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화
“이 주임. 제주도에서 뭐가 어쨌단 겁니까?”
“아, 제가 너무 잘 놀았다고요. 막판까지 진짜 잘 즐기다 왔어요.”
이지운은 억지로 웃었다.
“그렇군요. 현지 직원들한테 대강 보고 들었습니다.”
“네? 보고요?”
“최종 보고 들을 사람은 나니까요.”
“아….”
이지운이 머리를 긁적였다.
어디까지 들었을까? 내가 아무도 안 골랐고 최종 선택은 파투났다는 사실도 알고 있을까? 알파 2호고 나발이고 아무 관심 없이 보였다는 것도… 알고 있을까.
이지운이 가만히 생각에 잠겨 있는데, 서태천이 시계를 풀었다.
“전 그럼 이만 씻으러 가 보겠습니다.”
“아, 네.”
그가 넥타이를 잡아 내리며 욕실 방향으로 걸어갔다. 이지운은 이루 말할 수 없이 싱숭생숭했으며, 마음이 복잡했다.
내가 아무도 고르지 않았다는 걸 알아줬으면 해. 그리고 만약 당신이 남아 있었더라면 아마도 내 선택은.
이지운은 제 얼굴이 살굿빛으로 물든 줄도 모르고 입술만 삐죽였다.
서태천이 씻는 동안 이지운은 냉장고를 열어 한약 박스를 꺼냈다. 파우치를 뜯어 컵에 액체를 따른 다음, 가볍게 전자레인지에 돌리고 꺼내자 구수하면서도 쌉싸름한 향이 공기 중에 가득 퍼졌다.
흠. 이 약 묘하게 신비로운 매력이 있단 말야. 이것 때문인지는 몰라도 기운이 펄펄 솟는 것 같기도 하고, 입맛도 도는 기분이다.
“몸에 좋은 건 많이 먹어도 괜찮은 거겠지?”
어머님 말로는 하루에 한 포씩 먹으라 했지만, 이지운은 좋은 게 좋은 것 아니겠냐고 생각했다.
슥.
그는 컵에 따른 한약을 들어 한 모금 마셨다.
“캬.”
머그컵마저도 주인을 닮아 시커멨기 때문에, 한 모금 마신 걸로는 아무런 티가 나지 않았다. 이지운은 내친김에 두 모금을 더 마셨다. 그때 서태천이 욕실에서 걸어 나왔다.
그런데 웬일로 그는 검은 가운 대신 흰 티셔츠에 편안해 보이는 바지를 입고 있었다.
제주도에도 그렇고 여기서도 그렇고, 요새 검은 가운을 잘 안 입네? 그나저나 피지컬이 좋으면 저렇게 아무 옷이나 걸쳐도 태가 나는구나. 좋겠다.
이지운은 서태천을 구경하다가 아차, 하며 컵을 들었다.
“본부장님. 이거 드세요.”
“그게 뭡니까?”
“아까 집 앞에 택배로 와 있었어요. 발송자가 최영희 님… 혹시 어머님이신가요?”
서태천에게는 최 여사와 따로 만난 적 있다고 밝히지 않았기 때문에, 약을 택배로 받은 척 말을 꾸며냈다.
“네.”
“겉 포장에는 하루에 한 포씩 꼭 챙겨 먹으라고 써 있던데.”
서태천은 그런 약 따위 관심 없다는 듯 손사래를 쳤다.
“됐습니다.”
“아니, 이거 몸에 좋대요.”
“보약 같은 거 안 먹어요.”
“네?”
“받아 줘서 고마운데, 난 필요 없어요. 냉장고에 넣어 두든지 해요.”
“어… 어, 네.”
그러더니 서태천은 뒤돌아 침실로 들어갔다.
이게 웬 떡이야. 이 한약 내가 먹어도 되는 거 맞지?
이지운은 시원하게 원샷을 하고 손등으로 입술을 문질러 닦았다.
크으. 뭘로 만들었는지 몰라도 스태미너가 솟구친다.
***
평소처럼 서태천과 나란히 누웠지만, 이지운은 쉽사리 잠이 오지 않았다. 자꾸만 자릴 뒤척이자 옆에서 낮은 목소리가 들려왔다.
“안 자고 뭐 합니까.”
“죄송해요.”
“죄송할 건 없고, 그만 자죠.”
“네.”
사실 이지운은 제주도 리조트에서 함께 셀카를 찍은 밤을 회상 중이었다. 비록 술에 취했었지만, 자신의 팔을 낚아채 침대에 짓누르던 악력만큼은 생생하게 기억이 난다.
이지운은 이불 밖으로 드러난 서태천의 손을 힐긋 훔쳐봤다. 핏줄기 불거지고 손마디가 굵직한 손이었다.
저 손이 날… 날 덮치듯이 누르질 않나, 종아리를 주무르질 않나 난리도 아니었다.
그뿐인가? 제주도에서의 본부장은 정말 다른 사람 같았어. 특히 그 웃는 얼굴… 로봇 같은 표정이 아닌, 해맑게 웃는 모습은 정말… 내가 태어나서 본 것 중에 가장 보기 좋았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는데.
혹 다시 볼 순 없을까?
이지운의 마음속에 작은 충동이 솟아났다. 다시 한번 서태천을 그때처럼 환하게 웃게 하고 싶었다.
근데 그때 왜 웃었지? 이유가 뭐지? 웃음을 유발하는 코드가 대체 뭘까.
“으음….”
그러다가 생각은 점차 내가 직접 서태천을 웃겨보자, 쪽으로 발전했다. 이지운은 뭐든지 한번 마음을 먹으면 실천하지 않고서는 못 배기는 인간이었기 때문에 그의 생각은 점점 구체적으로 되어 갔다.
웃긴 표정 한번 지어 봐? 아니야. 그건 너무 민망한 데다가 저 인간이 안 웃으면 나만 바보 돼.
서태천의 웃음 코드가 이지운 코끝에 묻은 파스타 소스였다는 것은 모르고, 이지운은 엉뚱한 쪽으로만 상상력을 발휘했다. 춤을 출까, 노래를 부를까, 자빠질까….
아! 잠깐!
그러다가 이지운의 머릿속에 기막힌 아이디어가 떠올랐다.
“본부장님. 주무세요?”
“안 잡니다.”
“저희… 셀카 찍어요.”
“셀카요?”
“숙려 일지에 올려야죠.”
“…침대 셀카 요일은 오늘이 아닐 텐데요.”
침대 셀카는 매일 올리는 과제가 아니었기에, 서태천의 말이 맞았다. 하지만 이지운은 어떻게든 그와 사진을 찍고 싶었다.
“미리 찍어 두면 좋잖아요.”
“음….”
“얼른요.”
“알겠습니다.”
서태천이 무드등 조도를 밝게 높인 다음 몸을 일으켜 침대 헤드에 기대었다.
“찍죠.”
이지운이 핸드폰 카메라를 들고 두 사람이 다 담기도록 프레임을 조절했다.
“좀 웃어 보세요.”
“말했던 것 같은데요. 전 원래 안 웃는다고.”
앗. 거짓말쟁이. 내 앞에서 그렇게 환하게 웃어 놓고는!
“웃으면서 찍어야 점수 잘 나오잖아요. 우리 한번 환하게 웃어 봐요.”
“싫습니다. 못 해요.”
서태천의 칼 같은 거절에 이지운은 시무룩해졌다. 쳇, 그게 뭐라고 한 번을 안 웃어 주냐!
이지운은 결국 무뚝뚝한 조각상과 사진을 찍어 올렸다.
***
이지운은 다음 날 아침부터 어떻게 해야 서태천이 환하게 웃을까. 그것 하나만 연구하는 학자처럼 행동했다.
“상대방의 취향을 분석하는 것부터 시작해야지.”
이지운은 사뭇 진지하게 서태천의 웃음 코드를 분석했다. 그런데 그러려면 상대에 대한 디테일한 정보가 필요했다.
좋아하는 노래, 영화, 개그맨, 최근에 재미있게 본 콘텐츠를 모조리 분석해야 유의미한 결과가 나오지 않을까.
이지운이 골머리를 싸매고 있는데, 옆자리 민혜경 대리가 커피를 건넸다.
“아, 감사합니다. 대리님.”
“고맙긴. 그나저나 제주도는 어땠어. 빨리 말해 봐.”
“아… 좋았죠. 날씨도 좋았고요.”
이지운이 대답을 얼버무리자 민혜경 대리가 눈썹을 찌푸렸다.
“에이, 그런 거 말고. 연애적으로 말이야.”
“연애적으로요? 어… 그게.”
“내가 듣기로는 아무도 선택 안 했다던데. 맞아?”
“어떻게 아셨어요?”
“다 아는 수가 있지.”
회사에 소문이 쫙 났구나. 이지운은 그렇게 생각하며 차라리 잘 되었다고 생각했다. 서태천도, 다른 사람들도 다 ‘이지운은 그 어떤 알파도 선택하지 않았다.’라고 알고 있는 게 제일 속이 편할 듯했다.
“네. 그냥… 마음이 통하는 사람이 없어서.”
“그랬구나. 괜찮아요. 우리 주임님, 연애는 다음에 하면 되지.”
“네. 일이나 해야죠.”
“그런 의미에서 이거 좀 재무팀 가져다주고 올래요?”
민 대리가 파일철과 USB 하나를 내밀었다.
“아, 네. 제가 다녀올게요.”
재무팀 사무실은 마케팅팀과 분리되어 있었고, 그곳에 가려면 본부장실을 지나가야만 했다. 이지운은 자기도 모르게 본부장실 입구를 힐끔거리며 걸었다.
그런데 그가 본부장실 근처에 제법 가까이 다가갔을 무렵, 문이 열리며 사람이 한 명 걸어 나왔다.
“저 그럼 들어가 볼게요. 본부장님.”
“네.”
헉. 오메가 3호님이다.
이지운은 너무 놀라 손에 들고 있던 파일철을 떨어뜨릴 뻔했다. 아무리 눈을 씻고 봐도 우아한 자태로 본부장실을 빠져나와 복도로 향하는 여자는 오메가 3호님이 맞았다. 듣기로는 고객지원실에 있다고 했는데 그 사무실은 별관에 있다.
그렇다면 여기까지 굳이 찾아온 거야. 오메가 3호님은… 본부장님과 따로 연락하고 있었던 거다. 아니, 잘 되어가고 있는 거야.
이지운은 논리를 마구 건너뛰며 성급한 결론을 내렸다.
만약… 오메가 3호님과 본부장이 연인 사이로 발전한다면, 나는 어떻게 되는 거지?
이지운의 머릿속이 수십 가지 물감이 섞인 팔레트처럼 복잡해졌다.
두 남녀가 눈이 맞는다면, 나가떨어져 줘야 하는 쪽은 나다. 나는 처음부터 서태천의 인생에 찾아든 불청객에 불과하니까. 우리 사이에는 어떤 유대감도 사랑도 없고, 그냥 행정 착오만이 존재한다.
이지운은 혼자만의 망상에 빠져 주먹을 부들거렸다.
그 시각, 본부장은 중후한 소재의 테이블을 앞에 두고 앉아 결재 문서들을 살피는 중이었다. 오전 11시가 되자 지잉. 하고 알람이 울렸다. 숙려 앱에서 보낸 시간 맞춤 알람이었다.
<서태천 님. 벌써 5일이나 숙려 일지가 밀렸어요. 5일 이상 일지 미작성 시 감점이 됩니다! 꼭 일지를 작성하세요!>
화면 안에서는 앱의 마스코트 ‘숙려둥이’가 걱정 가득한 표정을 지으며 일지를 쓰라고 춤을 춰댔다.
<일지를 작성하시겠습니까?>
서태천은 손을 들어 ‘아니오’를 꾹 눌렀다.
<감점 위기입니다. 그래도 일지를 작성하지 않으시겠습니까?>
서태천은 확인을 쿡, 누르고 핸드폰을 엎어둔 뒤 다시 업무를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