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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공적인 이혼을 위한 신혼생활-2화 (2/100)

2화

오류 부부의 아침 풍경은 오늘도 힘찬 기상으로 시작한다. 정확히 말하면 서태천만 벌떡 일어나 냉수로 샤워를 하고 뜀박질을 하러 나가며, 이지운은 5분 간격으로 맞춰 둔 알람과 사투를 벌인 뒤 가까스로 일어난다.

띠리릭. 띠리릭.

이지운이 알람 소리에 눈을 떴을 때, 서태천은 나가고 없는 상황이었다. 심지어 일어나야 하는 마지노선보다 30분이나 늦은 시각이었다.

“으악! 지각이다!”

이지운은 부랴부랴 씻고 옷은 입는 둥 마는 둥 한 다음 쏜살같이 집에서 튀어나왔다.

결국 20분이나 지각하고 팀장에게 된통 혼난 이지운은 핸드폰을 열어 BBG에게 문자 한 통을 보냈다.

인정머리 없으십니다.

저 한 번만 깨워 주시지 그랬어요.

BBG

잠든 사람 붙잡고 깨울 만큼 저 한가하지 않습니다.

“하, 나 참. 말을 해도 꼭 이렇게 한다니까.”

이지운은 절레절레 고개를 젓고 업무 PC를 켰다. 오전 나절 내내 그는 바빴다. 새로 오픈한 지방 리조트의 판촉 상품 개발 건, 홈쇼핑 판매 연계 건 때문에 그를 찾는 전화가 빗발쳤고 메일함에는 새로 고침을 할 때마다 새 메일이 쌓였다.

“하아… 정신없다.”

“지운 주임님, 밥 먹으러 가야지!”

“벌써 12시인가요?”

정신 사납게 일했더니 언제 시간이 간 줄도 몰랐다. 허둥지둥 일어나는 이지운에게 민혜경 대리가 핀잔을 줬다.

“오늘 우리 팀이랑 본부장님 점심 회식이잖아. 설마 그것도 까먹은 것 아니지?”

아차차, 애석한 나의 기억력. 이지운은 이마를 찰싹 쳤다.

“식사들 가시죠.”

때마침 본부장실에서 서태천이 걸어 나왔다. 한여름의 더위 따위 타지 않는다는 듯, 서늘하고 우아한 포스에 여직원들과 오메가 직원들이 얼굴을 붉혔다. 이지운 눈에는 치사하게 혼자 출근한 인간으로 보일 뿐이었지만.

회사 바로 앞에 위치한 고급 한정식집이 오늘의 회식 장소였다. 적당히 구석에 앉으려는 이지운을 박 부장이 한사코 가운데로 끌고 왔다.

“하하. 이 주임, 본부장님 옆에 앉도록 해.”

“제가요?”

“우리 같은 간부급이 옆에 앉아 봤자 일 얘기밖에 안 나오잖아. 본부장님도 젊은 사람 옆에 앉고 싶어 하실 거야.”

“아니… 괜찮,”

이지운은 뭐라 항변할 사이도 없이 억지로 방석에 앉혀졌다. 바로 옆에 앉은 서태천은 아무렇지도 않은 표정이었다.

그런데 대각선 자리에 앉은 민 대리가 호들갑스럽게 박수를 쳤다.

“어머. 두 분 너무 잘 어울리신다. 이게 무슨 일이야.”

그러자 박 부장과 최 팀장, 이하 과장급들이 옳소, 옳소 하며 동조했다.

“그러고 보니 둘 다 미혼에 알파 오메가네요. 잘 어울리는데요?”

“그러니까. 누가 보면 커플인 줄 알겠어요.”

커플은 무슨, 부부입니다만. 빌어먹을 세상이죠.

이지운은 썩은 미소를 지으며 애꿎은 냉수만 들이켰다.

“커플이라뇨. 가당치도 않은 말씀이에요.”

“지운 주임은 본부장님 같은 알파 별로야?”

“아… 그게… 전 그냥 연애나 결혼에 관심이 없어요. 싱글이 최고죠!”

이지운이 활짝 웃으며 말하자, 말없이 있던 서태천이 입을 열었다.

“저도 제 인생에 결혼은 없다는 주의입니다.”

“어, 그래요? 본부장님 독신주의자셨구나.”

민 대리가 의외라는 듯 말했다. 사람들은 왜 결혼을 하지 않냐, 알파 오메가들은 베타에 비해 빨리 결혼하는 편이 아니냐는 둥 오지랖을 시전했다.

“솔로 최고! 솔로가 편하다니까요.”

이지운이 비즈니스 스마일을 만들며 눈앞에 놓인 반찬을 대충 집어 먹으려 할 때였다. 갑자기 서태천이 손을 뻗더니 반찬 접시를 홀랑 빼앗아 갔다.

어, 뭐야. 내 반찬 빼앗아 갔어?

이지운이 미간에 주름을 잡고 서태천을 흘겼다.

서태천이 치운 것은 간장 새우장이었다. 이지운이 못 먹는 갑각류 넘버원, 새우로 만든 요리.

“어… 혹시 저 때문에 새우 치워 주신 거였어요?”

설마 이 인간이 내 알레르기를 알고 있는 건가 싶어 이지운은 조금 놀랐다.

“아니요. 내가 새우가 먹고 싶어서 가져간 겁니다만.”

그럼 그렇지. 이 매정한 인간에게 뭘 기대한 거냐. 이지운은 헛웃음이 났다.

“네네. 어련하시려고요. 맛있게 드시고 만수무강하세요.”

“배고프면 이거 먹든가.”

서태천이 떡갈비가 든 접시를 이지운 앞에 내려놓아 주었다.

“오? 맛있겠다. 이거 내가 제일 좋아하는 건데.”

두 사람이 속닥거리는 모습을 맞은 편의 민 대리는 놓치지 않았다.

저 두 사람 뭐야? 알레르기 있는 음식 못 먹게 배려해 준 건가?

그녀가 의아해하는 사이 식사가 끝났다. 이지운은 자리에서 일어나 쪼르르 제 동기들을 따라나섰다.

“아아나 한잔하자.”

“좋지.”

뒤도 안 돌아보고 사라지는 걸 보면서 본부장님이랑 아무 사이 아닌 것 같기도 하고… 하지만 아까는 너무 친밀해 보였는데?

민 대리의 안경 너머 눈빛이 날카롭게 빛났다.

***

아이스 커피를 쪽쪽 빨며 돌아오는 길. 1팀 사무실 앞에 반가운 얼굴인 기현진 대리가 서 있었다. 이지운은 그를 보자마자 뛰듯이 걸었다.

“어! 기 대리님! 무슨 일이세요.”

그는 한때 이지운의 사수였던 사람으로, 지금은 팀이 다르지만 아직도 친하게 지내는 선배였다. 친절하고 성격 좋은 그를 보자 이지운은 절로 미소가 발사됐다.

“오늘도 귀엽네.”

“빈말이라도 해 주시니 영광입니다, 대리님.”

귀엽단 소리는 절대로 빈말이 아니었다. 이지운의 반짝반짝 빛나는 갈색 눈은 처진 눈꼬리와 어우러져 풋풋한 느낌을 줬고, 살구색으로 물든 뺨과 입술은 웃을 때마다 사랑스러움이 흘러넘쳤다.

“빈말 아닌데.”

“전 평범상이죠. 대리님이 잘생긴 얼굴이시고.”

얜 집에 거울도 없나? 싶었으나 어쨌든 기현진은 찾아온 목적이 따로 있었으므로 빠르게 본론을 꺼냈다.

“오늘 워크숍 기획 회의 있는 거 알지. 내가 3, 4, 5팀 담당자들한테 이야기해 놨거든. 여기 회의실이 제일 크니까 여기서 다 같이 회의하면 어떨까 해서. 괜찮아?”

“아. 맞네요. 당장 내일이니까 최종 점검해야죠.”

이지운이 파티션에 압정으로 꽂아 놓은 서류를 꺼내 들었다.

<세화 호텔 앤 리조트 그룹 하계 워크숍 기획안 –마케팅 전략 본부->

“지금 바로 시작해요.”

이윽고 각 팀 담당자들이 회의실 안에 모였다. 1팀부터 5팀까지 직원들은 테이블에 둘러앉아 일정표를 검토하며 내일의 일정을 살폈다.

아침 일찍 출발해 가평에 위치한 회사 소유 리조트에 도착, 각종 게임으로 조별 대항전을 펼치고 석식으로 바베큐 파티를 하고 오는 것이 주된 내용이었다.

“일단 방 배치를 다시 점검할게. 본부장님만 스위트룸에서 주무시고, 나머지는 1인 1실로 배정했는데 맞게 돼 있는지 확인 좀 해 줘.”

기현진이 이지운에게 종이 한 장을 넘겨주었다. 비록 서태천과 층수가 같지만 방이 따로이니 별걱정은 없겠다 싶었다.

“네. 숙박은 이걸로 된 것 같고요. 여러분, 다음은 대절 버스 건입니다. 대절 버스에 오를 때 랜덤으로 짝꿍을 정하는 것 어떻습니까.”

“오. 완전 랜덤으로요?”

이지운이 신기하다는 듯 묻자 기현진이 친절하게 예시를 들어 주었다.

“이번에 워크숍 참여 인원이 60명입니다. 주임 대리부터 과장님, 차장님들, 또 위로는 부장님이랑 본부장님도 계시고요. 이럴 때 내 옆에 낯선 사람이 앉으면 직급과 세대의 벽을 허물고 소통할 수 있지 않을까 합니다.”

이지운을 포함해 모든 담당자가 찬성을 표했다. 참신한 기획이라고 윗선의 칭찬을 받을 수 있을 듯했다. 내 옆에 앉을 사람이 누가 될지 모른다는 게 다소 함정이긴 했지만, 일단 ‘일’을 하는 입장에서는 그랬다.

“그럼 이걸로 최종 확정 지을게요. 다들 내일 뵙죠.”

“네!”

회사 워크숍이라는 게 딱히 즐거운 MT처럼 여겨지지는 않았지만, 그래도 이지운은 바깥바람을 쐴 수 있는 이번 기회가 소중했다. 이게 바로 유부남 병인가…? 집이 아닌 곳이 너무 좋고 외박하면 너무 행복한 병.

그는 퇴근하자마자 안방 옷장을 열어 자기 옷을 여러 벌 꺼냈다. 트레이닝 복과 후드티를 가지고 패션쇼를 하는 그를 보며 서태천이 한 마디를 툭 던졌다.

“어디 잘 보일 사람이라도 있습니까?”

“네? 그게 무슨 소리죠.”

“아니. 코디에 열심이길래 물어본 거죠.”

“저 독신주의자라니까요. 연애고 결혼이고 딱 질색인데 뭘 잘 보여요.”

이지운이 톡 쏘아붙이자 서태천은 어깨를 으쓱하고 보고 있던 태블릿을 껐다.

“그나저나 짝꿍은 누가 되려나. 말 잘 통하는 사람이었으면 좋겠다. 임원은 싫어.”

이지운이 캐리어를 채우며 중얼거렸다. 서태천은 그런 그를 빤히 보다가 조용히 핸드폰을 들어 어딘가로 문자를 보냈다.

***

워크숍을 위해 준비한 대절 버스가 속속 회사 앞마당으로 들어왔다. 격식 있는 정장을 입었던 평소와 달리 캐주얼 복장을 한 직원들이 삼삼오오 모여 잡담을 나누는 가운데, 총인솔자인 기현진 대리가 블루투스 마이크를 쥐었다.

“여러분. 지금부터 버스 티켓을 나눠드릴 겁니다. 친목 도모 차원에서 완전 랜덤으로 자리를 지정했고요, 차에 타시면 자기 짝꿍이 누구인지 알게 됩니다.”

“와. 재밌겠다.”

“꼰대 걸리면 어떡해. 난 싫다.”

반응이 제각기 나뉜 가운데 사람들은 티켓을 챙겨서 버스에 하나둘씩 올랐다. 이지운도 1호차의 티켓 한 장을 받아들고 차에 탔다. 옆자리는 아직 비어 있었다.

누가 타게 될까. 우리 팀 사람, 아니면 다른 팀 사람? 기왕이면 또래가 좋은데 부장님이 타면 비극이겠다. 아, 상상만 해도 싫어.

한 사람씩 차에 오를 때마다 혹시 저 사람이 내 짝꿍인가, 이지운은 번번이 설레했지만 아쉽게도 그의 짝꿍은 나타나지 않았다. 출발 시간이 불과 5분 남았는데도 혼자 짝꿍이 없자, 이지운은 뭔가 잘못됐다는 생각이 들었다.

출발 인원은 60명 짝수인데 어떻게 나만 짝꿍이 없지? 이상하다.

그렇게 생각하고 있던 찰나, 버스에 셔츠에 슬랙스를 입은 서태천이 등장했다.

“본부장님! 안녕하세요.”

“안녕하십니까.”

사방에서 아부를 섞은 인사 소리가 그를 에워쌌다. 서태천은 그들에게 무뚝뚝한 표정으로 적당히 화답하더니, 대뜸 이지운이 있는 쪽으로 걸어오기 시작했다.

어어. 뭐야. 설마 내 짝꿍은 아니겠지?!

제발 아니어라. 아니기만을 빈다.

이지운이 두 손을 모으고 눈을 꼭 감았다. 서태천은 자연스럽게 그의 옆자리에 앉으며 이지운의 미간을 툭 찔렀다.

“뭘 기도하고 있는 겁니까.”

“아… 아아….”

“왜요. 내가 타니까 싫어요?”

“제가 언제 싫다고 했나요. 이런 우연이 어디 있는지 좀 기막혀했을 뿐이에요.”

구청에서 혼인 신고를 잘못시켜 놓질 않나, 이번에는 버스 옆자리가 당첨되질 않나. 으휴, 지겹다 지겨워.

“버스 출발합니다. 안전 벨트 잘 착용해 주세요!”

버스 기사가 출발을 알렸다. 이지운은 팔짱을 끼고 좌석에 드러누워 심드렁하게 창밖을 봤다.

아, 빨리 가서 쉬고 싶다. 간식도 하나 꺼내 먹고 싶고. 이지운은 어젯밤 캐리어 안에 넣어놓은 쿠키가 몹시 간절했다. 스트레스를 낮추는 데는 당분만 한 게 없으니까.

그때까지 그는 깨닫지 못했다. 캐리어에 쿠키를 넣을 자리를 만들기 위해서 빼뒀다가, 깜박 잊고 다시 집어넣지 않은 물건이 있었다는 것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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