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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공적인 이혼을 위한 신혼생활-9화 (9/100)

9화

사무실로 복귀하기 전, 기현진의 커피나 같이 하자는 제안에 이지운은 옥상층 카페테리아로 향했다.

“아메리카노 마실 거지?”

“아니요. 캐러멜 마키아토 생크림 잔뜩으로 마실래요.”

“단 거 좋아했던가?”

“네. 지금은 특히나 더요.”

이지운은 빵빠레 아이스크림만큼 휘핑을 얹은 아이스 마키아토를 사 들고 기현진과 창가 테이블에 앉았다.

“아까 설명 들으니까 더 기대되더라. 룰이 재미있던데.”

“아… 그런가요?”

설명을 제대로 듣지 않았으니 이지운은 마땅히 받아칠 말이 없었다.

“지운이 너는 별로야? 아까부터 별 관심 없어 보이네.”

“아, 아니요. 저도 좋죠. 모처럼 자유를 만끽할 기회인데요.”

“자유라니?”

기현진이 고개를 갸웃하자 이지운은 아차 싶어 화제를 돌렸다.

“저 빨리 들어가 봐야 할 것 같아요. 저희 팀 바쁜 날이라서요.”

“그래, 그럼. 제주도에서 보자.”

기현진이 여운을 남기듯 답하며 이지운의 어깨에 손을 올렸다. 이지운은 대강 인사를 하고 마케팅 1팀이 있는 19층으로 내려왔다. 그런데 엘리베이터에서 내리자마자 맞닥뜨린 사람이 있었다.

바로 멀끔한 슈트 차림에 서류 가방을 들고, 비서를 대동한 서태천이었다.

순간적으로 움찔할 뻔했으나, 이지운은 곧 무표정하게 고개를 꾸벅 숙였다. 회사 내에서는 특별하게 아는 척을 말고 본부장과 평사원 사이를 연기하기로 약속이 되어 있었다.

서태천 역시 고개를 까딱하고 인사를 받아준 다음 비서와 함께 엘리베이터에 올랐다. 비서와 긴밀하게 무언가를 협의하는 듯, 그는 진지한 얼굴이었다.

이지운은 엘리베이터가 닫힐 때까지 그 모습을 쳐다보다가 자기 뺨을 한 대 찰싹. 아프지는 않게 때렸다.

“뭘 멍하니 봐.”

사무실에 들어와 제자리에 앉은 이지운은 영혼 없이 업무를 시작했다. 일을 하면서도 머릿속으로는 ‘러브 빌리지’ 생각뿐이었다.

내가 만약에 거기서 누군가랑 매칭되면 어떻게 되는 거지? 일단 사귀는 사이가 될 텐데….

잠깐만. 나 유부남인데 이거 바람 아니야? 이거 케이블 TV로 방영도 해 준다 했잖아. 그럼 이혼 숙려 감독관님이 알게 될 수도 있는데!

순간 이건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으나, 또 거꾸로 보자니 감독관이 보는 게 낫다는 판단이 들었다.

가만히 봐. 숙려 기간에 바람을 피우면 감점이 돼. 감점을 많이 당하면 숙려 기간은 자동 연장이 되고… 연장이 되면 쭉 본부장과 같이 살 수 있고….

“뭐야. 연장되면 좋은 거야, 나쁜 거야.”

생각하다 보니 쓸데없이 복잡하기만 하고 결론도 깔끔하지 못했다.

“일이나 하자, 일이나.”

이지운은 고개를 절레절레 젓고 신상품 개발 진행 보고서를 작성하기 시작했다.

복잡한 심경이야 어떻든 간에 퇴근 시간은 제때 닥쳐왔다. 이지운은 오늘도 007 작전을 실행해 서태천의 차에 오르는 데 성공했다.

주차장을 빠져나갈 때까지 조수석에서 한껏 웅크리고 있는 것도 잊지 않았다. 남들 눈에 띌까 봐 무서워서 생긴 버릇이었다.

“그게 무슨 소용이 있습니까? 옷 보고 머리 보면 다 알아볼 텐데요.”

“암만 그래도 최선을 다해야죠.”

“흠. 선팅을 더 짙게 하든가 해야겠네….”

서태천이 중얼거렸다. 주차장을 완전히 빠져나와 도로로 차가 진입하자, 이지운은 슬그머니 운전자의 눈치를 봤다. 그러다가 머뭇머뭇 말을 꺼냈다.

“그… 홍보팀 프로젝트 말인데요.”

“무슨 프로젝트 말입니까? 진행 중인 게 워낙에 많아서.”

이지운은 짝짓기 프로그램의 이름을 떠올려 보았다. 뭐였더라? 커플 파라다이스? 러브 인조이? 대충 들어서 이거 원 기억이 안 나네.

“그… 러브 어쩌구 말입니다.”

“아아. 러브 빌리지 프로젝트. 홍보 팀장에게 보고 받고 있습니다. 무슨 질문이죠?”

“저… 거기 가도 되는 건가요?”

이지운이 조심스럽게 물었다. 마침 신호를 받기 위해 차가 멈춰 섰고, 그 틈에 서태천이 이지운을 빤히 쳐다보았다.

“별다른 사유가 없는데 못 갈 건 뭡니까.”

평화롭다 못해 퍽퍽한 얼굴을 보며, 이지운은 속으로 빈정이 팍 상했다. 이제야 이 감정의 정체를 알 것 같았다.

이 인간은 도의적 책임이 없다!

아무리 그래도 엄연히 배우자인데. 법적으로 묶인 관계인데 싱글들이 질펀하게 놀다 오는 파티에 나가라고 아무렇지 않게 말해도 되는 건가? 말리는 시늉이라도 해야 사람답지.

이지운은 불쾌함이 스멀스멀 올라오는 것을 느끼며 흥, 콧방귀를 뀌었다.

“왜요. 가기 싫습니까?”

“아뇨? 그럴 리가요. 거기 가면 며칠간 자유인 데다가 다른 사람들하고 사귈 기회도 있잖아요. 천국이죠.”

“그래요. 그럼.”

서태천은 이번에도 아무런 감정 없이 대답했다. 이지운은 치밀어오르는 짜증을 느끼며 고개를 팍 돌려 창밖을 봤다.

그래. 잘 다녀오라면 못 다녀올 건 뭐냐. 아주 광기 어리게 즐겨 주마!

이지운은 이상한 데 열을 쏟는 습관이 있었다. 한번 칼을 뽑았으면 무라도 썰어야 하는 성미의 소유자였기에, 그는 러브 빌리지에서 최대한 재미있게 즐기기로 했다. 만약 들이대는 알파가 있다면? 그것마저 기꺼이 부대껴 버리자고 결심했다.

나 완전 독하게 즐기고 올 거라고. 알파 생겨서 올지도 몰라, 어?! BBG. 알아들어?

이를 바득바득 갈며 혼자 쉐도우 복싱을 하길 며칠. 드디어 출발 전날이 되었다.

금요일 저녁이라 시간도 몸도 여유가 있었다. 지금 미리 짐을 싸둬야 내일 아침에 바쁘지 않으리란 걸 알면서도 이지운은 아까부터 캐리어만 펼쳐놓고 자꾸 딴짓을 했다.

서태천은 오늘 바이어 미팅이 있는 날이라 늦는다고 했다. 그래서 혼자 밥을 먹고 설거지도 하고, TV 좀 봐줬더니 어느새 10시가 되었다.

아, 이젠 진짜 짐 싸야 되는데… 지난번처럼 덜렁대지 말고 꼼꼼하게 챙겨야 되는데… 끙.

“귀찮으니까 이따 싸자.”

이지운은 안방에서 초저녁잠이나 한잠 때리기로 마음 먹었다. 방 안으로 들어간 그는 광활한 침대에 다이빙하듯 들어가 데굴데굴 굴렀다.

“아, 편하고 좋다.”

무심코 손에 잡히는 것을 껴안았더니 본부장의 베개였다. 희미하지만 분명하게, 서태천의 체향이 느껴졌다.

“음… 베개 주제에 냄새가 좋군.”

조금만 더 자세히 맡아 볼까?

이지운은 베개를 코 가까이 가져다 대며 킁킁댔다.

묵직하고 강렬한데, 산뜻하기까지 하다. 이거 향수로 만들어서 팔면 대박 나겠는걸.

그런 생각을 하며 다시 한번 숨을 들이쉬려는 순간, 현관문 열리는 소리가 났다. 이지운은 베개를 내던지고 벌떡 일어났다.

빠르게 이부자리를 정리한 그가 문을 열고 나가자 서태천은 거실로 들어오는 중이었다.

“빨리 나오는군요. 누가 보면 저 기다린 줄 알겠습니다.”

“아, 아니. 그건 아니고요… 갑자기 현관이 열리니까 놀라서.”

“도둑 아니니까 안심해요.”

“저 본부장님더러 도둑이라고 한 적 없어요.”

이지운은 목 뒤를 긁으며 소파로 향했다. 서태천이 따라와 한 손에 들고 있던 종이봉투를 건넸다.

“이게 뭐예요?”

“주는 겁니다.”

“주는 건 아는데… 어?! OO호텔 로고네.”

얼마 전 서태천의 어머니와 망고 빙수를 먹었던 바로 그 호텔의 로고가 선명하게 박힌 봉투였다.

“저녁은 먹었을 것 같아서. 후식으로 먹어요.”

서태천은 그렇게 말하고 욕실 쪽으로 향했다. 언제나처럼 시커멓게 윤이 나는 가운을 들고서.

이지운은 눈을 끔뻑거리며 봉투를 여러 차례 살폈다.

처음이다. 살림을 시작한 이후, 본부장이 먹을 것을 따로 사 들고 와서 안겨준 것은.

“웬일이래?”

이지운은 놀란 마음을 추스르며 봉투를 열어 보았다. 내용물은 그도 익히 아는 것, 망고 빙수였다.

“헉.”

미친 듯이 맛있었지만, 가격 또한 돌아버려서 다시는 먹을 수 없었던 망고 빙수. 여름이 지나기 전에 다시 한번 먹을 수만 있다면 악마에게 영혼을 쬐끔 팔고 싶었는데 이게 웬 떡이야.

“진짜 맛있겠다!”

군침이 싹 돌아, 이지운은 서둘러 주방으로 향했다. 입가에는 며칠 만에 환한 미소가 걸렸다.

빙수 포장을 열심히 뜯고 숟가락 두 개를 마주 보게 놓았다. 찬란하게 빛나는 망고 과육을 보고 있으려니 곧 욕실 문이 열리고 검은 가운을 입은 서태천이 나왔다.

“아직 안 먹었습니까?”

“본부장님 나오시면 같이 먹으려고 기다리고 있었어요.”

“왜요?”

“어… 같이 먹어야죠!”

“난 단 건 별로입니다.”

“숙려 일지에 올리면 좋잖아요!”

서태천이 그대로 방으로 들어가려 하자, 이지운이 그를 불러 세웠다. 서태천은 잠시 생각에 잠긴 듯하다가 고개를 끄덕였다.

“아. 맞네요. 거기 업로드하기 좋은 콘텐츠네요.”

그렇게 말하더니 서태천은 따로 옷도 안 갈아입고 바로 이지운의 맞은편으로 와 앉았다. 물기 젖은 머리카락에 촉촉하게 빛나는 피부, 과시하듯 벌어진 가슴팍이 이지운의 눈을 사로잡았다.

“흠흠. 드세요.”

가슴을 쳐다보면 내가 이상한 사람 같잖아.

이지운은 자꾸만 탄탄한 가슴팍으로 가려는 시선을 자제하며 숟가락을 들었다.

“우와, 맛있다! 미쳤어!”

어떻게 된 게 호텔에서 먹었던 것보다도 더 새콤달콤하고 얼음이 고왔다. 레시피가 바뀌었을 리 없는데도 이상할 정도로 맛이 있어서 이지운은 광대가 불룩 솟아 나왔다.

“그렇게 맛있습니까.”

“얼른 드셔 보세요!”

“그래요, 그럼.”

서태천도 곧 한 입을 먹었다.

“맛있네요.”

“그쵸? 진짜 잘 사 오셨네.”

두 사람은 순식간에 빙수 한 그릇을 끝장냈다.

“어?! 사진! 사진 찍는 거 깜빡했어.”

빙수를 먹느라 정신을 놓은 탓에, 그냥 플라스틱 그릇만 남았다. 이지운은 울상을 지었지만, 그래도 오늘 밤은 정말 기분이 좋다고 말할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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