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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공적인 이혼을 위한 신혼생활-16화 (16/100)

16화

“이야. 알파 1호님, 돌발 고백을 하셨는데요. 그러고 보니 어제 알파 1호님이랑 오메가 1호님이 프라이빗 데이트를 하셨었죠. 만족스러우셨던 겁니까?”

“네.”

“오. 호감을 느낀 포인트가 뭐였나요?”

“제 이상형에 부합하는 면이 있었습니다.”

이상형이라는 단어에 이지운은 눈이 튀어나올 뻔했다. 아니, 제… 제가요?

“이상형이라면 구체적으로 어떤 모습이었습니까?”

“음료수를 엄청나게 잘 마시더군요. 전 밥 잘 먹는 사람이 좋아서, 음료수도 일맥상통합니다.”

이지운은 이마를 짚었다. 아니. 다른 이유도 아니고 에이드 좀 벌컥거렸다고 날 찍어?

“흥미롭습니다. 그럼 두 알파의 선택을 받은 오메가 1호님. 대답의 시간이 왔습니다.”

“아, 네….”

“마음의 결정을 내려 주세요.”

이지운은 식은땀을 흘렸다. 바로 코앞에는 여전히 무릎을 꿇고 이글이글한 눈으로 자신을 쳐다보고 있는 기 대리. 옆쪽에는 표정을 읽을 수 없는 정중한 로봇 남편.

그런데 그 로봇과 눈이 마주친 순간, 이지운의 가슴이 덜컥했다.

어? 나 또 이러네. 부정맥 증상이 시작됐나 봐. 서울 가면 병원을 한번 가 봐야겠는데?

이지운은 고개를 잠시 갸웃한 다음, 두근거리는 가슴께를 살짝 만지작거렸다. 그리고 입을 열었다.

“…제 선택은 알파 1호님입니다.”

잘생긴 로봇 남편과 부담스러운 로커는 비교가 안 되지 않는가. 아무리 그래도 로커를 받아 줄 수는 없었다.

그래, 그래서야. 나는 알파 1호님이 좋은 게 아니라 알파 2호님이 부담스러워서 차선책을 선택한 거다.

이지운은 자기합리화를 마치고 서태천과 눈을 마주쳤다. 제작진과 참가자들이 이지운에게 박수갈채를 보냈다.

제작진은 곧이어 기현진에게 마이크를 쥐여 주었다.

“알파 2호님. 지금 심경이 어떠세요.”

“후… 실망스럽지만, 최종 선택이 남아 있으니 괜찮습니다.”

기현진은 잠깐 시무룩해했다가 바로 얼굴을 폈다.

“그러면 이대로 물러나지 않겠다는 의미일까요?”

“네! 반드시 오메가 1호님의 심장을 얻어내고 말겠습니다.”

아, 제발 그만. 이지운은 눈을 감고 명상이라도 하고 싶었다. 혈압 좀 낮추게.

***

“덕분에 살았습니다. 감사해요.”

곤란에 빠진 자신을 구해 준 은인이기에, 이지운은 서태천과의 저녁 데이트 자리가 시작되기 전 감사 인사를 건넸다. 제작진들이 있는 곳에서 대놓고 말하긴 좀 뭐했기 때문이다.

“감사할 게 뭐 있습니까.”

“저 구해 주셨잖아요.”

“단순히 그것만은 아닌데요.”

“네?”

이지운이 물었지만 서태천은 다시 대꾸하지 않았다. 그저 눈을 가만히 맞춰올 뿐이었다.

“흠흠. 이제 장소 이동할까요.”

이상하게 저 눈을 똑바로 바라보기가 힘들단 말야.

이지운은 어색함을 느끼며 데이트 장소로 이동했다. 이번 코스는 리조트 루프탑에 위치한 멋진 레스토랑에서 이루어졌다.

저 멀리 바다가 펼쳐져 있고, 다른 테이블에는 손님을 받지 않아 호젓한 분위기를 연출했다. 카메라는 두 사람이 앉은 테이블에 하나를 고정하고 멀찍이서 풀샷을 잡을 용도로 하나를 세팅했다.

그러자 제작진의 기척이 거의 느껴지지 않아, 이지운은 정말로 서태천과 개인적인 만남을 가지는 기분이 들었다.

새우 요리를 빼고, 토마토는 듬뿍 넣은 파스타를 주문할 때는 제 입맛을 확실히 파악하고 있구나 싶었고, 그때 함께 마셨던 와인(그렇게 비싼 줄 몰랐다)을 주문할 때도 지난 일을 다 기억하고 있었구나 싶었다.

“이 정도 시키면 될 것 같은데요, 알파 1호님.”

“더 먹을 수 있는 얼굴입니다.”

“…그러면 깔라마리 튀김이랑 전복구이 하나씩 더 주시고요. 치즈 샐러드는 큰 걸로 바꿔주세요.”

“알겠습니다. 손님.”

어마어마한 양을 주문한 다음 이지운은 헛기침을 하며 서태천의 눈치를 보았다.

“역시 잘 드시네요.”

“제가 좀.”

“그럼 음식 나올 때까지 좀 기다리죠.”

“네.”

서빙을 기다리며 이지운은 서태천을 빤히 보았다. 아까만큼은 아니었지만 지금도 부정맥 증상이 나타나고 있었다.

마음 한구석에서 설마? 하는 의심이 도졌다. <사랑에 빠졌을 때의 증상>이라는 검색창 결과가 너무도 신경 쓰였다.

내가 BBG 같은 타입을 좋아하나. 이지운은 골똘히 생각하기 시작했다. 하지만 대학생 때고 회사 들어와서고 각 잡힌 연애를 못 봐서일까. 이지운은 이렇다 할 이상형도, 자기가 싫어하는 타입도 명확히 가려내지 못했다.

형편상 대학 4년 내내 아르바이트만 했기에 연애를 할 짬이 안 났다. 누굴 소개시켜 준다 해도 주말이나 수업 끝나고는 아르바이트를 해야 해서 그 흔한 소개팅 한번 제대로 못 해 봤다. 그냥 잘생겼네, 알파답네. 그 정도가 이지운이 가려낼 수 있는 전부였다.

그러니 이지운은 지금 눈앞에 있는 서태천이 어떤가. 딱 그것만 판단할 수 있었다.

일단 얼굴. 이목구비가 과하게 뚜렷하다. 난 이런 스타일이 좋은가? 좀 부담되는 것 같기도 하고… 하지만 잘생겨 보여.

다음으로는 키. 평균을 지나치게 웃도는 장신이다. 같이 걷다 보면 표준 키인 자신이 너무 작아지는 기분이 들 때도 있다. 키 차이가 너무 나서 별로인가? …하지만 작은 것보단 나은 듯.

또 하나 떠오르는 것은 돈. 상위 1%에 드는 재벌로 돈이 너무 많다. 돈이야 많을수록 좋다지만 경제적 차이가 너무 나지 않나? 아냐. 돈이 없는 것보다야 백 배 낫지.

머리부터 발끝까지를 곱씹어 보았지만 객관적으로 보니 서태천에게는 단점이랄 게 없었다. 새삼스럽게도 그가 잘난 남자임을 깨닫게 될 뿐이었다.

뭐 이런 인간이 다 있지?

이지운은 묘하게 자존심이 상했다. 또 살짝은 서글퍼지려 했다.

나와 이혼하기 위해 하루도 빼먹지 않고 일지를 쓰는 남자. 처음부터 ‘우리 이혼 한번 제대로 해 봅시다’라고 말했던 남자.

그런 남자가 괜찮다고 느껴지면, 나 좀 불쌍하지 않아?

속이 상한 이지운은 어떻게든 서태천의 단점을 찾고 싶었다. 그렇지 않으면 너무 억울할 것 같았다.

어디 보자. 이 남자의 결함은… 아, 맞다! 인간 같지 않고 삐걱삐걱 로봇 같은 저 태도!

돌이켜 보니 서태천이 활짝 웃는 걸 한 번도 본 적이 없었다. 무슨 AI도 아니고 감정이란 게 없냐. 성격적 결함이 있으니 이 남자는 괜찮은 남자가 아니야!

이지운은 드디어 발견한 서태천의 단점에 흐뭇한 미소를 지었다.

서태천은 혼자 진지해졌다가 손가락을 튕겼다가 울적해졌다가 난리인 이지운을 실시간으로 구경했다. 자신이 이지운을 쳐다보고 있는 줄도 모르고 이랬다저랬다 변화무쌍한 표정을 보고 있자니 재미가 있었다.

지금 당장이라도 손에 연필과 종이가 있다면 슥 그려낼 수 있을 것 같은 생생한 표정. 캔버스에 제대로 담는다면 어떨까.

이지운 말로는 스스로가 평범상이라지만 미학적 관점에서는 결코 그렇지 않다. 섬세한 얼굴선, 새초롬한 눈매 아래 오묘한 톤을 띠는 갈색 눈동자, 새하얀 눈 같은 피부. 자신의 아름다움을 모르는 이지운은, 꽤나 귀엽다.

동상이몽의 두 사람에게 웨이터가 다가왔다.

“주문하신 메뉴 나왔습니다.”

“너무 맛있겠다.”

국내 최고의 쉐프진을 거느린 레스토랑답게 메뉴는 먹음직스러워 보였다.

“뭐부터 먹어야 하지?”

이지운은 아까까지의 고민을 잊어버린 채 진지하게 요리에 집중했다. 파스타, 샐러드, 스테이크 중 뭘 먼저 먹어야 맛있게 먹었다고 소문이 날지 그게 중요했다.

“사진도 찍어야지.”

서태천과 요리가 함께 나오도록 숙려 일지 업데이트용 사진도 찍은 다음, 이지운은 한 손에 스푼 한 손에 포크를 쥐고 비장하게 식사를 시작했다.

“드시죠.”

서태천의 말이 떨어지기 무섭게 이지운은 파스타 접시에 코를 박듯이 고개를 숙이고 면을 흡입하기 시작했다. 아침부터 강한 스트레스에 노출되었으면서 제대로 된 식사는 못 한 상태라 배가 너무 고팠다.

“알파 1호님은 안 드시나요?”

이지운이 고개를 들고 물었다. 이지운이 워낙에 코를 박고 먹었던 탓일까. 코끝에 빨간 파스타 소스가 동그랗게 묻어 있었다.

그 모습에 서태천이 피식 웃었다. 이지운은 순간 자신의 눈을 의심했다. 저 로봇, 나를 보고 웃었어?

그때 짭쪼롬한 바다 기운을 머금은 바람이 불어왔다. 서태천의 체향과 어우러진 향기가 이지운의 코끝을 스쳤고, 서태천이 환하게 웃었다. 무해한 소년 같은 미소였다.

쿵.

심장이 발치로 떨어지면서 삐뽀삐뽀 경보음이 울렸다. 과하게 당황스러워서 호흡조차 하기 힘들었다. 저렇게 끝내주게 웃을 줄은 꿈에도 몰랐다. 자꾸만 아득해지는 정신을 추스르며 이지운은 필사적으로 자신을 다잡았다.

정신 차려라, 이지운. 저건 멋진 알파가 아니야. 이혼할 남편, 너와 이혼하고 싶어서 아주 성실하게 과업을 수행 중인 가짜 남편이라고! 휘말리면 넌 X된다.

이성적인 이지운이 나타나 자신을 말렸다. 그러자 감성 충만한 이지운이 소곤소곤, 이지운의 귀에 대고 속삭였다.

진짜 멋있다. 인간적으로 너무 끌리지 않냐? 인정할 건 인정해라.

“…어….”

이지운이 넋을 놓고 있자, 서태천이 이지운의 코끝으로 손을 뻗었다. 이지운이 흠칫하며 뒤로 물러났다.

“코끝에 소스가 묻어서.”

“네?”

입가도 아니고 코에 소스가 묻어요?

“얌전히 있어요. 움직이면 더 번집니다.”

서태천이 냅킨으로 이지운의 코끝을 닦아주었다.

“이제 말끔해졌어요.”

서태천이 아주 귀엽고 사랑스러운 것을 보듯이 입꼬리를 올리며 웃었다. 이지운은 코끝이 루돌프 사슴코처럼 뜨거워지는 기분이었다.

그게 결정타였다. 마침내 감성 충만한 이지운이 승리했다.

어떡하냐. 나 부정맥 아닌 것 같아.

이지운은 스스로의 인생이 잘못된 루트로 향하고 있음을 직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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