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성공적인 이혼을 위한 신혼생활-13화 (13/100)

13화

이지운은 침대 옆에 쪼그려 앉아 서태천의 잠든 모습을 가만히 보다가 읏차, 하고 몸을 일으켰다.

잘생기긴 더럽게 잘생겼어. 어젯밤 인기투표를 한 건 나의 객관적인 심미안이 시킨 일이올시다. 사심 때문이 아니란 겁니다. 네.

누가 묻지도 않았는데 합리화를 하며, 이지운은 살그머니 객실을 가로질러 문을 열고 밖으로 나왔다.

객실로 돌아와 한숨 돌리는 동안 이지운의 핸드폰에 제작진의 공지 문자가 도착했다.

러브 빌리지 입소자 여러분들, 행복한 밤 보내셨나요?

단체 조식과 함께 오늘의 촬영 스케줄 안내가 있으니 9시까지 1층 조식당으로 와주시기 바랍니다.

“휴… 행복한 밤 보냈다고 해도 될까요.”

술기운에 헤롱대던 바보 같은 자신, 서태천이 사진을 찍기 위해 자신을 엎었다 메쳤다 했던 일, 그리고 새벽녘 훔쳐본 서태천의 얼굴까지.

이지운에게 있어 간밤은 싱숭생숭함과 창피함으로 얼룩진 밤이었다.

“그 인간 얼굴 보기 부끄러운데….”

술에 취한 모습을 보였다는 사실 자체도 자체지만, 흐느적거리면서 침대를 뒹군 게 더 창피했다. 그래도 이곳 레스토랑은 초호화 퀄리티를 자랑하는 만큼, 조식을 놓칠 수도 없었고 제작진과의 미팅에 불참할 수도 없었다.

“하, 별수 없다. 내려가야지.”

이지운은 씻고 준비를 마친 뒤 조식당으로 내려왔다. 널찍한 레스토랑 안, 참가자들은 삼삼오오 테이블마다 나뉘어 앉아 있었다. 이지운도 적당한 빈자리에 자리를 잡았다.

“엇, 안녕하십니까.”

“본부장님. 좋은 아침입니다.”

사람들이 우르르 일어나 입구에 등장한 서태천에게 인사했다. 그는 언제나 그랬듯이 고급스러운 정장으로 세팅한 모습이었고, 찔러도 바늘 하나 들어가지 않을 만큼 철두철미해 보였다.

“다 같이 프로젝트에 참여하는 출연자니까 너무 격식 차리지 않아도 됩니다. 그냥 알파 1호가 등장했다고 생각해 주시면 좋을 것 같은데요.”

분위기를 풀어 주는 말 한마디에 오메가와 여자 베타 참가자들이 감탄사를 내뱉었다.

“저 말 진짜겠지? 여기 러브 빌리지에서만큼은 저 남자도 그냥 알파 1호인 거야. 나도 들이대 볼 수 있다고!”

“당연하지. 난 오늘 제대로 들이대려고 각오하고 나왔어.”

바로 옆자리에 앉은 참가자의 자신만만한 말투에 이지운은 미간을 찌푸렸다.

들이대긴 뭘 들이대. 저 사람 유부남이에요. 아저씨라고요!

이지운은 속으로 구시렁거렸다.

뷔페식 조식을 먹는 동안 제작진이 공지 사항을 알렸다.

“어제 첫인상 인기투표가 있었죠. 그 결과를 조금 있다가 발표할 건데요, 1등을 차지한 분에게는 프라이빗 데이트 신청권이 부여됩니다.”

밥을 먹던 참가자들이 설명을 맡은 스태프에게 집중했다.

“말 그대로 원하는 상대방에게 1 대 1 데이트를 신청할 수 있는 권리를 갖게 되는 거고요, 그분과 파트너가 나가 있는 동안 나머지 분들은 별도로 레크레이션 시간을 갖겠습니다.”

인기투표 1위라는 말에 참가자들이 작게 속삭였다. 어차피 보나마나 본부장님 아니야? 그러게. 누가 본부장님 제치고 1위 했겠어. 벌써부터 본부장님이 데이트 신청할 사람이 부럽다.

이지운은 두근두근한 마음으로 결과 발표를 기다렸다. 설마 서태천일까 싶어서였다.

“발표하겠습니다. 인기투표 1위는 바로 알파 1호님이십니다!”

사방에서 박수와 환호가 쏟아졌다. 조연출이 서태천에게 다가가 마이크를 건넸다.

“알파 1호님, 소감 부탁드립니다.”

“소감이랄 건 없고, 감사합니다.”

“그럼 데이트 신청은 누구한테 하실 건가요?”

“음….”

서태천이 뜸을 들였다. 좌중이 가볍게 술렁였다. 남자 베타나 알파들은 마음에 둔 상대를 빼앗길까 봐 안달이 났고, 여자 베타나 오메가들은 혹시 나일까? 하는 기대에 차서 어쩔 줄을 몰라 했다.

이지운은 침을 꿀꺽 삼키며 주먹을 말아쥐었다.

거기, 아저씨. 누구 뽑을 거예요? 빨리 좀 말해요.

목이 타고 긴장이 돼, 이지운은 벌컥벌컥 냉수를 들이켰다. 그때 서태천이 이지운을 똑바로 바라보며 말했다.

“전 오메가 1호님에게 데이트권을 사용하겠습니다.”

“켁.”

찬물에 제대로 사레가 들린 이지운은 물을 뿜었다. 주변에서는 시끌벅적 난리가 났다. 오메가 1호의 얼굴을 보려고 자리에서 일어나는 사람도 있었다.

“이야. 오메가 1호님이 뽑히셨네요. 자, 이제 대답할 차례인데요. 오메가 1호님은 알파 1호님의 데이트 신청을 수락하시겠습니까?”

“아… 그게.”

“거절하시는 것도 물론 자유입니다. 대신 그렇게 되면 알파 1호님은 다른 파트너를 골라 주셔야 하고요.”

미적거리던 이지운이 번쩍 정신을 차렸다. 다른 파트너를 골라? 그런 게 어딨어. 어디 유부남이 감히…!

이지운은 울컥하는 마음에 손을 들고 외쳤다.

“네! 수락하겠습니다!”

“와, 대답 한번 시원하시네요. 그러면 두 분은 지금부터 별도 촬영 들어가실 거고요. 나머지 분들은 식사하시면서 계속 진행할게요.”

조연출은 박수를 치며 무척이나 만족한 듯 말했다. 이지운이 어리바리하는 사이 그는 핀 마이크를 차고 머리 손질을 받은 다음 조식당 밖으로 끌려 나왔다.

아니, 잠깐만. 결혼한 지 한 달도 넘었지만 한번도 데이트니 뭐니 해 볼 생각조차 없었다. 애시당초 그런 사이가 아니었기 때문에.

그런데 엉뚱하게 제주도로 날아와 짝짓기 프로그램에 참가 중이고, 서태천이 자신을 선택했다.

도대체 무슨 마음에서지? 꿍꿍이가 있는 건 아닐까? 아니면 뭐, 나한테 호감이라도 있어?!

여러 가지 가설이 이지운의 머릿속을 스치고 지나갔다.

“일단 진정하자. 진정하고 데이트나 해.”

이지운은 뒤죽박죽이 된 머릿속을 정리하며 조심스럽게 리조트 밖으로 나갔다.

***

촬영은 애월 바닷가에서 진행되었다. 늦여름의 여유를 즐기는 피서객 약간을 제외하면 평일의 바닷가는 한산했다. 오늘따라 날씨가 좋아 바다는 에메랄드 속살을 그대로 비춰내고 있었으며, 윤슬이 반짝반짝거리며 눈을 부시게 했다. 한 마디로 데이트하기 최적의 분위기였다.

“두 분, 저희가 멀리서 찍을 거니까 너무 부담 갖지 말고 자연스럽게 대화하세요. 움직이는 것도 마음대로 하셔도 돼요.”

제작진은 멀찍이 떨어져 있겠노라고 이야기한 다음 이지운과 서태천에게서 멀어져갔다. 자기들끼리 촬영 시작과 동시에 커플 탄생이라는 둥, 알파 오메가 그림이 환상적으로 나와서 만족스럽다는 둥 소곤거리기도 했다.

이지운이 뻘쭘함에 목석처럼 서 있자, 서태천이 먼저 말을 걸었다.

“좀 걷죠.”

“아, 네.”

이지운은 서태천과 나란히 서서 해안가를 걸었다. 더위가 한풀 꺾였다고는 해도 제주 햇빛은 햇빛이라 기온이 제법 높았다.

“목마릅니까?”

“어, 네. 조금요.”

“저기 카페가 있는데 커피라도 한잔하죠.”

서태천이 가리키는 곳에 근사한 목조주택 풍의 카페가 있었다. 테라스 방향으로 바다를 내다볼 수 있게 설계된 인테리어가 돋보였다.

“오, 좋아요.”

그들은 조금 걸어 카페에 도착했다.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가자 시원한 에어컨 바람이 이지운의 땀을 식혀 주었다.

“시원하다.”

“바깥에만 있으면 힘드니까요.”

“감사합니다. 저는 음… 한라봉 에이드 마실게요.”

“에이드는 가장 큰 사이즈로 주시고요, 전 아이스 아메리카노로 부탁드립니다.”

주문을 마친 두 사람은 바다가 내다보이는 테이블에 마주 앉았다. 곧 직원이 알록달록 달콤해 보이는 에이드와 시커먼 커피를 내왔다.

한라봉 에이드를 한입 맛본 이지운은 자기도 모르게 감탄사를 내뱉었다.

“너무 맛있어.”

“그렇게 맛있습니까?”

“눈앞에 한라봉 농장이 펼쳐지는 맛이에요. 진짜 최고다.”

“잘 됐군요.”

그렇게 말하며 서태천은 블랙 컬러 그 자체인 아메리카노를 마시려 했다. 이지운은 살짝 망설이다가 입을 뗐다.

“한입 드셔 보실래요?”

내가 먹던 거라서 꺼려하려나? 했는데 아니었다. 서태천은 고개를 끄덕하더니 그대로 잔을 들고 가 뚜껑을 벗기고 에이드를 마셨다.

“음. 달군요.”

취향은 아니었는지 서태천의 미간에 주름이 잡혔다.

인상 쓰니까 더 잘생겼네… 무슨 일이야.

이지운이 속으로 감탄을 거듭하고 있던 때였다. 갑자기 이지운의 전화벨이 울렸다. 그런데 일반 통화가 아니라 영상 통화 요청이었다. 발신자는 무려 <이혼 숙려 감독관>이었다.

“헉! 기습 전화다.”

이혼 숙려 센터의 전매특허. 배우자와 함께 있는지, 혹여나 다른 사람과 달콤한 시간을 보내고 있는 건 아닌지 확인차 걸려 오는 영상 통화 체크였다.

지금까지는 거의 집에서 받았는데 이렇게 바깥에서 받은 건 처음이었다.

“무슨 일입니까.”

“마이크 꺼요!”

“마이크?”

서태천이 핀 마이크를 껐다. 이지운도 핀마이크 전원을 급하게 내렸다.

“감독관님이 영상 통화 걸었어요!”


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