은 당황, 놀라움, 그리고 경악에 다다랐다. 그러더니 점차 진정을 찾아갔다. 서 회장은 무언가 생각하는 듯 잠시 뜸을 들이더니, 아들을 향해 말했다.

“태천이 너 대체 언제 결혼을… 말도 안 되는, 이 아비 몰래 결혼을 했단 말이냐.”

“얼마 안 되었습니다. 말씀드리려 했는데 여러 사정 때문에 정식으로 말씀드리지 못했습니다.”

서 회장은 잠시 멍하니 있다가 고개를 끄덕였다. 충격이 가시고 나니 조금씩 이성이 돌아오고 있었다.

“네가 드디어 결혼을… 내가 그렇게 하라고 하라고 노래를 불러도 안 하던 결혼을 했구나.”

사실 서 회장의 평생소원은 서태천이 가정을 꾸리고 살아가는 것이었다. 부모가 헤어지는 모습을 봐서일까. 서태천은 죽었다 깨나도 결혼에는 관심이 없다며 맞선을 여러 차례 퇴짜 놓았다.

저러다가 평생 혼자 살면 어떡하나, 걱정이 이만저만이 아니었는데 이게 웬걸. 알아서 오메가를 만나다 못해 이미 혼인 신고까지 마쳤다니, 알고 보니 파격적인 알파였다.

그런 면은 서 회장을 닮아 있기도 했다. 서 회장 역시 젊은 시절, 그저 사랑 하나로 모든 사람이 반대하는 결혼을 감행했었다.

부모 단둘이서 몰래 식을 올리기도 했었더랬지. 잠시 그때의 추억을 떠올리던 서 회장이 아들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내 아들놈으로 따지면 은근히 보는 눈이 까다롭기로 유명하지. 그렇다면 저 오메가도 분명 괜찮은 인물일 테야. 서 회장은 고개를 끄덕거렸다.

“그럼 내일 집으로 밥이나 먹으러 오시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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