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화
쪽팔림은 나의 몫이구나.
이지운은 고개를 푹 숙이며 사람들의 시선을 외면했다.
“흠흠. 그러면 다음 코너는 숙려 일지를 교환해서 보는 시간입니다. 자, 여러분 앱 로그인되어 있으시죠?”
“네!”
“상대방과 바꾸어서 읽어봐 주시기 바랍니다. 일지를 보면서 어떤 감정이 드는지 잘 느껴보시고요.”
감독관의 지시에 따라 커플들이 핸드폰을 교환했다. 그런 와중에 작은 소란이 일어났다. 한 커플이 앉은 테이블에서 언성이 높아진 것이다.
“뭐야. 장난해? 당신 정말 나 증오하는구나?”
“솔직하게 써야지, 그럼 어떡하라고. 난 있는 그대로 쓴 것뿐이야!”
알파와 오메가의 말싸움에 감독관이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저런 식으로 싸우면 감점입니다. 좋은 점을 보려고 노력하셔야죠.”
이지운은 살벌한 커플 싸움에 기가 죽었다. 나도 혼나는 거 아니야? 나름 열심히 쓰긴 했지만 본부장 흉본 것도 있는 것 같은데… AI 같다, 로봇 같다는 말도 쓴 기억이 난다. 어떡하지?
“뭐 하십니까? 어서 교환하세요.”
“아, 네.”
감독관의 재촉에 이지운이 쭈뼛쭈뼛 핸드폰을 내밀었다. 그에 비해 서태천은 아주 여유로운 태도로 점잖게 핸드폰을 내밀었다.
그가 턱을 괴고 흠- 하며 무표정하게 일지를 읽는 동안, 이지운은 두근거리는 마음으로 서태천의 일지를 읽기 시작했다.
나한테 도대체 무슨 평가를 내렸을까? 우려와 함께 최근 일자를 펼쳤는데. 아니 이게 웬걸.
날짜 아래 세세한 시각별로 이지운과 서태천이 시행한 일들이 빼곡하게 적혀 있었다.
그의 기록은 업무 보고서를 방불케 했는데 추진 배경, 목표, 진행 사항, 추진 결과 이런 용어가 사용되어 있었다.
“뭐야. 회사 보고서야?”
O 추진 배경 : 부부간의 화합 도모
O 진행 사항 : 본인 주도하 석식 (1시간 소요)
O 추진 결과 : 성공적으로 완료
*** 비고 : 갑각류 알레르기가 있는 것으로 보임. 다음 식사 시 개선 필요.
“아니… 하루도 안 빼먹었네.”
지독한 인간인데 특이하기까지. 이지운은 벙쪄서 입을 떡 벌렸다.
…그런데 새우 알레르기는 잘 살펴 줬네. 그래서 지난 회식 때 내 앞에 놓인 간장 새우장을 치워 준 건가.
이지운은 눈만 살짝 들어 서태천을 살폈다. 그는 표정에 그 어떤 미동도 없었다. 하여간 속을 알 수 없는 로봇이었다.
“다 읽어 보셨나요, 여러분? 어떠세요. 배우자의 속마음을 조금이나마 알게 되지 않으셨습니까.”
“네.”
“이번 주 과제는 면담 후기 작성입니다. 숙려 일지 앱에 과제 제출란을 이용해서 각자 보고서를 제출해 주시고요, 그럼 여기서 이번 모임을 마치고자 합니다.”
사람들이 박수를 치자 이지운도 얼떨떨하게 박수를 쳤다. 서태천은 칼 박수를 정박으로 쳤다. 마치 영화제에 참석한 배우처럼 박수도 폼이 났다.
“이만 귀가하죠.”
“아, 네.”
이지운은 주섬주섬 일어나 저 멀리 멀어져 가는 서태천의 뒤를 따랐다. 그런데 그의 귀에 다른 오메가들이 소곤거리는 말이 들려왔다.
“잘생기고 점잖다. 너무 멀쩡한데?”
“저 오메가는 왜 이혼하려고 하는 거야? 이해가 안 가네.”
“내 말이. 내 남편처럼 개차반도 아니구만 왜 저런 알파를 마다해?”
“모르지. 알파 쪽에서 걷어차려는 거 아니야?”
깔깔거리는 웃음이 터져 나오자 이지운은 열이 받았다.
“저기요. 저희는 상호 협의하에 이혼하려는 거거든요? 누가 누굴 걷어차요!”
당차게 한 마디를 쏘아붙여 주자, 오메가들은 찬물을 끼얹은 듯 조용해졌다.
“흥!”
나 차이는 거 아니라고!
복도로 한 발짝 늦게 나온 이지운은 주변을 둘러보며 서태천을 찾았다. 그는 저 멀리서 감독관과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는데 멀어서 대화 내용이 잘 들리진 않았다.
다만 언뜻 들려오는 단어는 ‘감점’, ‘연장’ 같은 것들이었다.
어라? 지금 숙려 기간 이야기하는 거 맞지?
“…해서 감점을 얼마나 받으면….”
“그렇게 될 시에 연장이….”
드문드문 들려오는 대화를 엿들으며 이지운은 대충의 상황을 짐작할 수 있었다. 자신과의 결혼생활을 하루도 더 연장하고 싶지 않아서 꼼꼼하게 확인하고 있구나.
근데 그건 나도 마찬가지거든요?
그렇게 생각하면서도 이지운은 묘하게 빈정이 상했다. 자신도 연장이라면 딱 질색인데 왜 빈정이 상하는지는 모르겠으나, 서태천이 하루빨리 저를 떨쳐내려고 한다니 기분이 나빴다. 덜 마른 빨래를 맞닥뜨린 것처럼.
“여기 있었군요.”
그때 서태천이 이지운을 발견하고 성큼성큼 걸어오기 시작했다. 이지운은 대화를 엿들은 게 들켰을까 봐 순간 쫄렸다.
“먼저 안 내려가고 뭐 하고 있었습니까?”
“아, 저! 그게… 벽에 붙은 벽보 읽고 있었어요!”
이지운이 벽에 붙은 아무것이나 가리켰다.
<안전한 러트-히트 사이클을 보내는 방법, 이렇게만 해 보세요!>
국가 차원의 캠페인 홍보물이었다.
아니, 난 왜 가리켜도 이걸 가리키냐. 망할.
이지운은 제 손가락이 원망스러웠지만 이미 쏟아진 물이었다.
“음. 사이클 관리도 신경 쓰고 있는지 몰랐습니다.”
서태천이 고저 없이 말하며 벽보를 뚫어지게 쳐다보았다.
“아, 아니 그게 아니라.”
“이 부분은 제가 적극적으로 정보를 취합해서 대처하도록 하겠습니다. 한집안에 살다 보니 무슨 일이 생길지 알 수 없잖습니까.”
서태천이 아무렇지 않다는 듯 대답하는 바람에 이지운만 더 민망해졌다.
돌아가는 차 안은 어색함과 침묵이 가득했다. 적막을 깨운 것은 서태천이었다.
“뭐 먹고 싶은 것 없습니까.”
이지운은 사실 입맛이 별로 없었지만, 딱히 굶고 지내는 스타일은 아니라 냉장고 속에 뭐가 있는지를 떠올려 보았다.
지난번에 사 놓은 밑반찬이 좀 있고… 음… 소시지 조금에… 한우는 지난번에 같이 구워 먹었지.
“어… 냉장고 비었는데.”
“그럼 떡갈비 어때요. 아주머니가 만들어서 냉장고에 넣어두셨다고 아까 문자 왔었습니다.”
“아, 진짜요?”
집안일을 주기적으로 도맡아 해 주시는 아주머니가 서태천에게 연락을 해 둔 모양이었다.
“떡갈비 좋아요.”
“그거 구워 먹죠.”
이지운은 떡갈비 생각에 입맛이 돌아 어서 집으로 돌아가고 싶었다.
집에 도착하자 서태천은 선뜻 요리를 자처했다.
“쉬고 있어요, 이 주임. 저녁 다 되면 부를 테니까.”
“그래도 돼요?”
“안 될 건 뭡니까.”
이럴 때 보면 되게 배려심 있는 것 같기도 하고… 내가 주방 망가뜨릴까 봐 겁내는 것 같기도 하고… 모르겠다.
이지운은 어깨를 으쓱하고 대충 안방으로 들어왔다. 욕실에서 손발만 씻고 벌러덩 침대에 누운 그는 천장을 보다가 문득 그림 생각이 났다. 아까 선물 받은 그림이.
일어나 가방을 뒤적거린 그는 이내 예술적인 그림을 찾아냈다.
“내가 이렇게 생겼다고? 말도 안 돼. 미치도록 잘생겼네. 아니, 아름답다 아름다워.”
나 평범상에 무난하게 생겼다고 생각했는데, 이거는 뭐 미모는 둘째치고 묘하게 유혹적인… 잠깐. 나 지금 뭐라는 거야? 유혹 같은 소리 하고 자빠졌다.
“식사 준비 다 됐어요. 이 주임.”
그때 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났다. 이지운은 식겁하며 가방에 그림을 책상 서랍에 잽싸게 집어넣고 바깥으로 나갔다.
배 터지게 밥을 먹은 이지운은 배를 두드리며 안방 침대에 드러누워 상담 후기 과제를 작성했다. 그런데 막상 1000자를 채우려 하니 쓸 말이 마땅치 않았다.
유익하고 뜻깊었다. 재밌었다.
“아니, 천 자는커녕 백 자도 안 되네.”
이지운이 골머리를 싸매는 동안 서태천은 침대 옆 소파에 앉아 책을 읽고 있었다.
“본부장님은 후기 안 써요?”
“잠깐 전화 올 데가 있어서 그거 받고 쓸 겁니다.”
그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그의 핸드폰이 진동했다.
“네. 어머니. 어쩐 일이세요.”
어? 그 어머니시구나. 무슨 일로 전화를 하셨을까.
이지운이 궁금해하는 눈빛을 띠는 게 티가 났는지, 서태천이 자리에서 일어나 밖으로 나갔다.
***
“한국 오셨다고요? 저한테 말씀 없으셨잖아요.”
-그러는 너도 나한테 말 한마디 없이 결혼했잖니.
“그건 사정이 좀 있었어요.”
-사정은 무슨. 근데 너 독신주의자라며. 대뜸 결혼하는 법이 어딨어.
“그건 나중에 자세히 말씀드릴게요.”
어머니 말씀이 틀린 건 아니었기에, 서태천은 구구절절 따지고 들기가 어려웠다.
서태천은 31년 인생을 독신주의를 주창하며 살아왔다. 물론 부모님의 등쌀에 떠밀려서 몇 번 맞선을 보기는 했다. 하지만 그때마다 본인 기준 예의 바르게, 남들 기준 냉랭하고 무섭게 거절을 날리고는 했다.
어려서 부모의 이혼 과정을 지켜본 상처가 크기도 했거니와, 워낙에 일이 적성이었다. 회사를 키워야지. 난 일과 결혼해서 혼자 살 거다.
언제부턴가 그렇게 생각하다 보니 결혼이 전혀 아쉽지 않았다. 얼굴도 몸도 직업도 환상적인데 왜 결혼을 안 하냐는 물음에도 서태천은 무반응으로 일관했다.
관심이 없는데 어떻게 해요.
그러니 자신의 인생 계획대로라면 자신은 평생 싱글이어야 했다.
그런데 어느 날 웃기지도 않는 해프닝이 일어났다. 이지운이 본부장실로 바들바들 떨며 들어와 가족 관계 증명원을 내밀었을 때 얼마나 기가 찼던가.
결혼에는 연애도, 만남도 필요 없었다. 그저 행정 착오 한 번이면 충분했다.
그런데 그 오메가의 얼굴을 오늘 하루 종일 그렸다. 지금 침대에 엎드려 있는 그 오메가의 얼굴을.
“인생은 알 수 없네.”
전화를 끊은 서태천이 중얼댔다. 무채색 얼굴에 아주 희미하게, 미소가 어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