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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공적인 이혼을 위한 신혼생활-10화 (10/100)

10화

다음 날 아침, 눈을 떠보니 서태천은 보이지 않았다.

“어… 어디 갔지.”

눈을 비비며 무의식적으로 그를 찾다가, 이지운은 퍼뜩 정신을 차렸다.

“어디 갔는지가 뭐가 중요해. 얼른 제주도 갈 짐이나 싸자.”

어젯밤 결국 짐을 싸지 않고 잠들었기 때문에 지금부터 부지런히 캐리어를 꾸려야 했다. 세면도구와 갈아입을 옷, 과자, 이번에야말로 넉넉하게 챙긴 페로몬 억제제까지. 이지운은 빵빵한 캐리어를 가지고 공항까지 택시를 탔다.

“지운아! 여기야.”

“주임님! 어서 오세요.”

공항 내부 미팅 장소에 이미 참가 직원들이 삼삼오오 모여 있었다. 진짜 재미있겠다, 설렌다, 어젯밤 한숨도 못 잤다며 직원들은 들뜬 대화를 나누었다.

“이 주임님도 설레서 못 자셨죠?”

“어… 잘 잤는데요.”

“뭐야. 기대도 안 돼요?”

“아, 아니요. 기대돼요. 되죠.”

적당히 이야기를 나누고 있자니 홍보팀 직원들이 도착했다. 방송용 카메라와 음향기사 등 콘텐츠 제작업체 직원들도 함께였다.

“반갑습니다. 지금부터 바로! 녹화에 들어갑니다.”

“네? 어떻게요?”

홍보팀 직원의 말에 기현진이 물었다.

“비행기 티켓을 랜덤으로 지정해 두었거든요. 내 첫 파트너가 누구일지 두근거리는 마음으로 탑승해 보세요.”

“와! 재밌겠다.”

“진짜.”

탑승교를 지나 비행기 좌석에 앉으니 금방 파트너가 나타났다. 기현진 대리였다.

“지운이가 내 짝꿍이네.”

“어, 대리님이 제 옆자리셨군요.”

“너무 잘 됐는데? 나 행운아다.”

“그럴 것까지는… 하하.”

이지운은 적당히 웃어준 다음 좌석에 편안하게 몸을 묻었다. 그리고 속으로 망고 빙수 생각을 했다.

내가 태어나 먹어본 것 중에 손에 꼽힐 만큼 맛있었어. 아직도 혀끝에 그 맛이 남아 있는 것 같다.

그런데 BBG는 왜 빙수를 사 온 걸까? 나 먹으라고 사 온 거란 말이지. 그 이유가 뭔지 궁금하네.

“지운아?”

“아, 네?”

“왜 이렇게 멍때리고 있어.”

“죄송해요. 잠깐 업무 생각 좀 하느라.”

“여기까지 와서 웬 업무 생각이야. 잊어버리고 즐겨.”

“그래야겠네요.”

이지운이 고개를 끄덕이자 기현진이 물었다.

“아까 프로그램 설명 들으니까 오늘 촬영분 정말 재미있겠더라.”

“그래요?”

“특히 캠프파이어 때 고백하는 거. 즉흥 고백이라 설레면서도 재밌겠던데….”

그런 코너도 있었나. 하도 설명을 대충 들어서 잘 몰랐다.

이지운이 그렇냐고 하자, 기현진이 살며시 목소리를 낮춰 물었다.

“그런데 지운아.”

“네.”

“넌… 혹시 마음에 담아 둔 사람 없어?”

“네? 마음에 담아 두다뇨.”

“아직 본격적으로 프로그램이 시작된 건 아니지만, 기존에 이 사람하고 매칭이 되고 싶었다거나… 그런 사람 없냐고.”

“전 딱히….”

그런 사람이 없다고 말하려던 순간이었다. 눈앞으로 시커먼 가운 자락이 슥 지나갔다.

뭐야, 왜 이딴 게 떠올라.

이지운은 황급하게 눈앞의 영상을 날려 버렸다.

“그런 사람 없어요.”

“흠. 그래? 그럼 앞으로 생길 수 있다는 거네.”

“아, 네… 뭐.”

이지운을 바라보는 기현진의 눈빛에는 기대가 가득했다.

***

“와. 끝내준다!”

촬영장인 제주 리조트에 들어선 직원들은 감탄사를 연발했다. 제주 지점은 그룹 내 리조트에서도 프리미엄 라인이라 으리으리함이 남달랐고, 정원에는 초대형 분수까지 있었다.

이 리조트는 서태천의 주도하에 건설된 것이었기 때문에, 이지운은 새삼스럽게도 본부장이 대단한 인물임을 깨달았다. 이 그리스 로마 신화 신전스러운 건물을, 하룻밤 숙박료가 100만 원 넘는 호화 리조트를 파격적으로 추진하는 대범함이라….

참 별나고 잘난 인물이긴 하다. 그런 남자가 내 (임시) 법적 남편이라니, 세상 오래 살고 볼 일이야.

“안녕하세요! 현지 진행팀입니다!”

로비로 한 무리의 사람들이 걸어 나왔다. 그들은 현장에서 미리 장소를 섭외하고 연출을 준비하고 있던 팀이었다. 싹싹해 보이는 인상의 PD가 직원들에게 인사를 했다.

“카메라가 여러분을 늘 따라다니기는 합니다만, 투명인간 취급해 주세요. 의식하지 마시란 겁니다.”

“네!”

“개인 룸에서는 편안하게 쉬시고요. 촬영 스케줄표에 나와 있는 촬영 시간에는 칼같이 협조해 주실게요! 자, 그러면 오늘 일정표입니다.”

조연출이 직원들에게 종이를 한 장씩 나누어 주었다. 오늘 오후는 여유롭게 보내고, 저녁때 첫 촬영이 있다는 공지였다.

“와. 무슨 옷 입을까?”

“저녁에 뭐 찍지? 긴장되네. 게임하려나?”

“자기소개부터 하지 않을까요.”

출연진들의 설렘 가득한 대화와 상반되게, 이지운은 멍을 때리고 있었다. 그때 이지운의 옆쪽에서 소란이 일어났다.

“꺅!”

“뭐야. 무슨 일인데?”

한 남자 출연자가 배를 움켜쥐며 쓰러졌다. 사람들과 제작진이 긴급하게 모여들며 전화로 119를 찾아댔다. 얼마 안 가 구급 차량이 도착했고, 남자는 빠르게 호텔을 떠났다.

“무슨 일이에요.”

이지운이 당황해 묻자, 기현진이 난색을 표했다.

“저 주임님 아까부터 배가 아프다고 하더니만… 크게 잘못된 모양인데.”

수습되지 않는 소란에 조연출이 나섰다.

“여러분. 지금 당장은 진행을 할 수 없을 것 같고요. 저녁 촬영 일정도 약간 조정이 필요할 것 같습니다. 일단은 개인 룸으로 들어가서 쉬고 계시면 저희가 연락드리겠습니다.”

“네.”

하는 수 없이 사람들은 프런트에서 키를 받아 뿔뿔이 흩어졌다. 기현진과 이지운은 층이 달랐기에 엘리베이터를 같이 타고 올라가다가 중간에서 헤어졌다.

이지운은 7층에 내려 드넓은 복도를 두리번거려 자기 방을 찾았다. 캐리어 끄는 소리마저 고급스러운 카펫에 흡수되어 무척이나 조용했다. 또한 방문을 여니 환상적인 애월 바다의 풍경이 이지운을 맞이해 주었다.

“진짜 좋다.”

바다 보는 게 얼마 만이냐. 대학생 때 부산여행 간 것 말고 처음인 것 같은데.

침대에 풀썩 드러눕자 몸이 날아갈 것처럼 편안해졌다. 비행에, 스트레스에 온갖 피곤이 쌓인 몸에 졸음이 몰려들었다.

이지운은 그대로 쿨쿨 잠이 들었다. 코도 안 골고 미동도 없이 죽은 듯 잠을 자다가 지잉, 지잉 진동이 울려 퍼뜩 잠에서 깨어났다.

혹시 본부장인가?

그는 황급하게 핸드폰을 확인해 보았지만 전화를 건 사람은 기현진이었다.

“아… 네. 대리님.”

-단체 메신저 못 봤어? 지금 비즈니스 라운지로 모이래.

“벌써 시간이… 네. 알겠어요.”

창밖을 보니 노을이 지다 못해 어둠이 찾아와 바다를 짙게 물들이고 있었다.

“얼마나 잔 거야… 아니, 그리고 전화는 왜 이렇게 후다닥 일어나서 받은 건데.”

본부장이 나한테 전화할 이유가 뭐 있다고.

이지운은 찬물에 세수하며 정신을 차렸다.

이지운, 너는 여기 다른 알파를 만나러 온 거야. 마음 새롭게 먹어.

이지운은 거울 속의 자신에게 거듭 당부했다.

***

비즈니스 라운지에 가니 전 출연자와 제작진이 다 모여 있었다.

“지운아! 여기.”

이지운은 기현진이 맡아 놓은 자리에 앉았다. 곧 조연출이 입을 열었다.

“아까 쓰러진 분은 급성 맹장염이었고요. 병원에 입원했는데 아무래도 수술이 따르다 보니 이번 프로그램 촬영은 어렵게 되었습니다.”

그가 잠시 말을 아끼다가 다시금 입을 열었다.

“그런데… 이대로라면 출연자가 홀수라서 문제가 될까 우려스럽습니다. 모든 데이트 동선을 스무 명 짝수에 맞게 배치했고, 게임도 짝수끼리 할 수 있는 걸로만 준비했거든요. 그래서 저희가 좀 회의를 거쳐서….”

조연출이 한창 설명을 하던 중이었다. 비즈니스 라운지로 걸어오는 선명한 발소리가 들렸다. 이지운의 눈이 커졌다.

아니, 저 인간이 왜 여기 나타났어?

비서를 대동하고 슈트를 빼입은 서태천이 다가오고 있었다.

“어? 본부장님!”

“안녕하십니까.”

“네.”

서태천은 직원들과 제작진의 인사를 끄떡하고 받아 주더니, 잠시 조연출을 불러냈다. 거리가 멀어 뭐라고 하는지는 들리지 않았지만 굉장히 심도 깊은 대화를 나누는 듯이 보였다.

뭐지? 대체 뭔 이야기 하는 거야.

이지운이 귀를 쫑긋 세우고 있는데 대화가 끝났다. 돌아온 조연출은 활짝 웃고 있었다.

“여러분! 놀랍게도 저희 짝수가 되었습니다.”

“네? 어떻게요.”

“서태천 본부장님께서도 프로그램에 참가하시기로 하셨습니다!”

순간 좌중에서 환호와 열광, 감탄사가 터져 나왔다. 뜨거운 박수가 뒤를 이었다. 오메가와 베타들은 어쩔 줄 몰라 하며 얼굴을 붉혔고, 일부 알파 출연자들은 장사 망했다는 듯 암담한 표정으로 바뀌어 나갔다.

개중 가장 황당하기로는 이지운을 빼놓을 수 없었다.

“허…얼.”

서태천은 아주 잠깐 이지운과 눈을 마주친 다음, 나지막하고 굵은 특유의 목소리로 말했다. 특유의 굵직한 목소리로 나지막하게 말했다.

“잘 부탁드립니다.”

그러자 우레 같은 박수가 터져 나왔다. 이지운은 머리가 뱅뱅 도는 기분이었다.

여러분, 유부남인 제가 연애 리얼리티에 나가는데요, 제 남편도 따라 나온대요.

<세상에 마상에나 이런 일이 벌어져?!> 제작진에게 제보하고 싶은 일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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