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화
이지운은 회사에서 꾸벅꾸벅 졸고 있었다. 비 오는 수요일이라 공기도 꿉꿉한 데다가 창밖에서 들려오는 빗소리도 몸을 나른하게 만들었다.
물론 몸이 축축 처지는 데에는 어제 겪은 여러 가지 수모와 정신적 스트레스도 한몫하는 듯했다.
“어제 일은 잘 봤어요?”
민혜경 대리가 이지운 쪽으로 고개를 돌리고 물었다.
“아, 뭐… 그럭저럭요.”
“그랬구나.”
사실 그녀에게는 묻고 싶은 게 따로 있었다.
본부장님도 반차 썼는데 설마 둘이 만난 건 아니죠?
이런 말이 목구멍까지 차올랐지만 차마 직설적으로 물을 순 없기에 그녀는 에둘러 말하기 전법을 쓰기로 했다.
“근데 진짜 신기하다. 본부장님 반차 절대 안 쓰시는 분인데… 일 년에 한 번 쓸까 말까 한 반차가 어떻게 주임님이랑 딱 맞아?”
“아… 그런가요?”
네. 저랑 같이 반차 쓰고 부부 상담 갔다가 집에서 떡갈비 구워 먹은 다음에 한 침대에서 잠들었습죠.
죽었다 깨어나도 말할 수 없는 비밀이기에, 이지운은 입을 꾹 다물고 업무 화면이나 열심히 들여다보았다.
그때 민혜경 대리가 꺅 소리를 질렀다.
“이 공지 뭐야!”
“왜 그러세요, 대리님?”
“지운 주임. 빨리 인트라넷 공지 사항 들어가 봐. 대박 재밌는 거 떴어!”
민 대리뿐 아니라 사무실 전체가 술렁이며 삼삼오오 이야기를 시작했다. 대체 뭐지? 이지운은 빠르게 공지 사항에 들어갔다.
<기업 이미지 제고를 위한 홍보 콘텐츠 제작의 건>
이미 조회수 1천을 돌파한 글을 누르니 기안문이 하나 떴다.
- 제주점 홍보와 더불어 친근한 기업 이미지 구축을 위한 프로젝트를 시행하오니, 미혼 사원들의 적극적인 협조 부탁드립니다.
- 협조 사항 : 커플 매칭 리얼리티 콘텐츠 제작
가제 ‘러브 빌리지’
(*** 참여 인원은 알파/오메가/베타의 성비를 고려하여 20명으로 구성)
- 일정 : 3박 4일
- 장소 : 제주 리조트
- 방영 일정 : 미정
“헉. 짝짓기 프로그램이잖아요?”
“맞아. 자세히 읽어 보니까 그룹 내 미혼자들 신청을 우선 받고, 신청자가 모자라면 랜덤으로 차출될 수 있다고 하네? 우리 지운 주임도 싱글인데 해당 사항 있는 것 아니야?”
민 대리가 흥미진진하다는 듯 말하자 이지운은 손사래를 쳤다. 서태천이 떡하니 올라 있는 가족 관계 증명원은 회사에 제출하지 않은 상태라, 이지운은 아직까지 미혼자로 분류돼 있기는 했다. 그래도 이 무수한 사람 중에 자신이 선발되리라는 생각은 하지 않았다.
“설마요. 하고 많은 사람 중에 제가 뽑힐 리가 있나요?”
“왜, 사람 일은 모르지.”
성비에 따라 형질인을 차출한다고는 하나, 이지운은 자신이 뽑히는 일은 없으리라고 생각해 손사래를 쳤다.
“어? 그러고 보니까 본부장님도 싱글이지. 그것도 그룹 내 인기 넘버원 싱글. 본부장님도 뽑히시는 거 아니야?”
“네?”
“진짜 랜덤이라면 본부장님이 뽑히지 말란 법 없잖아.”
…생각해 보니까 그렇네? 진짜로 전체를 놓고 추첨한다면 못 하리란 법도 없어.
민혜경 대리가 한 말이 묘하게 신경 쓰여, 이지운은 오후 내내 프로젝트 생각에 잠겨 있었다. 남들이 어련히 자리를 다 채우겠거니 하면서도, 설마 하는 마음이 그를 졸졸 따라다녔다.
그렇게 시간이 지나, 오늘은 프로젝트 참가자 명단이 공개되는 날이었다.
이지운은 별 신경 안 쓰는 척하면서 1분에 한 번씩 사내 공지 사항 게시판을 새로 고침 중이었다. 그러다가 new! 게시물이 떴다.
[‘러브 빌리지’ 출연자 명단(20명) 안내의 건]
- 신청자는 즉시 확정해 드렸으며, 참여 인원이 부족했던 알파/오메가 사원들은 후보자로 등록해 놓았습니다. 참가를 원치 않으시는 분은 해당 부서로 유선 연락 주시면 조치하여 드리겠습니다.
“와, 지운 주임님! 주임님 이름도 있어!”
옆자리에서 민 대리가 꺅꺅거리기 전에 이지운도 진작 명단 파일을 열어 보았다. 인원수가 많지 않았기에 이지운은 쉽게 자기 이름을 찾아볼 수 있었다.
하지만 명단 중에 서태천의 이름은 없었다. 두 번 세 번 체크했지만, 그는 없었다.
어… 없네. 나만 뽑혔어.
확률적으로 충분히 가능한 일인데도 기분이 묘했다. 쉽게 말해, 허전했다.
“지운 주임 이제 회사 내에 핫스타 되겠다. 진짜 재밌겠어!”
“아… 네.”
“나갈 거지?”
“음… 출연해야죠. 어차피 저 같은 주임 나부랭이가 거절한다고 해서 들어줄 것 같지도 않고….”
“그건 그래. 우리 부장님이 홍보팀 눈치 엄청 보는 거 알지?”
“다 떠나서 3박 4일이나 되잖아요. 휴가라고 생각하고 다녀와야겠어요.”
들뜨기는커녕 힘없는 목소리에, 민 대리는 조용히 입을 다물었다. 대신 김 비서에게 즉각적으로 메신저 대화를 걸었다.
민혜경
본부장님 왜 명단에 없어? 있었으면 진짜 재밌었을 텐데 ㅠㅠ
김민지
그니까 나도 아쉽
민혜경
근데 내가 지난번에 말한 평사원 있잖아. 본부장님하고 뭐 있는 거 같다던. 그 사원 이번에 뽑혔거든? 근데 지금 엄청 울적한 표정이야
김민지
대박!
파티션 너머 민 대리의 타자 소리가 엄청나게 시끄러웠다. 대리님은 참 열심히 일하시는구나. 난 일이 손에 안 잡히고 기분만 싱숭생숭한데. 그렇게 생각하는 이지운이었다.
잠시 기다리니 사내 메신저로 단체 쪽지가 왔다.
*** 수신 : 러브 빌리지 참가 사우들
*** 참조 : 홍보 팀장
안녕하십니까. 홍보팀입니다.
프로그램 출연자들을 대상으로 금일 15시에 간담회가 열리니 2층 대회의실로 모여 주시기 바랍니다.
이지운은 쪽지에 회신하면서 본부장실 쪽으로 시선을 향했다. 하지만 아침의 명단 발표 때부터 지금까지 그에게 따로 연락 온 것은 한 통도 없었으며, 지금도 그의 방문은 굳게 닫혀 있을 뿐이었다.
내가 뭐라고 싱숭생숭해하냐? 막말로 나랑 본부장이랑 뭔 사이도 아닌데, 미혼자로서 차출된 것뿐이야. 유부남 생활 벗어나서 자유나 누리다 오자고.
이지운은 그렇게 마음먹으며 어깨를 으쓱해 보았다.
***
회의실에 모인 사람은 총 20명이었다. 얼굴을 살펴보니 리스트에 올라왔던 명단 그대로였다. 아무도 참가를 거절하지 않은 것이다.
하긴, 회사 벗어나서 싱글끼리 놀 기회를 놓칠 리 없지.
애당초 얼굴 팔리는 걸 싫어하거나 내향적인 직원은 신청 자체를 안 한 탓에, 회의실 내는 외향인들의 기운으로 가득 차 있었다.
“지운아!”
어디 앉을까 두리번거리고 있는데 기현진 대리가 번쩍 손을 들고 이지운을 불렀다.
“아! 기 대리님.”
“내 옆에 앉아.”
“네, 대리님.”
기현진이 이지운이 앉을 의자를 빼 주었다.
“대리님도 명단에 있길래 반가웠어요.”
“나도. 지운이랑 가는 거 너무 신나서 벌써 기대돼.”
“에이, 저만 가는 것도 아닌데 뭘 그렇게 말씀하세요.”
“아니야. 나는 진짜로 지운이랑 가는 게 기대돼.”
연신 웃음을 멈추지 않는 기현진을 보며 이지운은 별생각이 없었다. 열성 알파인 그는 서글서글한 외모와 큰 키 덕분에 오메가들에게 인기가 좋은 것으로 알고 있었다. 그러니 이번 프로그램에서도 꽤 활약하지 않을까, 이지운은 그렇게 생각했다.
곧 문이 열리고 홍보 팀장과 실무진 두 명이 들어왔다.
“여러분, 안녕하십니까. 사우님들의 귀중한 시간을 내주신 점 감사드립니다.”
홍보 팀장의 인사말에 스무 명이 일제히 박수를 쳤다.
“이번 프로젝트의 구체적인 진행 방향에 대해 설명드리고자 합니다.”
스크린에 펼쳐지는 PT자료에 이지운은 고개를 빼꼼 내밀었다. 현재 회사 소유의 리조트 중에 가장 호화롭고 가격대 높기로 소문난 제주 지점의 정경을 배경으로, 언제 어떻게 모여서 출발하고 돌아오는지 등이 소개되었다.
“1인 1실을 쓰면서 주로 야외 정원, 파티룸에서 공동생활이 이뤄질 겁니다. 야외 바비큐장이랑 수영장에서도요.”
“재밌겠다.”
직원들은 하나같이 흥미롭다는 반응을 보였다.
“다른 연애 리얼리티 프로그램에서 그런 것처럼 첫인상 선택 데이트, 야간 산책, 개별 데이트 모두 준비돼 있습니다. 여러분은 매일 하루에 한 번 이상 데이트를 하게 되실 거고요.”
데이트란 말에 직원들은 들뜬 티를 감추지 못했다. 이지운은 왕따가 된 기분이었다. 평소 연애에 별다른 관심 없이 나홀로 라이프를 너무 즐긴 탓인가. 알파나 베타를 갈아치워 가며 데이트를 즐길 수 있단 말이 하나도 즐겁게 다가오지 않았다.
하지만 바로 옆자리의 기현진만 봐도 사람들은 흥분과 행복에 휩싸인 듯 보였다.
…재미없다.
이지운은 메모지에 연필을 가져다 대고 끄적끄적 낙서를 하기 시작했다. 동그라미와 직선으로 이루어진 그림은 엊그제 그렸던 본부장의 초상이었다.
또 못생기게만 그려지네. 나도 본부장 그림처럼 잘 그리고 싶은데 그건 재능의 영역인가?
혼자만 다른 세계에 갇혀 설명은 듣는 둥 마는 둥, 이지운은 대충 시간을 흘려보냈다.
정신 팔린 사이 간담회가 끝나고 마지막 질의응답 시간이 되었다.
“그럼 질문사항 있으십니까?”
담당자가 묻자 여기저기서 직원들이 손을 들고 물었다.
“커플 되면 특별 수당 지급받습니까?”
“여기서 결혼하는 커플 생기면 포상금 줘야 하는 것 아니에요?”
와하하. 좌중에서 폭소가 터져 나왔다. 이지운은 그런 농담도 하나도 웃기지 않았다. 다만, 홍보 담당자의 대답은 그의 잠든 귀를 깨우기 충분했다.
“포상금에 대해서라면 사실 저희가 계획한 바가 있습니다. 마케팅 본부장님 특별 지시 사항인데요, 여기서 커플이 탄생하면 1차 포상금과 포상 휴가. 그리고 최종적으로 결혼에 골인하면 특별 포상금을 추가 지급하기로 했습니다.”
“진짜요?”
대박이다. 나 꼭 커플 돼야겠다. 주변에서 웅성웅성 난리가 났다. 이지운은 그림을 그리다 말고 입가를 굳혔다.
…이 리얼리티에서 최대한 많은 커플이 탄생하길 바라는구나. 프로젝트에 관심을 많이 갖고 있어.
내가 나가는데도.
이지운은 형언할 수 없이 기분이 상했다. 하지만 왜, 무슨 자격으로 기분이 나쁜지는 설명하기 어려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