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화
“원래 참가할 의도는 아니었지만 일이 이렇게 됐군요. 촬영팀 여러분, 그리고 우리 직원분들 앞으로 잘 부탁드리겠습니다.”
고개 숙여 인사하는 서태천에게 박수 세례가 쏟아졌다.
“본부장님 최고!”
“어떡해! 너무 신나!”
열광하는 오메가와 베타 직원들 사이에 멍하게 있던 이지운은 문득 정신을 차렸다. 그리고 사람들을 제치고 앞으로 나아가 저만치 멀어지고 있는 서태천을 쫓아갔다.
“본부장님!”
이지운이 서태천을 불러 세우자, 비서가 알아서 한발 빠졌다. 단둘이 남게 되자 이지운은 서태천에게 가까이 다가가 목소리를 낮추고 물었다.
“이게 어떻게 된 일이에요.”
“본 그대로입니다. 응원차 들렀는데 짝이 안 맞는다고 하니까 나라도 투입되어야죠. 홍보를 위한 중요 프로젝트인데 망칠 수 없지 않습니까.”
서태천은 이건 어디까지나 업무의 연장선상이라는 식으로 대답했다. 사실 그게 틀린 말은 아니었으나, 이지운은 묘하게 가슴이 싸해졌다. 실망? 섭섭함? 그 중간 어디쯤의 감정이 치밀어 올랐다.
빈말로라도 나 때문에 왔다고 해 줄 수 있는 거 아닌가?
순간 그런 생각이 들었으나, 곧이어 그건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
본부장이 나 때문에 제주도까지 내려오면 뭐. 어쩔 건데? 뿌듯해할 거야?
“더 할 말 없으면 이만 가 보겠습니다.”
혼란에 휩싸여 있는 이지운에게 서태천이 말했다. 이지운은 더 이상 그를 붙들고 있을 명분이 없었으므로 그대로 물러날 수밖에 없었다.
저만치 멀어져 가는 서태천의 뒷모습을 보며 이지운은 미간을 찌푸렸다.
이게 뭐야. 비오는 날 지나가는 차가 튀긴 구정물 맞은 것처럼 기분이 찝찝하네.
***
조연출이 프로그램 촬영 시작을 선언했다. 첫 촬영은 리조트에 딸린 야외 레스토랑에서 자기소개를 하는 코너였다. 셰프들이 한껏 솜씨를 뽐내 만든 화려한 핑거 푸드들이 식탁 위를 가득 채우고 있었다.
그뿐만 아니라 은은하게 흘러나오는 재즈, 무드 있는 조명과 여름밤의 선선한 공기가 어우러져 분위기는 낭만 그 자체였다. 이렇게 멍석을 깔아 주는데도 연애 본능이 발동하지 않는다면 문제가 있을 정도로 제작진의 연출은 집요하고 치밀했다.
“스무 분 다 모이셨네요. 그러면 알파, 베타, 오메가로 나눈 명찰을 나누어 드릴게요.”
이지운은 <오메가 1호> 명찰을 달고 직사각형 테이블의 가장 안쪽에 앉았다. 맞은편에는 <알파 1호> 서태천이 앉았다.
하필이면 마주 보네.
이지운은 아까 복도에서의 다툼 아닌 다툼으로 자기 혼자 꽁해 있는 상황이었다. 하지만 서태천은 아무런 신경도 안 쓰이는지, 평소와 똑같은 표정 그리고 정중하면서도 여유로운 말투를 쓰고 있었다.
세미 정장이나 슬랙스를 입고 온 알파들 사이에서 정석 슈트 차림으로 참석한 서태천은 유난히도 튀었다. 그게 오메가와 여자 베타들의 시선을 제대로 사로잡은 모양인지, 10명 중 10명이 다 서태천을 쳐다보고 있었다. 이지운은 멋있어서 쳐다보는 게 아니라 아니꼬워서 위아래로 흘기는 거였지만, 어쨌든.
서태천은 평소답지 않게 소매를 걷고 넥타이는 느슨하게 풀었는데, 덕분에 굵직하게 발달한 팔뚝과 탄탄한 목선이 강조되는 모습이었다.
이지운과 나란히 앉은 같은 줄의 오메가들 그리고 베타 여자들 사이에서 탄식이 흘러나왔다.
“본부장님 좀 봐. 진짜 멋있다.”
“나… 본부장님 이렇게 가까이서 본 거 처음인데 현실 같지가 않아. 너무 떨려.”
그 소리가 들렸는지 서태천과 같은 줄에 앉은 알파들과 남자 베타들은 불안한 듯 눈을 굴리고 자꾸 안절부절못했다.
“그럼 먼저 자기소개 시간을 가지겠습니다. 음식 자유롭게 드시면서 한 분씩 자기소개할게요. 먼저 알파 1호님부터 부탁드립니다.”
서태천이 일어나자 작게 탄식이 터져 나왔다. 압도적인 키와 다부진 체격 좀 보라며 이지운 옆에 앉은 오메가 2호가 호들갑을 떨었다. 이지운은 허우대는 좋네, 하면서 눈앞에 놓인 치킨텐더를 먹어치웠다.
“알파 1호입니다.”
묵직한 저음에 오메가들이 대놓고 환호했다.
“취미는 그림 그리기, 이상형은 밥 잘 먹는 사람입니다. 이상입니다.”
굉장히 간단한 소개였지만 그게 또 깔끔하고 멋있다며 오메가 3호가 리액션을 했다. 과감한 개인 멘트에는 어필의 뜻이 듬뿍 담겨 있었다.
인기 많네. 좋으시겠어, 아주.
이지운이 피자로 손을 뻗는데 제작진 이지운을 가리켰다.
“다음은 오메가 1호님, 자기소개 부탁드립니다.”
두 번째 타자로 지목당한 이지운은 아쉽게 피자를 내려놓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알파 1호 BBG와 더불어 알파 2호인 기현진이 그를 쳐다봤다.
물론 그 외의 알파나 남자 베타들도 이지운의 하늘거리는 머리카락, 튀김옷 부스러기가 묻었는데도 청초한 느낌을 풍기는 입술, 깨끗하다 못해 투명한 피부에서 눈을 떼지 못했다.
“어… 오메가 1호입니다. 제 취미도 그림이고요.”
“알파 1호님하고 같으시네요?”
조연출이 묻자 이지운은 머쓱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요새 졸라맨을 많이 그리는 게 사실이었으니 최근 새로 생긴 취미가 그림이라고 해도 될 것 같아서였다. 예전에는 드라마 몰아보기, 과몰입해 대사 따라하기가 취미였으나 요새는 확실히 그림을 자주 끄적거린다.
그리고 이상형을 말해야 할 타이밍. 갑자기 그의 눈앞으로 시커먼 가운 자락이 스쳐 지나갔다.
이놈이 또! 또 나타났구나! 이지운은 식겁하며 빠르게 대답했다.
“제 이상형은 검은 가운이 잘, 안 어울리는 사람입니다!”
그 말에 서태천이 이지운을 빤히 올려다봤다. 이지운은 시선을 외면하며 허공을 봤다.
“이상형이 참 독특하시다. 컬러풀한 옷이 잘 어울리는 사람이 좋다. 뭐 그런 의미인가요?”
기현진이 물었다. 이지운은 대강 끄덕거리며 자리에 앉았다. 눈만 굴려 서태천을 훔쳐보니 그는 팔짱을 낀 채 생각에 잠긴 얼굴이었다.
이후로 20번까지 모든 참가자의 자기소개가 끝났다. 평범한 사람, 다소 튀어 보이는 사람, 재미있는 사람 등 다양한 알파와 베타 출연자들이 있었지만 이지운은 눈앞에 놓인 피자를 먹느라 그들의 얼굴을 자세히 보지 못했다.
“여러분 고생 많으셨습니다. 그러면 이제부터 개별 촬영 들어갈게요. 다들 컨퍼런스 룸에 모이신 다음에 저희가 준비한 작은 방에 한 분씩 들어가실 거거든요.”
“컨퍼런스 룸에서는 어떤 걸 진행하나요?”
“솔직한 자신의 속마음, 첫인상 좋았던 상대를 이야기해 주시면 됩니다.”
“와! 벌써 본격적으로? 재밌겠다.”
곧바로 이성에 대한 호감을 드러내라는 요구에, 출연자들은 부담을 느끼면서도 내심 즐거워하는 눈치였다. 누군가 나를 뽑아 주지 않을까. 그런 기대 심리가 작용한 것이다.
제작진과 20명은 다 같이 컨퍼런스 룸으로 이동했다. 촬영 순서는 알파 1호, 오메가 1호, 알파 2호 등 방금 단체 테이블에 앉았던 대로였다.
“그럼 알파 1호님부터 첫인상 인터뷰해 볼게요. 자, 들어오십시오.”
서태천이 조그마한 미팅룸으로 이동했다. 이지운이 목을 빼고 그의 뒷모습을 기웃거리는데, 기현진이 어깨를 두드렸다.
“지운아.”
“네? 대리님.”
“아… 별건 아니고. 너 첫인상 맘에 드는 사람 있다고 이야기할 거야?”
기현진이 씩 웃었다.
“글쎄요….”
이지운은 목을 긁으며 말을 얼버무렸다. 사실 이지운의 모든 신경은 조그마한 미팅룸 속, 서태천이 무슨 인터뷰를 하고 있을지에 가 있었다.
궁금해. 마음에 드는 오메가나 베타가 있다고 말했을까? 있다면 그건 누굴까. 회사 내 공식 여신인 오메가 3호님? 아니면 베타 중에 가장 미모가 뛰어난 베타 6호님?
이지운이 입술을 물어뜯으며 생각에 골몰해 있는데, 제작진이 이지운을 불렀다.
“오메가 1호님! 미팅룸으로 들어오실게요.”
“아, 네! 지금 갑니다.”
이지운은 후다닥 뛰어 미팅룸으로 들어갔다. 안쪽에는 작은 테이블과 함께 소파가 하나 놓여 있었고, 조명과 카메라가 맞은편에 세팅되어 있었다.
자신을 향한 밝은 조명과 수많은 제작진이 부담스러운지라, 이지운은 살짝 긴장이 됐다. 그걸 눈치챘는지 조연출이 부드럽게 말을 걸었다.
“편안하게 대답하셔도 됩니다. 하하. 오늘 즐거우셨어요?”
“아, 네. 재미있었어요.”
“혹시… 마음에 든 분은 계셨나요?”
이지운은 머리를 굴렸다. 누가 괜찮았냐고 물으면… 음. 없다.
다른 출연자들은 제대로 보질 않아서 모르겠고, 알파 1호에 대해서는 뭐라고 해야 할지 모르겠다.
“없는 것 같은데… 있다고 하기에는 너무나… 음….”
이지운이 밍숭맹숭한 대답을 내놓자, 작가가 작은 종이를 내놓았다.
“실은 저희가 첫인상 인터뷰하면서 인기투표를 하고 있어요. 이분이 가장 괜찮았다, 하는 분이 계신다면 한 표 찍어 주세요. 호감이나 꼭 사귀고 싶다 이런 거 말고 단순 인기투표니까 깊게 생각 안 하셔도 괜찮아요.”
이지운은 하얀 투표용지를 받아들고 잠깐 생각에 잠겼다.
이거는 호감이나 사귀고 싶다는 생각과 무관하댔지? 그냥 재미 삼아 하는 거잖아. 재미.
그럼 그냥 단순하게 생각해도 되지 않을까? 저 중에 제일 잘생기고 잘난 사람을 말하면 그만이지.
이지운이 곧 침묵을 깼다.
“저는 알파 1호님… 하겠습니다.”
“아, 그러시군요. 알겠습니다.”
이지운이 작은 쪽지에 아주 조그맣게 알파 1호라고 썼다. 작가가 이지운의 투표용지를 회수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