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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공적인 이혼을 위한 신혼생활-18화 (18/100)

18화

설마 나일까. 아니면 오메가 3호님, 그것도 아니면 완전히 다른 사람…?

어서 결과를 알고 싶어. 하지만 결과를 모르고 싶기도 해.

그가 양가감정에 시달리며 식은땀을 주룩주룩 흘리고 있는데, 스태프들이 어서 바깥으로 나올 것을 종용했다. 이지운은 꿀꺽 침을 삼키고 뒷마당으로 나갔다.

마주 본 스무 명의 참가자들은 비장하고 진지한 모습이었다. 이지운은 자기 자리에 서서 뒷짐을 진 채 자꾸만 가빠오는 숨을 골랐다.

서태천이 오면 눈을 마주치고 인사를 해야 할 텐데. 용기가 안 나네. 그리고 내 눈앞에서 다른 오메가를 선택한다면 난 표정 관리 어떻게 해야 돼?

심장이 자꾸만 떨려오는데 시간은 착실히 흘러갔다. 그런데 뭔가 이상했다. 서태천 자리가 비어 있는데 제작진이 카메라에 녹화 시작을 알리는 불을 켰다.

어…? 서태천이 안 왔는데 왜 시작하지.

“저기. 알파 1호분 아직 안 오셨는데요.”

이지운이 손을 들고 묻자 조연출이 아차, 하며 대답했다.

“맞다. 공지한다는 걸 깜빡했네요. 오늘 알파 1호님은 회사 일정상 급하게 서울로 돌아가셨고요. 최종 선택에 불참하십니다.”

“네?”

이지운은 자기도 모르게 큰 소리를 냈다.

“아쉽지만 회사에서 보자는 말씀 남기셨어요. 그럼 순서에 맞춰서 알파 2호님부터 최종 선택하시면 됩니다.”

이지운은 허망했다. 그가 누굴 선택할지 가슴 졸였던 것도, 혼자 싱숭생숭해했던 것도. 만에 하나 서태천이 자신을 선택한다면 어떻게 해야 할지 고민했던 것도 다 물거품이 되었다.

이로써 그의 마음을 알 길은 사라졌다.

이지운에게는 서태천에게 직접 ‘당신은 누굴 선택하려 했었나요.’라고 물어볼 용기가 없었으니까.

“알파 2호님의 선택은요?”

조연출이 기현진에게 발언권을 주었다.

“저는 일편단심입니다. 오메가 1호님! 제 오메가가 되어 주세요!”

기현진 대리가 산 정상에 오른 사람처럼 크게 외쳤다. 다소 쪽팔린 행동이었지만, 이미 넋이 나간 이지운에게 그의 행동은 아무런 감정도 이끌어 내지 못했다.

“죄송합니다. 알파 2호님.”

“아….”

좌중에 탄식이 쏟아졌다. 기현진은 머리를 감싸쥐고 주저앉았다. 이지운은 눈을 내리깔며 작게 고개를 숙였다.

“저는… 아무도 선택하지 않겠습니다.”

***

혼란의 러브 빌리지 프로젝트는 이렇게 막을 내렸다. 돌아가는 비행기 안에서 이지운은 멍하니 창밖을 봤다.

내가 무슨 부귀영화를 보자고 짝짓기 프로그램에 나가 이혼할 남편의 매력만 발견하고 돌아가는 걸까. 나에게는 관심이 없어 보이는 내 남편, 생각해서 부질없다는 건 알지만 머릿속을 계속 맴도는 잘생긴 로봇.

“….”

집 앞에 도착한 이지운은 현관문을 열고 집안에 들어섰다. 서태천은 당연하게도 온데간데없이 보이지 않았고 텅 빈 집안만이 이지운을 반겨 주었다.

회사에 있는 건가. 어제 급하게 올라간 걸로 봐서 급한 업무가 생겼나 보다.

잠깐. 왜 이렇게 관심이 많아. 이지운, 스탑.

이지운은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며 다시금 서태천에게 쏠리는 관심을 흐트러뜨리려 노력했다. 그때 이지운의 전화가 요란하게 울렸다. 발신자는 바로 서태천이었다.

깜짝이야. 자기 생각하는 줄 알았나?

“흠흠. 여보세요.”

-잘 도착했습니까.

“네. 이미 집이에요.”

-별일은 없었습니까.

별일이라… 겪기는 했죠. 주로 당신 때문에.

“없었어요.”

그래도 마지막에 커플이 되거나 한 것은 아니었으므로, 이지운은 최대한 단조로운 톤으로 대답했다.

“오늘 저녁에 늦을 것 같아서 전화했습니다. 저녁 먼저 먹어요.”

“아, 네. 알겠습니다.”

전화가 뚝 끊겼다. 지극히 사무적인 목소리에 정중한 말투였다. 하지만 낮고 굵직한 저음, 묘하게 사람 마음을 설레게 하는 느낌이었다.

“왜 목소리까지 좋고 난리냐….”

이지운이 한숨을 쉬고 있는데 다시 전화가 울렸다.

또 전화네?

당연히 서태천일 것이라고 생각하고 핸드폰을 들었는데 아니었다. 서태천의 어머니 전화였다.

“어? 어머님.”

-나다. 태천이랑 같이 있니?

“아뇨. 본부장님 지금 회사신 것 같은데요.”

-그래? 애가 전화를 안 받네. 너는 그럼 혹시 어디니.

“전 집이요.”

-그러면 잘 됐다. 내가 뭣 좀 줄 게 있어서 그런데 찾아가마.

최영희 여사의 말에 이지운은 알겠다고 대답했다. 대략적인 약속 시간을 잡고 기다리니 30분 조금 안 되어 다시 전화가 걸려왔다.

-지금 나오면 된다.

“네. 바로 나갈게요.”

대문을 열고 나가 보니 고급스러운 세단이 한 대 세워져 있었다. 최영희 여사가 운전석 창문을 열고 손짓을 했다. 그녀는 순간 이지운을 뭐라고 불러야 할까 망설여졌다.

새아가? 사위? 아니야. 정식으로 결혼했다고 보기는 어려워. 그렇다고 해서 이쪽, 저쪽 하기도 뭐하고… 아, 모르겠다.

“지, 지운아!”

“네. 어머님. 안녕하세요.”

이지운이 쪼르르 달려와 꾸벅 인사를 했다. 살갑기 그지없는 모습에 최 여사는 괜한 민망함을 느꼈다.

“뒷좌석에서 물건 좀 꺼내자.”

“네.”

차에서 내린 최 여사와 이지운이 뒷좌석 문을 열었다. 한약 박스가 보였다.

“어, 약이에요?”

“응. 이거 태천이 약인데 하루에 한 포씩 꼭 먹으라고 좀 전해 줘.”

“아. 알겠습니다.”

“몸에 좋은 거니까 꼭 잊지 말고 먹으라고 하고… 그리고 잠시만.”

최 여사가 조수석 문을 열었다. 이번에는 종이봉투가 나왔다. 그 안에 들어 있는 건 OO호텔의 망고 빙수였다.

“어… 이건?”

“오다가 보니까 특가 세일 중이더라고. 덜컥 샀는데 녹을까 봐 좀 그렇네. 그냥 너 주고 갈게.”

최 여사는 냉랭한 표정을 지으며 이지운의 품에 빙수를 안겨 주었다.

“감사합니다!”

안 그래도 속이 답답해서 시원한 게 당기던 참인데 잘 됐다. 올여름은 망고 빙수 복이 터지는구나, 터져.

활짝 웃는 이지운의 모습을 보면서 최 여사는 씰룩이는 입꼬리를 열심히 단속했다.

“그럼 난 가 보마.”

“네. 살펴 가세요!”

이지운이 최 여사의 차 뒤에다가 손을 흔들며 열심히 인사를 했다.

집안으로 들어온 이지운은 빙수 포장을 뜯고 사진부터 찍었다. 언제 봐도 환상적인 비주얼을 흠뻑 즐긴 다음, 커다란 숟가락으로 빙수를 마구 뽀개서 거의 마시듯이 입안에 들이부었다.

역시 호텔 망고 빙수는 천상의 맛이구나. 아, 달다 달아.

빙수 그릇을 깨끗이 비운 이지운은 배를 두드리며 소파에 기댔다. 그러다가 그의 시선이 테이블에 올려놓은 한약 박스로 향했다.

“흠… 무슨 약인지는 안 쓰여 있네.”

안을 슬쩍 들여다보니 무슨 즙인지 몰라도 파우치 형태로 낱개 포장이 수십 개 들어 있었다.

“몸에 좋은 거랬지?”

포장도 격식 있고 상자마저 고급스러워, 유명한 한의원에서 달여온 것이 아닌가 생각이 들었다.

…하나쯤 먹어도 모르지 않을까?

요새 스트레스가 극에 달한 이유가 뭐야. 바로 본부장 때문 아니야. 그러면 내가 이거 받아 준 값으로 치고 한 봉지쯤 먹어도 되지 않나?

이지운은 열심히 자기합리화를 하며 슬그머니 파우치 하나를 꺼냈다. 십장생 캐리커처와 한자가 복잡하게 어우러진 포장지를 쭉, 찢고 입에 갖다 대자마자 몸에 좋을 것 같은 냄새가 확 풍겼다.

그뿐인가. 한입을 꿀꺽 삼켜 보자 눈이 번쩍 뜨였다. 보약 특유의 쓴맛은 최소한으로 나면서도 건강미 넘치는 맛이 좔좔 흘렀다. 목에 걸리는 것도 없이 꿀떡꿀떡 넘어가는 맛에, 이지운은 감탄을 연발했다.

끝내주는데? 옛날 황제들이 먹던 약이 이런 맛이었을까.

기분 탓인지는 몰라도 갑자기 호랑이 기운이 솟아나고 허했던 몸이 튼튼해지는 것만 같았다. 이지운은 아주 만족스럽게 한 팩을 다 비운 다음, 증거 인멸에 나섰다.

“가만 보자… 어디에 버려야 완벽하게 숨길 수 있을까.”

이지운은 검은 비닐봉지를 찾아내 쓰레기를 집어넣고 입구를 꽉 묶었다. 그런 다음에 쓰레기통에 넣으니 티가 하나도 안 났다.

“부부 사이에 이 정도는 나눠 먹을 수 있는 것 아니겠어.”

이지운은 보약 상자를 다시 꼼꼼하게 봉한 다음 냉장고 안에 집어넣었다.

“좋다. 이제 쉬어야지.”

이지운은 가볍게 스트레칭을 하고 욕실로 향했다.

***

서태천은 자정 가까운 시간에야 집에 도착할 수 있었다. 긴급 안건이 생겨 이사회 소집까지 갔지만 다행히 일은 일단락되었다.

하지만 밤 비행기로 제주에서 김포로, 또다시 강남 사무실로 옮겨 가며 시시각각 보고를 받고 지시를 내리는 과정에서 받은 스트레스가 어마어마했다.

“후우.”

현관 비밀번호를 누르고 집안으로 들어선 그는 넥타이부터 느슨하게 풀고 재킷을 벗었다. 이지운은 당연히 침실에서 자고 있으리라 생각하면서. 그런데 웬걸. 이지운은 소파에 누워 눈을 감고 있었다.

“…어? 오셨어요.”

그가 몸을 벌떡 일으켜 앉았다.

“네. 늦었습니다.”

“식사는요.”

“했죠. 이 주임은요?”

“저도 먹었어요.”

간단한 대화가 끝나자 둘 사이에는 침묵이 흘렀다. 어색함을 못 견딘 이지운이 먼저 입을 열었다.

“저, 제주도에서는.”

그러다가 급하게 입을 다물었다.

뭐야 이지운. 너 지금 ‘나 제주도에서 아무도 안 골랐수’라고 말하려고 한 거야? 그렇게 말해서 어디다 쓰려고.

이지운은 오늘 하루 종일 머리를 지배한 제주도 이슈를 내뱉을 뻔했다. 그 사실에 식겁해, 그는 빠르게 제 입술을 앙다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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