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화
본부장의 차 안, 퇴근길의 이지운은 폐인이 따로 없었다. 안색은 썩어 있었고, 눈빛은 맛이 가 있었다. 그는 이따금씩 서태천을 힐끔거리며 생각했다.
내 앞에서 다른 오메가랑 시시덕거리는 꼴. 그 꼴만큼은 못 봐. 그런데 오메가 3호님과 BBG 사이를 훼방 놓으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
그는 진지하게 고민에 빠졌다가 퍼뜩 정신을 차렸다.
아니, 나 왜 바람피운 알파 단속하는 오메가처럼 굴고 있지?
이상하다 이상해. 불과 한 달 반 전에만 해도 나는 멋지게 이혼하고 다시 싱글로 돌아가리라 호언장담하고 있었는데. 어쩌다가 이 남자가 다른 오메가한테 갈까 봐 쩔쩔매는 신세가 된 거냐고.
하지만 지금 당장은 열이 받는걸? 이건 엄연한 바람이야. 바람은 뭐다?! 비도덕적 행위다. 그러니 법적 배우자인 내가 이 정도 비난은 할 수 있는 거지!
열이 받은 이지운이 손에 잡히는 부채를 집어 팔락팔락 부치자, 서태천이 물었다.
“많이 덥습니까?”
“아, 아뇨.”
“아까부터 가만히 못 있는 것 같은데 부채까지 부치네요. 에어컨 온도 좀 내려 드리겠습니다.”
“아… 네. 감사합니다.”
흥분한 티가 났나. 이지운은 딴청을 부리며 부채질을 멈췄다.
“그나저나 오늘 제일 먹고 싶은 게 뭐예요.”
오늘은 숙려 일지에 부부 동반 식사 사진을 업데이트하는 날이었다. 서태천이 요리 당번이었기 때문에, 이지운에게 메뉴 선택권이 있었다.
그럼 복잡한 요리로 괴롭혀 주마.
“지상 최고의 리조또! 밥은 고소하게 치즈는 담백하게, 간은 짜지 않게! 거기다가 스테이크도 구워 주세요. 두툼한 안심으로요. 아, 지난번에 제주도에서 먹었던 치즈 샐러드도 흉내 내서 하나 만들어 주시고요.”
“네. 그래요.”
서태천은 간단하게 답하더니 정말로 그 요리들을 뚝딱 만들어냈다. 상다리가 부러질 정도로 호화롭게 차려진 상차림에 이지운의 식욕이 화끈하게 되살아났다.
아, 진짜 요리 하나는 끝내준다니까. 얄밉긴 하지만 인정할 건 인정.
이지운은 눈을 새초롬하게 뜨고 포크질을 시작했다. 담백하면서도 고소한 리조또 맛이 환상이었다.
“너무 맛있어.”
멈추지 않고 숟가락질을 하던 때였다. 서태천의 얼굴에 옅은 미소가 걸렸다. 이지운은 순간 눈을 크게 떴다.
심봤다! 웃는 얼굴 봤어!
잠깐. 가만 보니까 제주도에서 웃었을 때도 밥 먹을 때였잖아. 루프탑 레스토랑에서 파스타랑 스테이크랑 이것저것 시켜놓고 먹던 때 아닌가?
…그렇다면 이건 우연이 아니야.
이지운은 깨달음을 얻은 기분이었다.
이 인간 보시게. 내가 밥을 먹었다 하면 실실 쪼개시는군요. 제가 제대로 파악해 버린 것 같습니다.
“다 먹었습니까?”
“네. 치우는 건 제가 할게요.”
“숙려 일지용 사진은 찍었습니까?”
“아! 아니요. 어떡하지?”
사실 사진 첨부 없이 내용만 잘 기술해도 감점이 없다는 걸 알고 있지만, 그럼에도 이지운은 숙려 일지를 꼬박꼬박 쓰는 게 망설여졌다. 5일 이상 연속으로 쓰면 가산점이 주어지기 때문이었다. 반대로 5일 이상을 연속으로 쓰지 않으면 불량한 숙려자로 분류되어 사정없이 감점을 당했다.
“사진 없어도 되긴 할 텐데요.”
“그건 그래요.”
서태천이 정확한 팩트를 짚어 주자 이지운은 묘하게 속이 상했다.
…감점당하고 싶다.
그는 앱에 이것저것 타이핑을 치는 척하다가, 일지를 삭제했다.
식사 후, 이지운은 서태천의 눈을 피해 한약을 한 봉지 먹었다. 이상하게 이 약을 먹으면 잠도 잘 왔고, 아침에 일어날 때도 개운했다.
어머님이 몸에 좋은 거라고 강조하더니 확실히 효과가 있긴 하구나. 근데 좀 몸이 더워지고 혈액순환이 과하게 잘 되는 것 같기도 해.
9월 초로 접어든 시기였지만, 이지운은 오늘 무척이나 덥다는 생각에 부채질을 하며 모니터를 들여다보았다. 그는 화면에 엑셀을 띄워놓고 몰래 인터넷 창을 켠 다음 사무실용 선풍기를 고르고 있었다.
음. 이건 너무 비싸고….
오, 리모컨 달린 모델도 있네? A/S도 잘 된다는 것 같고… 어떤 걸로 하면 좋을까.
그가 쇼핑에 열과 성을 쏟는 중이었다. 책상 위에 올려놓은 핸드폰이 요란하게 진동했다.
뭐지?
액정을 보니 모르는 번호였다. 어지간해서는 모르는 번호는 받지 않는 게 이지운의 특징이었다. 보통 스팸 전화나 보험 가입 권유 목적인 경우가 많았기 때문이었다.
이지운은 전화를 무시하고 다시 모니터로 고개를 돌렸다.
“색상은 화이트와 블랙… 나는 화이트 파지.”
원하는 모델을 장바구니에 담고 결제를 누르려는데, 또다시 전화가 울렸다. 이번에도 같은 번호였다.
“뭐야, 자꾸.”
보통 이런 전화를 두 번이나 하나? 이지운은 짜증이 났다. 아예 번호를 차단하고자 핸드폰 액정을 만지는데, 실수로 연결 버튼이 눌렸다. 그리고 수화기 너머에서 젊은 여자의 목소리가 들렸다.
-여보세요?! 이지운 님?
다급한 목소리였다. 이지운은 이게 뭔가 싶어 핸드폰을 귀에 가져다 댔다.
“여보세요?”
-서태천님 배우자분 되시죠?
이지운은 처음에 그 말을 알아듣지 못했다. 본인이 서태천의 배우자인 건 맞지만, 다른 사람 입으로 그 소리를 듣는 건 거의 처음이었기 때문이다. 아니, 그건 그렇고 내가 서태천의 배우자인데 그건 왜 물어보지.
“맞는데요. 왜 그러시죠?”
-여기 강남OO 대학병원 응급실이에요. 서태천님이 지금 여기 계십니다.
“네?!”
이지운이 버럭 소리를 지르자 근처에 있던 팀원들이 그를 쳐다보았다.
-강남역 사거리 추돌사고 때문에 긴급 후송되셨어요. 일단 가족분이 오셔야 하니 알려 드리는 겁니다.
“강남역에서요? 이… 이럴 수가.”
-최대한 빨리 와 주시기 바랍니다.
“아, 알겠습니다. 지금 당장 가겠습니다.”
전화를 끊은 이지운의 손이 가늘게 떨렸다. 민혜경 대리가 넋이 나간 이지운을 보며 물었다.
“이지운 주임. 무슨 일이야?”
“저, 저… 누가 사고가 났대요. 저 가 봐야, 가 봐야 돼요.”
“그래? 그럼 부장님 오시면 내가 보고할 테니까 일단 가. 조퇴 처리는 알아서 할게, 너무 걱정 말고.”
사색이 되어 벌벌 떠는 이지운을 보며, 팀장이 말했다. 이지운은 정신없이 일어나다가 책상 위의 무선 마우스와 서류 더미를 떨어뜨렸다. 그만큼 제정신이 아니었다.
“내가 주울게. 침착해요, 이 주임.”
민혜경이 이지운의 어깨를 두드려 주었다. 이지운은 시퍼래진 낯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급박하게 사무실을 뛰어나가는 이지운의 뒷모습을 보며, 민혜경 대리는 가볍게 한숨을 지었다. 대체 누가 다쳤길래 저렇게 놀랄까.
그런데 잠시 후. 이번에는 사무실 반대편이 웅성웅성했다. 1팀장과 2팀장이 잠시 무슨 이야기를 나누는가 싶더니, 누군가가 소리쳤다.
“본부장님 사고 나셨대요.”
“뭐?”
“아까 강남역 근처에서 추돌 사고 크게 났거든요. 거기 계셨던 모양이에요.”
“세상에!”
민혜경 대리는 깜짝 놀랐다.
“어쩌다가… 어머. 아까 이 주임 지인이랑 같은 사고인가?”
***
회사 밖으로 뛰쳐나온 이지운은 지하철로 가려다가 바로 방향을 틀었다. 대중교통을 똑바른 방향으로 타고 갈 엄두가 나지 않았기에, 택시로 가는 게 나을 것 같았다.
하지만 하늘은 이지운을 도와주지 않았다. 도대체 언제부터 내리고 있었는지, 굵은 장대비가 후두둑 쏟아져 도로 위에 택시가 씨가 마른 상황이었다.
“택시!”
이지운이 애타게 불러 보았지만, 이미 손님을 태운 택시만이 빗물을 튀기며 유유히 지나가기를 반복했다.
“제발, 제발.”
거의 10분을 기다린 끝에 이지운은 겨우 택시를 잡을 수 있었다.
“OO 대학병원으로 가 주세요.”
“예.”
추돌사고의 여파 때문에 길이 막히는 건지, 아니면 비 때문인지 정체가 극심했다. 이지운이 예상했던 것보다도 도착이 훨씬 지연되며 시간만 흘렀다.
그는 뒷좌석에서 손을 모으고 기도했다. 아무리 허울뿐인 남편이라지만, 그 사람이 다치는 건 절대로 원하지 않았다. 제발 많이 다치지 않았기를. 아무 일 없이 집으로 돌아올 수 있기를.
하지만 아까 간호사는 응급실로 오라고 했다. 그 말이 이상하게 불길했다. 이지운은 초조하게 손톱을 물어뜯으며 영겁 같은 20분을 버텼다. 드디어 병원 앞에 도착했을 때, 그는 날듯이 택시에서 내렸다.
낯선 병원에 커다란 대학병원이라 길을 찾는 것도 쉽지 않았다. 정신없이 사방을 살피며 도대체 응급실이 어디 있는지 찾아 헤맸다.
그는 여러 번 헛발질한 끝에 병원 1층에 있는 응급실을 찾아 들어갔다.
“헉, 헉. 저 서태천 환자 보호자입니다.”
“오셨네요. 지금 서태천님 진료 끝마치고 입원하셨거든요. 병실로 이동하셨어요.”
간호사가 급하게 내선 전화를 걸더니만, 잠시 후 이지운에게 말했다.
“이 명찰 가지고 609호 병실로 가세요.”
간호사가 알려준 대로면 입원 병동은 별개의 장소에 있었다. 이지운은 허겁지겁 건물을 나서 입원 병동 6층까지 올라갔다.
609호 앞에 도착한 그는 거의 울 것 같은 얼굴을 하고 있었다.
이 안에 서태천은 어떤 모습을 하고 있을까. 의식불명? 산소 호흡기? 아니면 날 못 알아본다든가….
“안 돼. 싫어.”
이지운이 눈물을 글썽거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