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화
지잉. 이지운의 문자 수신음이 울렸다. 그는 팀원들이 대화 삼매경에 빠져 있는 것을 확인하고 조심스럽게 액정을 봤다.
BBG
6시 반에 지하 2층 주차장 B-1구역으로 와요.
오늘 장보는 날입니다.
아, 맞다. 오늘 같이 장보고 요리한 사진 첨부해서 앱에 입력하는 날이었지. 하마터면 깜빡해서 감점당할 뻔했다.
알았습니다. 5분 정도 텀 두고 내려갈게요.
막 답장을 보낸 순간, 마케팅 본부장실 문이 열리며 비서와 서태천이 나란히 걸어 나왔다.
와, 오늘도 진짜 잘생겼다. 얼굴에서 빛이 나는 것 같아. 아냐, 전신에서 포스가 풍겨. 저렇게 완벽한 알파가 왜 애인이 없지? 결혼한다는 소문도 없고 말이야.
직원들이 저마다 웅성거렸다. 사람들이 주목하고 있는 대상은 다름 아닌 이 회사의 예비 후계자이자, 탁월한 능력으로 31세 나이에 마케팅 본부장 자리를 꿰찬 서태천이었다.
다른 이들보다 머리통 하나 가까이 솟아 있는 장신에 탄탄한 체형. 머리카락과 눈이 새까맣고 눈매와 턱선이 날렵했으며 고고한 느낌을 풍기는 미남자.
창업주의 외동아들이라는 출신 성분도 있지만, 타고난 카리스마와 능력으로 좌중을 휘어잡는 것으로 소문난 그였다.
임원들보다 새파랗게 젊은 그에게 온갖 부장들이 뛰어나와 허리를 굽실댔다. 서태천은 무심한 표정으로 그들의 인사를 받아 주고 빠르게 사무실을 빠져나갔다.
주임 나부랭이인 이지운 역시 그에게 깍듯하게 허리를 숙였다.
“지운 주임님 오메가잖아. 저렇게 멋있는 알파 보면 결혼하고 싶어지지 않아요?”
옆자리 민혜경 대리가 두 손을 꼭 모으고 꿈꾸는 표정으로 물었다.
“아… 저는 아직 결혼 생각이 없어서요. 연애도 결혼도 별 관심 없어요.”
“뭐야. 회사랑 결혼한 남자, 뭐 그런 거예요?”
그녀가 호탕하게 웃으며 이지운의 팔뚝을 때렸다. 이지운은 어색하게 하하 웃으며 슬그머니 자리에 앉았다. 양심이 슬그머니 찔려 왔지만 그래도 이 비밀은 죽는 날까지 묻고 갈 1급 비밀이었다.
사실 아까 문자를 보내온 BBG는 서태천 본부장이다. 정확히 말하자면 약 1달 전 이지운의 가족 관계 증명원에 [배우자]란 타이틀을 달고 느닷없이 나타난 인물, 즉 남편 되시겠다.
둘이 사랑해서 사내 연애하다가 비밀 결혼을 했냐고? 아니면 사정이 있어서 정략결혼을 하고 쉬쉬하는 사이냐고?
애석하게도 둘 다 아니다.
두 사람은, 구청 직원의 착오로 혼인 신고된 ‘오류 부부’다.
***
21세기 초, 자유분방한 연애와 헤어짐을 반복하는 문화로 인해 알파와 오메가의 인구가 급격하게 줄기 시작했다. 위기를 느낀 정부는 형질인들의 결혼을 독려하는 동시에 이혼 절차를 까다롭게 만들었다.
소위 <알파오메가 특별법상 이혼 숙려 제도>가 그것이다.
알파-오메가 부부는 법원에 합의 이혼을 신청한다 해도 베타 부부보다 훨씬 긴 6개월 동안 이혼을 다시 고려해야 한다.
물론 가정 폭력이나 불륜, 배우자의 방임 등에 의한 이혼은 신속하게 처리되었으나, 쌍방 합의 이혼에 있어서만은 그 절차를 까다롭게 개정한 것이다.
법률은 ‘더는 당신을 사랑하지 않아요.’라는 이유만으로는 이혼을 성립하기 어렵게 해 많은 비판을 받았으나, 굳건하고도 끈질기게 이 사회에 뿌리를 내렸다. 그 결과 알파-오메가 부부들은 이혼 한번 하려면 각고의 인내와 노력을 기울여야 하는 신세가 되었다.
또한, 법률은 1. 월 1회 이상의 부부 상담 2. 배우자 관찰일지 작성 3. 국비 지원 여행 체험 등을 의무화하고 있었다.
특히 주목할 점은 이 모든 과정에는 이혼 감독관이 따라붙어 헤어지려는 부부들을 다시 재결합시키기 위해 오만가지 수를 쓴다는 것이었다. 귀하디귀한 형질인자를 지키려면 국가가 직접 발 벗고 나서야 한다는 것이 현 정부의 방침이었다.
“저기요. 저는 서태천 씨랑 전혀 결혼한 적이 없어요. 이 사람하고 말도 제대로 안 섞어 봤다니까요?”
처음 이지운이 자신의 결혼 사실을 알게 된 것은 미혼자 특별 청약 통장을 개설하기 위해 가족 관계 증명원을 떼다가였다.
서태천, 31세, 우성 알파, AB형, 6월 1일생.
“헐.”
엊그제 본부장 생일 기념 회식을 하면서 나이와 생일을 알게 됐기에 의심의 여지가 없었다. 대한민국에 단 1% 존재한다는 우성 알파에다가 이름이 서태천인 사람이 어떻게 둘이겠는가.
충격을 받은 이지운은 당장 서태천을 찾아가 행정 오류가 있으니 바로잡고 혼인 무효 소송을 하자고 했고, 서태천도 당연히 그러자고 했지만 그게 말처럼 쉽지 않았다.
둘이 한 회사에 근무하는 사이이다 보니 ‘모르는 사람이나 다름없는 관계’, ‘결혼할 의사가 전혀 없었음’을 입증하기가 너무도 어려웠던 것이다.
이지운과 서태천은 연일 관공서와 법원을 드나들며 노력을 기울였다.
그러나 소송이란 그리 간단한 것이 아니어서, 아주 긴 시간이 소요될 것이라는 게 서태천 고문 변호사의 조언이었다. 물론 승소만 하면 ‘혼인 기록’ 자체가 소멸되므로 이보다 깔끔한 결말은 없었지만, 그 길까지 가는 여정이 너무나 험난하다는 소리였다.
“아악!”
이지운은 3일 연속 소주를 음료수 대신 마시며 괴로워했고, 서태천도 난감해하긴 마찬가지였다. 그러나 멀쩡한 미혼자가 가짜 배우자라는 혹 덩이를 안고 살 수는 없는 법.
어쩔 수 없이, 둘은 숙려 기간을 거친 합의 이혼을 하기로 뜻을 모으고 살림을 합쳤다. 혼인 기록은 나중에 혼인 무효 소송이 마무리되는 대로 지우기로 하고 말이다.
그리하여 두 사람은 협정 아닌 협정을 맺고 성공적인 이혼이라는 목적지를 향해 함께 노를 젓는 사이가 되었다. 그게 약 한 달 전부터의 이야기다.
먼저 본부장실을 빠져나온 서태천이 발 빠르게 엘리베이터를 탔다. 1호기가 지하 2층까지 내려간 것을 확인하고서, 이지운은 정확히 3분을 셌다.
“이 주임 이제 내려가겠네.”
“그, 그걸 어떻게 아세요?”
“맨날 본부장님 퇴근하고 3분 있다가 일어나잖아. 누가 보면 같이 집에 가는 줄 알겠다.”
민혜경 대리가 가방을 메고 일어나며 장난스럽게 웃었다.
“아… 그, 그게.”
뭐라고 변명하지? 머릿속이 새하얘져 입만 벌리고 있는데 민 대리가 깔깔 웃으며 박수를 쳤다.
“농담이야, 농담. 상사보다 일찍 퇴근하기 눈치 보이니까 그런 거 아냐.”
“아… 하하. 네. 그렇죠. 네. 맞습니다.”
“하여간 사회생활 잘한다니까. 자, 같이 나가요.”
민혜경 대리와 함께 복도로 나온 이지운은 얼렁뚱땅 같은 엘리베이터를 탔다. 문제는 민 대리가 지하 2층 버튼을 눌렀단 점이었다.
“지하 2층… 가세요?”
“차를 거기다 대 놨으니까 그리로 가지. 자기는 지하철?”
“아… 지하… 지하철! 네! 시민의 발 지하철 타고 갑니다!”
“그러고 보니까 원래는 걸어 다녔던 것 같은데, 요새 지하철 타더라?”
이지운은 다시 한번 뜨끔했다. 동거 입증을 위해 서태천의 집에 얹혀살게 되면서 통근 거리가 멀어졌다. 서태천이 태워다 주긴 하는데 사람들 눈에 띌까 봐 몇 정거장 전에 내려 주므로 지하철을 타게 된 것이 최근의 일이었다.
한편 오늘은 무조건 지하 2층으로 가서 서태천과 마트로 이동해야 했다. 이거 어떡하지. 민 대리님 집에 갈 때까지 밖에서 버텨야 하나?
“내가 데려다줄게. 집이 어느 방향이야?”
“아, 아니에요. 저 혼자 갈 수 있습니다.”
“날도 더운데 무슨. 그러지 말고 내 차 타.”
선임의 친절이 눈물겨운 이지운은 10분간 실랑이를 하다가 건물을 빙빙 돌아 서태천의 차를 찾아냈다.
“왜 이렇게 늦었습니까.”
“입이 열 개라도 할 말이 없습니다. 오늘 요리는 제가 할게요.”
손을 싹싹 모아 비는 이지운을 보며, 서태천은 표정 하나 변하지 않고 말했다.
“스테이크 두 장 구우세요. 미디엄으로.”
“아… 네.”
요리는 내 적성이 아닌데, 어쩔 수 없지. 이지운은 마이바흐 조수석에 앉아 클래식을 들으며 한숨을 푹푹 쉬었다. 남들 보기에는 참 팔자 좋은 광경이었다.
***
마트에 도착한 둘은 누가 볼까 두려워 마스크를 끼고 카트를 밀었다. 함께 장을 봤다는 인증을 하기 위해 간단하게 셀카를 찍는데 서태천의 눈매가 너무 경직돼 있었다. 이러면 이혼 감독관이 ‘알파분이 노력을 안 하셨네요. 배우자분과 화목한 시간을 가지도록 최선을 다하셨어야죠.’하고 질책하기 때문에 곤란했다.
“좀 웃으세요, 본부장님.”
“사진 찍으면서 웃어 본 역사가 없습니다.”
무뚝뚝한 답변이 돌아오자 이지운은 질렸다는 듯 고개를 젓고 대강 사진을 찍었다. 사진에서 감점이 있을 테니 요리를 맛깔나게 해 점수를 보전해야지 별수 없었다.
고기와 야채, 시즈닝 파우더를 사고 야무지게 멜론과 체리까지 구입한 다음 두 사람은 마트를 빠져나왔다. 차 뒷좌석에 한 아름 장 본 것을 실은 두 사람은 이내 청담대교를 타고 서태천의 한강 변 아파트에 도착했다.
일평생 보증금 1000짜리 원룸을 넘어본 적 없던 이지운에게는 무지막지하게 파격적으로 호화롭고 넓은 아파트라 동거 한 달째인 지금도 적응이 안 됐다.
“요리하고 있을 테니까 씻으세요.”
“그러죠.”
서태천은 영화에서나 볼 법한 시커먼 실크 가운을 들고 네 개의 욕실 중 하나로 들어갔다. 등빨과 덩치가 좋아 저런 말도 안 되는 가운을 입어도 폼이 났다.
하아. 그럼 오늘도 숙려 일지를 쓰고 요리를 시작해 볼까.
8월 8일 월요일, 남편과 장을 봤다.
남편이 좋아하는 스테이크를 먹으며 그의 취향을 존중할 예정이다.
*** 오늘 발견한 배우자의 장점 적기 : 등이 넓고 검은 가운이 잘 받는다. 이상 끝.
대강 일지를 휘갈겨 쓰고 요리에 전념하고 있으려니까 머리에서 물을 뚝뚝 흘리며 서태천이 등장했다. 피부는 젖어서 번쩍이고 가슴팍이 드러나 부담되는 비주얼이었으나, 그렇다고 해서 옷 입어라, 머리 말려라 잔소리할 이유는 없었기에 둘은 식탁에 마주 앉아 스테이크를 썰기 시작했다.
“맛은 어떠세요?”
“굿.”
서태천은 말수가 지독하게도 없고 무심한 성격이었다. 이지운은 아무리 그래도 앞으로 몇 달 같이 살 사이인데 그가 참 재미없었다. 얼굴하고 몸은 재미있어도 성격이 무뚝뚝하니 진짜로 결혼했다가는 봉변당할 뻔했다는 생각뿐이었다.
“그럼 잘까요.”
“예. 그러죠.”
두 사람은 각기 다른 욕실에서 세수와 양치를 하고 나와 침실로 모였다. 방안에는 은은한 수면등이 켜져 있었고, 아늑한 침구를 깔아 놓은 킹사이즈 베드 하나만이 덜렁 놓여 있었다. 누가 봐도 신혼의 기운이 흐르는 디퓨저 향도 함께였다.
방이 7칸인 초대형 아파트에서 굳이 한 침실 한 침대를 고수하는 이유? 그건 불시에 한 방에 사이좋게 있는 인증 샷을 내놓으라고 요구하는 감독관 때문이었다. 처음에는 각방을 썼는데 감독관이 야간 주말 가리지 않고 셀카 미션을 주는 바람에 울며 겨자 먹기로 한 방, 한 침대를 쓰게 된 지 오늘로 2주 차였다.
“후… 눕죠.”
이지운은 모든 것을 체념한 말투로 말하며 먼저 침대에 누웠다. 이윽고 체중이 좀 나가는 서태천이 옆자리에 눕자 잠자리에는 썰렁한 침묵이 맴돌았다.
“그럼 주무세요, 본부장님. 내일 아침에 저 좀 깨워 주시고요. 혼자 회사 가시면 안 됩니다. 저 내일 빨리 가서 미팅 준비해야 되거든요.”
“봐서요.”
서태천이 대강 대답하며 몸을 뒤척였다. 그 바람에 두 사람의 손이 스쳤다. 이지운은 식겁하며 손을 수습해 가슴 위에 얹었다.
아이고, 놀래라.
나름 한 달째인 가짜 신혼에서 아직도 적응되지 않는 점. 가끔가다가 몸이 닿거나 그의 페로몬 향을 맡게 되는 일이었다. 싸한 숲 향이 코끝을 간질일 때는 손발을 주체하지 못할 만큼 민망하기도 했다.
으으. 알파 냄새는 견디기 힘들다.
이지운이 이를 악물고 눈을 질끈 감았다.
그렇다. 이지운은 바쁘고 박복하게 27년을 살아오느라 연애 한 번 못 해 본 몸이었다.
그런데 이 순결한 내가 유부남이라니…! 이제 이혼남이 될 것이라니…!
하늘도 무심하시지. 흑흑.
“조용히 하고 자죠. 이 주임.”
이지운이 침구를 부스럭거리며 중얼대자, 서태천이 정색하며 돌아누웠다.
“아, 네.”
이지운은 동태 눈깔을 하며 속으로 흥, 하고 비아냥댔다. 너만 싫냐 나도 싫다.
오늘도 이들의 성공적인 이혼을 위한 신혼생활이 저물어간다. 당장 내일 어떤 사건 사고가 터질지도 모르고 단잠을 청하는, 그런 밤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