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화
다음날, 이지운은 회사에 오후 반차를 신청했다. 대직자인 민혜경 대리가 연동 결재에 전자 서명을 기입하며 물었다.
“어디 놀러라도 가? 날도 좋은데 말이야.”
“아, 아뇨. 어디 좀 갈 데가 있어서요.”
“그래? 병원이나 관공서인가 보네.”
“네, 뭐.”
관공서라면 관공서지. 오늘은 이혼 숙려 감독관을 만나러 <알파오메가 이혼 숙려 서울 강남센터>를 찾는 날이니까.
이지운은 책상 밑으로 살짝 핸드폰을 열어서 문자를 다시 한번 확인했다.
[이혼 숙려 감독관 면담 안내]
-시간: 오후 3시
-장소: 강남 센터 별관 201호
-준비 사항: 한번 The 숙려해 보세요 앱 로그인 (배우자와 숙려 일지를 교환하여 읽는 시간이 있습니다.)
-비고: 오늘은 드로잉 원데이 레슨이 실시될 예정으로, 2시간여가 소요되오니 참고 바랍니다. (상대방의 모습을 그리면서 긍정적 가치 찾기)
…이런 걸 하러 간답니다, 여러분.
이지운이 가벼운 환멸에 시달리고 있을 때, 맞은 편에 앉은 김 과장이 말했다.
“어? 오늘 본부장님도 오후 반차시네. 누가 보면 둘이 같이 놀러 가는 줄 알겠다.”
팀원들이 와하하 웃음을 터뜨렸다. 이지운은 썩은 미소를 지으며 어색하게 웃음에 동참했다.
“그러고 보니까 지난번 체육 대회 때 호흡이 엄청 잘 맞더만.”
“나 감탄했잖아. 거의 환상의 짝꿍 아닌가?”
팀원들의 주절거림은 끝이 없었다. 이지운이 하하하… 어색하게 웃는 동안 민혜경 대리는 이지운의 표정을 면밀하게 살폈다.
금요일도 아니고 화요일의 오후 반차가 겹칠 확률이 얼마나 될까. 어떻게 보면 우연이라고 볼 수 있었지만 이미 머릿속이 망상으로 꽉 찬 민 대리에게는 이것마저 떡밥으로 보였다.
그녀는 메신저 화면을 켜고 평소 친하게 지내는 동기이자 서태천 본부장의 비서에게 대화를 신청했다.
민혜경
야, 사내커플 냄새 감지함.
김민지
대박사건. 누구?
민혜경
어디 가서 말하지 말아라.
ㅂㅂㅈ님이랑 평사원이랑 뭐 있는 것 같다.
김 비서의 반응은 가히 폭발적이었다. 어떻게 알게 됐냐, 증거가 있냐 등등 빛의 속도로 타자를 치며 질문하고 있는 동안 서태천이 자기 집무실에서 나왔다.
김 비서는 시치미를 뚝 떼며 일어나 서태천에게 인사를 건넸다.
“조심히 들어가십시오.”
“그래요. 업무 차질 없게 나 찾는 연락은 잘 키핑해 두도록 해요.”
“알겠습니다.”
그녀는 바쁘게 나가는 서태천의 뒤태를 보며 눈을 빛냈다. 이로써 사내에서 이들을 의심하는 인원은 2명으로 늘어났다.
서태천이 지하 주차장에 도착하자, 기둥 뒤에 숨어 있던 이지운이 몸을 날려 그의 차로 달려왔다. 007 요원을 연상케 하는 동작에 서태천도 장단을 맞추어 빠르게 차에 시동을 걸었다.
“안전 벨트 매시죠, 이 주임.”
“아. 맞다.”
하도 급하게 타느라 정신이 없어서 이지운은 안전벨트를 미처 차지 못한 상태였다. 주섬주섬 벨트를 찾으려는데 갑자기 긴 팔이 훅, 다가왔다.
뭐야.
놀랄 틈도 없이 서태천이 이지운에게 몸을 숙여 벨트를 채워 주었다. 순간적으로 두 사람 사이의 간격이 좁혀져 체향과 체온이 노골적으로 느껴졌다.
매력적이라고밖에는 표현할 수 없는 강한 포레스트 향. 거기에 아득하고 서늘한 기운이 섞인 냄새는 서태천만의 개성과 존재감을 나타내고 있었다.
…원래 이렇게 냄새가 좋았나? 처음 맡아본 건 아니지만, 오늘따라 이상할 정도로 향이 좋네.
자기도 모르게 서태천의 향을 음미하던 이지운은 퍼뜩 정신을 차렸다. 아니 뭐, 남이사 그러든가 말든가.
이혼 숙려 센터까지 가는 길은 살짝 체증이 있었다. 두 사람은 별 대화 없이 20여 분 거리를 달렸다. 그동안 이지운은 속으로 다양한 생각을 했다.
지금까지 이혼, 숙려 말만 했지 실제로 오프라인 센터에 가는 건 처음이었고 감독관을 대면하는 것도 서로의 숙려 일지를 열어 보는 것도 처음이었다.
과연 저 남자는 나에 대해, 이혼에 대해 뭐라고 써 놨을까. 솔직하게? 아니면 적당하게 꾸며서?
흠… 나는 과하게 솔직한 면도 있고 또 개발새발 갈겨쓴 날도 있는데 무성의하다고 까이는 것 아니야?
이지운은 슬쩍 앱을 켜서 그동안의 일지와 함께, 빅데이터 키워드 검색 결과를 보았다. 그곳에는 ‘덩치, 잘생겼다, 어쩌다가, 생긴 건 멀쩡’이라는 키워드가 한가득이었다. 특히 자주 사용한 단어는 ‘검은 가운’ 이었다.
아니 내가 이렇게 BBG의 외모에 대해서 자주 언급했었다고? 검은 가운은 또 뭐야. 13번이나 언급했네.
이지운이 속으로 구시렁거리는 동안 차는 센터 주차장에 도착했다. 차에서 내려서 별관 2층으로 올라가니 카페처럼 꾸며진 공간이 나왔다.
20명 정도를 수용할 수 있는 공간에는 숙려 커플로 보이는 커플들이 약 다섯 쌍 와 있었다. 이지운과 서태천은 구석진 곳에 자리를 잡은 후 서로 거리를 두고 앉았다.
이지운이 살펴보니 다른 커플들은 대체로 분위기가 냉랭했다. 서로를 아예 쳐다보지 않고 팔짱만 끼고 있는 사람들도 제법 있었다. 그런데 그 와중에도 이지운과 서태천에게 시선이 빠듯하게 쏠렸다.
저 알파 잘생겼다. 한 오메가가 작게 중얼거리자 그 옆에 있던 알파가 미간을 팍 구기며 그녀에게 한소리를 했다.
그런가 하면 이지운을 대놓고 쳐다보는 중년 알파도 있었다.
뭐지, 저 아저씨는 왜 날 쳐다봐?
그러는 동안 감독관이 들어왔다. 그는 푸근한 인상의 50대 남성이었다. 다만 눈빛만큼은 생생하게 살아 있었다.
“안녕하십니까. 여러분의 이혼 숙려 감독관 장광철입니다.”
“안녕하세요.”
좌중의 인사를 받으며 감독관은 프로그램 북을 꺼냈다.
“안내드린 바와 같이 오늘은 숙려 일지 교환과 서로의 초상 그리기 시간이 있습니다. 시간 관계상 드로잉 수업부터 진행토록 하겠습니다.”
곧 진행 요원들이 들어와서 스케치과 연필 등 그림 도구를 나눠주었다.
“일단 첫 단계. 서로에게 시선을 떼지 말고 배우자를 3분간 가만히 관찰하세요.”
“네?”
수강생들이 불만 섞인 목소리를 냈다. 이지운 역시 당황스럽긴 마찬가지였다. 사귀는 사이도 아닌데 눈싸움을 3분 하라니 이거 너무 가혹한 것 아니야? 민망하게스리.
“하셔야 합니다. 이거 이수 안 하면 점수 안 나갑니다.”
“하아… 정말.”
사람들은 짜증을 내면서 의자를 돌려 서로의 배우자와 마주 보는 자세를 취했다.
“우리도 하죠. 이 주임.”
“아, 네… 뭐.”
이지운은 민망하기 이를 데 없었으나 하라면 해야지 별수 없으므로, 의자를 틀어 서태천과 마주 봤다. 눈앞에 선이 굵고 뚜렷한 얼굴이 강렬한 이미지를 뽐내고 있었다.
역시 부담되네. 꼭 외국인처럼 보이기도 하고, 모델처럼 생기기도 했고… 하여간 얼굴 하나는 끝내줘요. 이따위로 엮이지만 않았다면 우리 회사 본부장 잘생겼다고 말하고 다녔을 정도의 외모란 말이야.
근데 저쪽은 왜 나를 저렇게 뚫어지게 쳐다보지? 사람 부담스럽게스리.
서태천의 눈빛은 무척이나 강렬했다. 마치 이지운 안에서 어떤 것을 발견하고 싶은 사람 같았다.
이지운이 슬그머니 고개를 돌리려 하자, 감독관이 바로 그의 옆으로 걸어와 경고를 줬다.
“피하지 말고 무조건 시선 마주치세요. 실시.”
“…넵.”
영겁 같은 3분이 지나고, 드디어 그림 그리기 시간이 다가왔다. 테이블에 스케치북과 연필을 놓고 나란히 앉은 커플들은 서로의 얼굴을 힐긋힐긋 보며 초상화를 그리라는 지시를 받았다.
“자, 그럼 이제 그리기를 시작하세요.”
이지운은 그림이라면 젬병이었으므로 뭘 어떻게 그려야 할지 감을 못 잡고 뒤통수부터 긁었다. 그에 비해 서태천은 도화지에 중심선부터 슥슥 그리고 그림을 시작했다.
“오. 제법인데요.”
“저 예고 나왔습니다. 원래 화가 되려고 했어요.”
이지운이 슬쩍 관심을 보이자, 서태천이 대수롭지 않다는 듯 대답했다.
“진짜요? 미국에서 경영학 전공하신 것 아니었어요?”
“그것도 맞죠. 화가가 되려던 꿈을 접었으니까.”
흠. 처음 안 사실이네.
이지운은 서태천의 뻣뻣하고 감성 하나 없어 보이는 모습과 화가가 어울리지 않는다고 생각하며 다시 자기 그림에 집중했다. 삐뚤빼뚤 졸라맨이 스케치북을 옹졸하게 채워나가기 시작했다.
서태천은 묵묵히 연필을 놀렸다. 이지운은 그 모습을 쳐다보며 솔직히 멋있다는 생각을 했다. 인정하기는 싫지만 창가로 들어오는 햇빛마저 그를 위한 조명인 듯 미남을 비췄다.
하지만 별로 인정하고 싶지 않기도 했고, 인정해 봐야 무슨 소용인가 싶기도 했다. 빨리 남은 5개월 채우고 빠이빠이 하고 싶은 가짜 남편인데 멋있어서 어디다 쓸 건가.
이지운은 졸라맨을 그렸다가 지우개질을 했다가를 여러 차례 반복했다.
“끙….”
나름 그림에 골몰하며 긴 시간을 보냈지만 서태천과 하나도 닮지 않은 그림이 나왔다. 서태천은 몰래 그의 스케치북을 들여다보며 피식 웃었다.
“자. 이제 배우자와 그림을 교환해서 보겠습니다. 서로가 바라보는 모습은 어떤 모습일까요?”
감독관의 종료 신호에 맞추어 커플들은 스케치북을 교환했다. 이지운은 못생긴 그림을 겨우 완성한 제 스케치북이 부끄러워 잠깐 미적거렸다. 그러자 서태천이 불쑥 손을 내밀어 이지운의 그림을 가져갔다.
“이게 저입니까?”
“아… 그게,”
그림도 아니고 거의 표의 문자, 기하학적 무늬에 가까운 형상에 이지운은 머쓱했다.
“나름 최선을 다하긴 했는데… 끙.”
이지운은 뻘쭘함을 감추며 서태천이 건네는 그림을 받아들었다. 그러고는 눈을 번쩍 떴다. 그림 속의 자신은 그리스 신화 속의 님프 뺨치게 사랑스러운 모습을 하고 있었다.
그야말로 그림 같은 옆모습에 아련한 표정, 거기에 연하디연한 장밋빛 홍조까지. 지금 당장 미술관에 걸어 놔도 손색이 없는 예술품이었다.
“이, 이거 허위 매물 아니에요?”
내가 언제 이렇게 아련하게 웃었다는 거야. 이건 미모 사기다!
“뭡니까. 그 반응은.”
“아니. 뭘 이렇게까지 잘 그리셨냐고요.”
“잘 그려도 따지는군요.”
“그게 아니라 상대적으로 제가 너무 못 그리는 것 같이 보이잖아요.”
티격태격하는 둘의 옆을 감독관이 지나치다가 발걸음을 멈춰 세웠다. 그는 오, 하며 감탄사를 내뱉더니 서태천의 그림을 들어 사람들에게 두루두루 보여 주었다.
“여러분. 이 그림 좀 보십시오. 대단히 잘 그렸죠? 그뿐만 아니라 애정 가득한 시선이 담겨 있어요. 이렇게 그림이란 우리를 속이지 않습니다. 아직 이분에게는 배우자를 향한 사랑이 남아 있다는 거예요.”
“아니, 저기… 감독관님.”
“재결합이 머지않았다고 봅니다! 일동 박수!”
당황한 이지운을 철저하게 무시하며, 감독관은 서태천과 이지운 커플이 성공적인 숙려 단계에 접어들었다고 극찬했다.
“자, 그러면 오메가분 그림도 기대가 되는데요. 한번 봅시다.”
감독관이 이번에는 이지운의 스케치북을 펼쳐 허공에 들었다. 사람들이 인상을 찌푸리며 아… 탄식했다.
“저게 뭐야?!”
“그림이 아니라 문자나 기호… 아니야?”
2등신의 졸라맨 그림을 보며, 사람들은 이지운이 서태천을 사람으로도 안 보는 듯하다고 수군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