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화
“알파 1호님의 파트너! 하트 카드의 주인공은 오메가 3호님이셨어요. 여러분, 보세요. 선남선녀의 만남입니다.”
이럴 수가. 이지운은 고개를 돌려 서태천과 오메가 3호를 살폈다. 뛰어난 미모의 오메가 3호는 소리를 질렀고, 서태천은 예의 바르고 정중한 태도로 그녀에게 인사를 건네고 있었다.
그러다가 서태천과 이지운의 눈이 마주쳤다. 이지운은 훔쳐보다가 걸린 사람처럼 가슴이 찔려 황급하게 눈을 돌렸다.
“….”
그냥 프라이빗 데이트 한번 한 것뿐이다. 신경 쓰지 마. 막말로 내가 알파 1호를 좋아하나? 그것도 아니고, 알파 1호가 내 것인가? 그것도 아니다.
이건 프로그램의 룰에 따라 랜덤으로 배정된 결과일 뿐이야.
그렇게 스스로를 다잡으며 이지운은 마음의 먹구름을 걷어내려 했지만, 어디론가 이동하는 서태천과 오메가의 뒷모습에 시선이 따라붙는 건 어쩔 수 없었다.
“대체 어딜 가는 거야… 뭐 할 건데….”
이지운이 작게 중얼거렸다. 기현진은 이지운의 어깨에 손을 탁, 올리며 크게 말했다.
“오메가 1호님. 제가 오늘 제대로 모실게요. 바에서 술 한잔 어떠세요?”
“아. 호텔 바요?”
“네. 여기 바가 전국 제일로 꼽히는 거 아시죠.”
“그렇다고 들었어요. 분위기도 고급스럽고 칵테일도 맛있다고.”
“지금 바로 갑시다.”
기현진이 이지운의 손을 잡고 빠르게 걷기 시작했다.
지하 1층에 있는 바는 은은한 재즈 음악이 흘러나오는 한편 조도는 어두웠으며, 샹들리에가 화려하게 빛나 환상적인 느낌을 줬다.
“오메가 1호님, 내가 딱 찍어 놨었는데 드디어 데이트하네요.”
“정말요?”
“네. 여기 러브 빌리지에 들어올 때부터 야망을 가졌죠. 오메가 1호랑 커플이 되고 말 거라고요.”
“아….”
기 대리님이 평소 나한테 호감이 있었나?
이지운은 갑작스러운 그의 애정 공세가 다소 부담스러웠다. 그렇지만 남의 마음을 이래라저래라 할 수는 없는 노릇. 이지운은 기현진이 건네는 술을 받아들었다.
그때 기현진의 어깨너머로 한 커플이 입장하는 모습이 보였다.
오 마이 갓.
알파 1호와 오메가 3호였다. 심지어 그들은 바로 이지운을 발견하기까지 했다.
“이 넓은 리조트 부지에서 마주치다니, 신기하네요.”
오메가 3호가 다가와 들뜬 목소리로 말을 걸었다. 서태천도 곧 그녀의 뒤를 따라 걸어와 테이블 옆에 섰다. 기현진이 벌떡 일어나며 서태천에게 고개를 숙였다.
“안녕하십니까. 알파 1호님.”
“데이트는 재미있어요?”
“말해 뭐 합니까. 최고입니다!”
기현진이 껄껄 웃었다. 이지운은 기분이 썩 좋지 않았다. 서태천이 낯선 오메가와 나란히 서 있는 것도 보기 싫었지만, 거기까지는 그래. 그렇다고 치자. 그런데 왜 자신이 있는 테이블에 와서 말을 건단 말인가.
대체 무슨 꿍꿍이야?
이지운이 삐딱한 눈빛을 띤 그때, 서태천이 말을 걸었다.
“오메가 1호님, 질문이 있습니다.”
“네?!”
질문이라니 대체 뭘 물으려고? 이지운이 눈을 크게 떴다.
“저랑 했던 데이트보다 재미있으신가요?”
뭐야. 그거 물어보는 거야? 별꼴이다.
“네. 그렇죠!”
이지운은 또렷하게 대답했다. 그러자 알파 1호가 순간적으로 살짝 인상을 썼다. 이지운은 그 꼴이 우스워 견딜 수가 없었다.
자기가 먼저 도발해 놓고 표정 관리 못 하는 건 뭔데?
“그렇군요. 그럼 즐거운 시간 되시길.”
서태천이 파트너와 함께 바의 안쪽으로 가버렸다. 기현진은 싱글벙글 입이 찢어져라 웃었다.
“오메가 1호님. 저랑 하는 데이트가 더 좋으시다고요?”
“아, 네. 하하.”
이지운은 그렇게 말하면서 저 멀리 사라져 가는 서태천의 뒷모습을 쫓았다.
***
비서실 김민지 대리는 요즈음 입사 이래 최고의 재미를 느끼고 있었다. 자신의 로봇 같은 상사와 입사 동기의 옆자리 직원이 그렇고 그런 사이다.
회사를 다니다 보면 내 연애사보다 남의 연애사가 재밌고, 직급 높은 사람들의 스캔들은 유난히 흥미로운 법이다. 그녀는 제주도에 머무르는 지금도 민혜경 대리와 틈틈이 연락을 주고받고 있었는데, 둘의 대화창은 거의 불이 난 상태였다.
김민지
오늘 드디어 중간 선택하는 날이야.
과연 알파 1호가 오메가 1호를 선택할까?
민혜경
알파 1호랑 오메가 1호가 이뤄지면 대놓고 연애하겠단 소리 아닌지.
결과 나오면 꼭 알려 줘!
***
러브 빌리지에 저녁이 찾아왔다. 단체 식사를 마친 참가자들의 테이블에는 전운이 돌았다. 긴장감으로 공기마저 터져버릴 듯한 지금 이 순간, 알파 베타 오메가들은 엄청난 신경전을 벌이고 있었다.
오늘 중간 선택으로 마음에 드는 사람에게 고백을 하면, 그 상대가 받아 주느냐에 따라 밤늦은 시간까지 데이트를 할 수 있다. 하지만 거절당한다면 망신살이 뻗칠뿐더러 이 러브 빌리지에서 사실상 퇴출당한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용기를 내 볼 것인가, 보수적으로 한 발 뺄 것인가. 고도의 두뇌 싸움이 펼쳐지는 가운데 조연출만 신이 나서 참가자들 앞으로 나와 섰다.
“이렇게 무더운 여름. 선선한 야외에서 즐기는 코스 요리 즐거우셨나요?”
“네.”
“여기 달빛 정원에서 이제 중간 선택이 시작됩니다. 숨겨왔던 마음을 고백하실 분은 바로 나서주세요. 용기 있는 자가 사랑을 얻는다! 아시겠습니까?”
“네!”
“그럼 시작합시다.”
이지운은 초조하게 주변을 살폈다.
설마 이 유부남이 멀쩡한 처녀, 총각한테 고백하진 않겠지? 그런 걱정에 이지운은 자꾸만 손톱을 물어뜯었다.
하지만 서태천과는 자리가 상당히 떨어져 있기도 했고 다른 사람들이 그를 가리고 있어 얼굴을 제대로 볼 수 없었다.
어젯밤 바에서 기 싸움을 한 이후, 두 사람 사이에는 일절 교류가 없었다. 이지운은 뒤늦게 자신이 유치했나 후회를 하기도 했지만, 그렇다고 해서 사과를 하는 것도 웃겼다. 또, 오메가 3호와 행복해하고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연락할 엄두가 나지 않기도 했다.
이지운이 뭐 마려운 강아지처럼 끙끙대고 있는 와중에 참가자들의 눈치싸움이 끝났다. 제일 먼저 손을 든 것은 기현진이었다.
“오? 알파 2호님. 지금 바로 마음에 드는 분 지목하시려는 겁니까?”
“네. 그렇습니다.”
난데없이 튀어나온 기현진에 이지운의 눈이 커다래졌다.
“어제 오메가 1호님과 저녁 데이트를 하셨었죠. 혹시… 그렇다면 알파 2호님의 사랑의 작대기는…?!”
조연출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기현진이 우렁차게 외쳤다.
“오메가 1호님! 맘에 딱 듭니다!”
헉.
이지운은 너무 놀라 입을 벌린 채로 돌이 되었다. 뭐야. 진짜로 나 좋아하는 거야?
주변에서는 대박! 용기 있다! 멋있다 등등 우레와 같은 박수와 함께 함성이 쏟아졌다. 이지운더러 어서 반응해 달라는 무언의 압박이 가해졌다. 조연출 역시 이지운에게 마이크를 쥐여 주었다.
“오메가 1호님이 승낙하시면 오늘은 하루 종일 두 분이 데이트하게 됩니다.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오메가 1호님?”
기현진은 이지운의 얼굴을 뚫어져라 쳐다보며 눈을 반짝반짝 빛냈다. 이지운은 그의 눈빛이 너무 부담스러워 고개를 살짝 돌렸다.
“저…는.”
본부장과 아무 말 없이 산책하던 파란 바닷가, 달콤한 음료수, 짜릿한 알파인 코스터. 이런 것만 기억에 남고 알파 2호님 하고는 뭘 했는지도 잘 기억나지 않아요.
이렇게 생각하고 있긴 했지만, 이지운은 자신의 마음을 솔직하게 털어놓기 곤란했다. 역으로 생각했을 때 알파 1호는 이지운과의 데이트가 지루했다고 느낄 수 있지 않은가. 오히려 오메가 3호와의 데이트가 훨씬 즐거웠을지도 모르는 법이고.
나 어떡해야 해.
이지운이 자꾸 망설이던 때였다. 기현진이 저벅저벅 이지운의 앞으로 걸어 나오더니 난데없이 한쪽 무릎을 꿇었다.
“아, 알파 2호님…! 왜 이러세요.”
“제 마음을 확실하게 보여드리기 위해 구애의 노래를 부르겠습니다.”
“네?”
수십 명에게 둘러싸인 이 상황에서 사랑의 세레나데를 들으라고? 이지운은 강한 충격에 휩싸였다.
“저기, 알파 2호님. 잠시만요.”
“내 사라아아아앙! 죽어도 잊지 못하아아아알! 네 이름을 외쳐보오오오오오오리이!”
기현진이 약 30년 전쯤 유행했던 록발라드를 처절하게 불렀다.
고백하는 건 하는 거고 왜 노래를…! 그것도 록발라드를…!
이지운은 사색이 되어 머리를 감싸 쥐었다. 이 고백을 거절하면 남한테 괴상한 노래나 부르게 하고 걷어찬, 못된 오메가가 될 것이었다.
하지만 듣기 싫어…! 대리님 부담돼요!
이지운이 눈을 질끈 감아버리려는 찰나였다. 갑자기 서태천이 벌떡 일어났다.
“제가 한마디 해도 될까요.”
“오, 알파 1호님!”
카메라들이 냉정하게 알파 2호를 외면하고 알파 1호로 향했다. 참가자들도 놀람, 감탄, 흥미 가득한 표정으로 서태천을 쳐다보았다.
모두가 서태천의 다음 말을 기다리는 순간이었다.
“저도 오메가 1호님에게 관심 있습니다.”
으아아악!
이지운은 비명을 지르고 싶었으나 온몸이 굳어 목소리도 나오지 않았다. 그저 눈을 부릅뜨고 숨을 몰아쉴 뿐이었다.
제작진들은 흥분하여 박수갈채를 칠 기세였다. PD는 대본을 말아쥐고 허공에 팔을 휘두르며 바로 이거야! 됐어! 혼잣말을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