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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공적인 이혼을 위한 신혼생활-5화 (5/100)

5화

어디 갔어, BBG.

이지운이 두리번거리며 서태천을 찾고 있을 때, 기현진이 다가와 이지운에게 말을 걸었다.

“지운아. 우리 같은 방향이었지?”

“맞아요. 아니… 맞았었… 어….”

근처 동네긴 한데, 강 아래로 이사 왔다. 서태천과 살림을 합친 지 얼마 되지 않아, 이지운은 자기도 모르게 옛 주소를 떠올리고 그렇다고 대답해 버렸다.

“나 회사 주차장에 차 대 놨거든. 내가 태워다 줄게.”

“아, 안 그러셔도 돼요. 괜찮아요.”

저 이제 거기 안 살아요. 라고 했다가는 왜 이사를 했냐, 언제 말없이 거처를 옮겼냐고 질문이 날아올까 봐 걱정됐다. 이지운은 적당히 거절하고 서태천의 차를 얻어타고 가야겠다 싶었다.

“너 하나 태우고 가는 게 뭐 어렵다고. 부담 갖지 말고 타고 가.”

“진짜 괜찮은데….”

기현진이 부드럽게 웃으며 이지운의 어깨에 손을 올렸다. 이지운은 상당히 곤란했다. 아니 근데 이놈의 BBG는 어딜 간 거야?!

“이지운 주임.”

그때 자신을 부르는 소리가 들려 이지운은 고개를 돌렸다. 인도에서 가장 가까운 차선에 서태천이 차를 대고 창문을 내리고 있었다.

“본부장님. 안녕히 들어가십시오!”

“고생 많으셨어요. 잘 들어가세요!”

직원들이 일제히 그에게 인사했다. 서태천은 직원들의 인사를 받아 주더니만, 이지운을 쳐다봤다.

“앗, 그럼 저는 이만 갈게요.”

“왜. 지운아.”

“저… 저 본부장님이랑도 같은 방향이라서요. 선약이 돼 있어요! 죄송합니다!”

이지운은 인파를 헤치고 달렸다. 후다닥 뛰어서 서태천의 차에 오르는 그의 모습을 보고 직원들은 고개를 갸웃했다.

“본부장님이랑 지운 주임이랑 같이 차 타고 가네?”

“어… 그러게. 두 분이 친했던가?”

“이번 체육대회 때 많이 친해졌나? 아, 부럽다. 나도 본부장님이랑 같이 집에 가고 싶어!”

한 여직원이 손을 모으고 글썽거렸다.

“나도! 이번 체육대회 때 말 걸어 보고 싶었는데 실패했단 말이야!”

“나도!”

한편 민혜경 대리는 먼발치에서 이 모든 광경을 목격했다.

기현진 대리는 까고 본부장님 차는 헐레벌떡 뛰어가 얻어탄다라. 뭐지. 설마 내가 의심하는 그런…?!

그녀가 안경테를 만지작거리며 생각에 잠겼다.

***

언제나 그렇듯이 월요일이란 최악의 존재다. 바쁘고 정신이 없으면서도 동시에 지루하고 무료한 기분이 들기도 한다.

무감각하게 엑셀 수식을 두드리며 하품을 연이어 하던 오후 5시, 이지운의 핸드폰이 지잉. 울렸다.

누구지.

이지운은 별생각 없이 핸드폰을 열었다가 아침 드라마 엔딩을 장식하는 인물처럼 충격받은 표정을 짓고 말았다. 왜냐면 드라마 속 주인공과 비슷한 상황에 처했기 때문이다.

이지운 씨. 좀 만나 뵈었으면 해요.

나 태천이 엄마 되는 사람입니다.

“헉.”

이게 말로만 듣던….

<우리 아들과 당장 헤어져>인가?!

이지운의 가슴이 두근거렸다. 당황스럽긴 했지만 솔직하게 말하자면 좀 재미있을 것 같았다. 살다가 언제 이런 일을 당해 보겠는가 싶어서였다.

안녕하세요. 저 오늘 시간 됩니다.

답장을 보내자 곧 다시 문자가 날아왔다.

OO호텔 로비 카페로 와요. 태천이 모르게.

“와… 이거 진짜네.”

이런 장면의 클리셰는 반드시 호텔 커피숍이지, 그렇고말고.

서태천에게 얼핏 듣기는 했다. 어머니와 아버지는 젊어서 헤어지셨고, 여배우 출신인 어머니는 미국에 살고 계시다고.

살짝 검색을 해 보니 유명 인사들이라 쉽게 찾을 수 있었다.

헉. 똑같이 생겼다. 이미지 검색 결과에 나온 서태천의 모친은 치명적이고 선이 뚜렷한 미인상이었는데, 서태천과 이목구비가 판박이였다. 그러니까 사람이 좀 세게 생겼단 뜻이었다.

어떡하지. 나한테 막 모진 말을 하는 게 아닐까?! 무섭기도 하고 기대되기도 하네.

이지운은 서태천에게 오늘 집에 같이 못 갈 것 같다고 메시지를 보낸 다음 6시가 땡 치자마자 퇴근했다. 그러고는 곧장 택시를 타고 OO호텔로 향했다.

로비로 들어가자 세련된 재즈 음악이 흐르는 카페가 나왔다. 이지운은 옷매무새를 가다듬고 침착하게 안으로 발을 디뎠다. 한가운데에 몰라보려야 몰라볼 수 없는, 화려하고도 우아한 미모의 중년 여인이 앉아 있었다.

바로 눈이 마주쳤고, 서태천의 모친이 눈빛을 쏘았다. 이지운은 테이블로 걸어가 꾸벅 인사를 하고 그녀의 맞은편에 앉았다.

“많이 기다리셨죠. 차가 막혀서….”

“이지운 씨. 긴말하지 않겠어요.”

탁. 그녀가 대뜸 테이블에 흰 봉투를 올려놓았다. 이지운은 눈이 튀어나올 만큼 놀랐다.

완전 클리셰다. 진짜 돈 봉투야…!

충격과 함께 가벼운 흥분이 이지운 안에서 끓어올랐다. 평범 이하의 서민으로 살아온 내게도 이런 날이 오는구나. 재벌가의 끈적한 권력 싸움에 휘말려 드는 날이 오고야 말았어.

이지운은 살짝 서태천 어머니의 눈치를 보았다. 그녀는 고고하고도 날이 선 눈빛을 띠고 있었다.

“이 돈 받고,”

“본부장님이랑 헤어지라고요?”

이지운이 뒷말을 받아치자 그녀는 약간 당황한 듯 보였다.

“어? 어. 그렇죠. 우리 아들 옆에서 멀어져서 영영 보지 말아 달란 의미로 주는 거예요.”

와아… 예상했던 대사 그대로야.

이지운은 속으로 감탄하며 멍한 표정을 지었다.

그나저나 이 봉투 안에는 얼마가 들어 있을까?

드라마에서는 한 번도 구체적인 액수를 가르쳐 주지 않았기에, 솔직히 이지운은 액수가 궁금했다.

곁눈질로 자꾸만 봉투를 보며 입술을 축이는 그를 보며 최영희 여사는 단단히 오해를 했다.

안절부절못하는구나. 태천이랑 헤어지라니 아주 하늘이 무너지는 기분이겠지.

최영희 여사는 아들이 통보도 하지 않고 결혼한 사실에 대해 굉장히 화가 난 상황이었다. 다른 것도 아니고 서류를 떼어 보다가 알게 된 아들의 결혼 사실은 그녀에게 적지 않은 충격을 주었다.

서태천이 독신주의자라고 하도 말하고 다녀서 나중에나 살살 구슬려 정략결혼을 시키려 했건만, 뒤로 호박씨를 까고 있을 줄 누가 알았겠는가.

네가 태천이를 구워삶았겠지…! 얼굴이 반반하고 눈매가 새초롬한 게 알파들이 좋아할 상이다. 게다가 집안이 한미하다니 분명 돈을 보고 접근했을 거야. 같은 회사니 손쉬웠겠지.

그녀는 흥신소를 통해 입수한 이지운의 증명사진을 보며 섣부르게 단언했다.

그렇게 하여 그녀는 바쁘기 그지없는 미술관 일까지 제쳐 두고서는 분노에 가득 차 한국까지 날아오게 된 것이었다. 아들과 격이 맞지 않는 오메가를 떼어 내기 위하여.

봉투 속 돈이면 서울에 집 한 채는 무난하게 살 테니 먹고 떨어지려나? 흠.

그녀가 생각에 잠긴 사이였다. 직원이 다가와 주문할 것을 요청해, 최 여사가 간단히 대답했다.

“저는 커피요.”

“뜨거운 것으로 하시겠습니까? 아이스로 드릴까요.”

“어머님. 저희 망고 빙수 먹으면 안 될까요?”

이지운이 갑자기 끼어들었다.

“망고… 빙수?”

최영희 여사가 미간을 찌푸렸다.

이지운은 그녀가 커피를 시킨 순간 그 커피가 제 얼굴에 날아올까 봐 쫄려서 한 말이었다. 커피 세례 역시 드라마의 클리셰를 구성하는 장면이니까.

그런데 최영희 여사의 페이보릿 과일이 바로 망고였다. 심지어 이곳은 여름 시즌 망고 빙수가 아주 유명한 곳이 아니던가. 안 그래도 같이 먹으러 갈 사람이 없었는데, 이번 기회에 먹어?

그녀 안에서 갈등이 일어났다. 아무리 그래도 내 아들과 헤어지라고 종용하는 대상과 망고 빙수를 나누어 먹자니 그림이 이상했다.

하지만 이 호텔 망고 빙수는 진짜 맛있다고 미국까지 소문이 난 상태였다. 한국에 오랜만에 온 것이라 또 언제 올지 알 수 없는 최영희 여사로서는 무척이나 구미가 당겼다.

한참의 갈등 끝에 최영희 여사가 입을 열었다.

“커피 말고 망고 빙수로 주세요.”

“알겠습니다.”

직원이 물러간 후, 이지운은 아까 받은 돈 봉투를 다시 테이블에 올려놓았다.

“이건 돌려 드릴게요.”

“뭐?”

“필요 없어서요.”

클리셰를 뜯고 맛보고 즐긴 걸로 봉투는 값어치를 다 했다. 이지운은 어차피 헤어질 남자의 어머니에게 돈을 받아 봤자 나중에 계산만 골치 아파질 것이라 생각했다. 이혼 감독관이 알게 되면 복잡한 일이 생길지도 모르고.

“그러니까 오늘은 망빙 먹고 집에 가요.”

이지운이 웃자, 최영희 여사는 팔짱을 끼며 이지운을 위아래로 훑었다.

얘 여우인가? 이 돈 가지고는 모자란다는 건지, 아니면 진짜로 태천이를 사랑하기라도 하는 건지?

최영희 여사가 혼란에 빠진 사이 망고 빙수가 서빙되었다. 생망고를 듬뿍 올려 먹음직스러운 비주얼이 인상적이었다. 망고라면 자다가도 벌떡 일어나는 그녀에게는 환상 그 자체였다.

“흠, 먹기 전에 잠깐 사진 찍어도 될까요.”

“그럼요. 저도 찍을 건데요.”

찰칵. 찰칵.

두 사람은 차례로 빙수를 찍은 다음 스푼을 들었다. 그리고 너 나 할 것 없이 빙수를 흡입하기 시작했다.

“으음. 너무 맛있어.”

최영희 여사가 망고의 신선하면서도 달콤한 맛에 감탄했다. 이지운 역시 싱그러운 맛이 혀끝을 스칠 때마다 눈앞에 동남아 바다가 보이는 듯했다.

“한 그릇 더 먹을까?”

“좋아요!”

“여기 망고 빙수 한 그릇 더 주세요.”

“네. 알겠습니다.”

주문을 받는 직원은 약간 당황스러웠다. 아까는 살얼음판을 걷는 분위기였건만 지금은 왜 이렇게 화기애애하지. 분명히 아까 저 아주머니, 저 오메가한테 내 아들과 헤어지라면서 돈 봉투를 쥐여 줬는데 지금은 같이 빙수에 코를 파묻고 있다니…?

사람 일이란 알다가도 알 수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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