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부-5. 두근거려요
써니
[숯불 모행???]
[잘거야?언제자?]
[왜 답이업지???]
[자?]
[숯불?]
[숯불?]
[야??]
[어이?]
숯불
[냉장고 청소하고 있었다고 이새끼야]
[문자그만 보내고 가서 놀아]
써니
[노는중이야]
[틈틈이 보내는거랴거 노는중에ㅔ]
[이밤에 무슨냉장고청소를해]
[밤에는 냉장고를쓰지도 안는데]
숯불
[잘거니까 그만보내]
써니
[자지마]
[자지말고기다려]
[자지말고]
[자지를돌돌말곸ㅋㅋㅋㅋㅋㅋㅋ]
[ㅋㅋㅋㅋㅋㅋㅋㅋ]
숯불
[미친]
써니
[숯불나보고싶지안냐??]
[난보고시픈디]
[힝]
재강은 답이 없었다.
명선은 포장마차 옆 길가에 쪼그리고 앉은 채 핸드폰을 붙들고 한참 동안 대답 없는 화면만 들여다봤다.
토요일 여름밤의 종로는 시끌벅적했다. 사방의 포차마다 사람들이 가득 차 바글거렸다.
진짜 자나…….
나는 자기 사우나 청소 다닐 때 맨날 늦게까지 안 자고 기다려 줬는데.
이기적인 놈.
명선은 핸드폰을 끄고 무릎 사이에 얼굴을 파묻었다. 숨을 쉴 때마다 술 냄새가 훅훅 올라왔다.
오랜만에 와글거리는 분위기 속에서 술을 들이부어대는 건 싫지 않았으나, 예전처럼 마냥 그 속에 흠뻑 빠져 놀 수가 없었다.
웃고 떠들면서도 마음은 온통 재강에게 가 있었다.
재강이 뭘 하고 있을지, 혼자 보내는 시간이 어떻게 느껴질지, 재강 역시 자신을 보고 싶어 할지, 그저 궁금했다.
별것 아닌 재강과의 대화가 더 재밌을 것 같고, 재강의 몸과 얼굴을 보고 만지고만 싶었다.
그러다 보니 사람들 사이에서 혼자 붕 떠있는 기분이었다.
“명선이, 뭐 해. 3차 갈 거지?”
얼굴이 벌건 승규가 불쑥 나타나 명선 곁을 지나가며 물었다.
“어…… 형, 어디 가?”
“담배 사러.”
승규는 뒤도 안 보고 편의점 쪽으로 휘적휘적 가 버렸다.
그냥 집에들 좀 가지, 3차는 또 무슨 3차야.
명선은 울적한 얼굴인 채 그 뒷모습을 바라보다 느릿느릿 일어났다.
고작 몇 시간 떨어져 있는 건데, 이게 뭐냐 도대체.
명선은 어깨를 축 늘어뜨리고 일행이 있는 포차 쪽으로 미적대며 가다가 그 근처에서 스르르 방향을 틀었다.
조금씩 휘청대며 걷는 와중에 손은 자연스레 재강에게 전화를 걸고 있었다.
통화 연결음을 들으며 명선은 가로수 곁에 천천히 멈춰 섰다.
가슴이 두근거렸다.
-왜.
재강의 목소리가 들리자 명선은 자기도 모르게 빙그레 웃었다.
“숯부우우우울.”
-…….
자고 있었어?”
-자려고 누워 있었어. 왜.
“나 좀 데리러 올래?”
-뭐?
“너 대리운전하잖아. 내 차로 대리운전 좀 해줘. 나 차 안 갖고 왔으니까 그냥 그거 타고 와서 나를 데려가면 돼. 차 키는 집안 어딘가에 있을 거야.”
-…….
“돈 낼게. 원래 받는 것보다 더 높게 불러도 돼. 갑자기 부른 거니까.”
한동안 말이 없던 재강은 작게 한숨을 쉬는 듯했다.
-어딘데.
명선은 나무에 이마를 기대며 헤벌쭉 웃었다.
* * *
“숯불!”
명선은 조수석 문을 열자마자 안으로 기어들어 가 재강에게 달려들었다. 재강이 얼른 명선을 밀쳐냈다.
“제대로 타. 문 닫고.”
밀린 명선이 기우뚱했다가 열린 문으로 나자빠지려는 순간 재강이 얼른 명선의 팔을 잡고 끌어당겼다.
명선은 다시 재강에게 답싹 붙어 뺨에 입을 맞췄다.
“아이고, 좋아라.”
재강이 주위를 둘러보며 명선을 뜯어냈다.
“제대로 앉으라고.”
“알았어, 알았어.”
명선이 앉아 문을 닫고 주섬주섬 안전벨트를 채우는 동안 재강은 그대로 앉아 기다리다, 명선이 준비가 된 듯 보이자 차를 출발시켰다.
명선은 차 시트에 머리를 기대고 재강의 옆얼굴을 쳐다봤다.
너무 반가워서 감동적일 지경이었다.
“숯불, 자고 있었어?”
“자려고 누웠다가 네 전화 받고 나온 거잖아.”
“나 보고 싶었지?”
“취했으면 곱게 자라.”
“보고 싶었잖아아앙. 나는 보고 싶었는데에엥.”
“전화를 받지 말걸 그랬어.”
재강이 낮게 중얼거렸다.
명선은 킥킥 웃으며 손을 뻗어 재강의 뺨을 쓰다듬었다.
재강은 반사적으로 고개를 살짝 기울이긴 했지만, 어느 정도는 허용을 해주는 듯했다.
명선은 재강의 얼굴과 귀, 머리카락을 살살 만지작대고 어깨와 팔도 어루만졌다.
어수선했던 마음이 금세 안정되고, 풍요로워지는 기분이었다.
“진짜 보고 싶더라.”
“…….”
“몇 시간 떨어져 있었던 거지? 널 데려갈 걸 그랬나 봐.”
“생판 모르는 사람 생일 파티에 내가 왜 가.”
“내 파트너로 해서 가면 되지. 애인 새로 사귀면 친구들한테 인사할 겸 그런 데 데리고 나가기도 하고 그러잖아.”
재강이 눈살을 찌푸린 채 명선을 힐끗 쳐다봤다.
“왜 또 쉬어 빠진 소리야, 애인은 뭔 애인.”
“내 몸과 네 몸이 한창 연애 중인 거라니까. 여보 자기 하면서.”
“취했으면 자랬지.”
명선의 심장이 점점 빠르게 뛰기 시작했다.
“근데 야, 생각해 봐. 우리 너무 잘 맞는 것 같지 않냐? 몸이 잘 맞으면 다른 건 볼 필요도 없어. 알지? 우리가 몸은 되게 잘 맞잖아.”
“…….”
“와, 정말 그러네. 야, 우리 사귀어 봐야 되는 거 아니야? 갑자기 그런 생각이 빡 드는데? 이제까지 왜 그 생각을 못 했지? 어차피 너도 솔로고 나도 솔로잖아. 생각해 봐. 솔로랑 솔로가 만났는데, 몸이 잘 맞아. 그냥 시범적으로 한번…….”
재강이 갑자기 길가에 차를 세우자 명선이 입을 다물고 주변을 둘러봤다.
“잠깐 있어 봐.”
재강은 문을 열고 나가 편의점으로 들어갔다.
명선은 환하게 빛나는 편의점과 빈 운전석을 차례차례 멍하니 바라보다 얼굴을 일그러뜨렸다. 갑자기 머리에서 피가 식는 듯했다.
씨발, 권명선, 뭐 하는 거야. 뭐라고 지껄이는 거야.
돌았냐! 입을 다물어!
명선은 시트에 뒤통수를 퍽퍽 찧다가 입을 몇 번 내리쳤다.
이놈의 주둥이. 이놈의 주둥이. 예쁘기만 하지 실속은 없는 주둥이.
재강이 편의점에서 나오자 명선은 얼른 머리를 정리하고 앞쪽 창을 내다봤다.
운전석에 올라탄 재강은 명선의 허벅지 위로 생수 한 병을 던졌다.
“마시고 자. 운전하는데 시끄럽게 굴지 말고.”
재강은 다른 손에 반쯤 빈 생수병을 든 채였다.
안전벨트를 맨 재강은 잠시 핸들을 쥐고 있다 생수병 뚜껑을 열어 끝까지 마시더니 빈 병을 뒤쪽으로 던진 후 차를 출발시켰다.
명선은 차가운 생수병을 만지작대며 아래를 내려다봤다.
그럼…… 네 대답은 뭔데?
그게 네 대답이야? 그냥 무시하는 거?
내가 헛소리를 많이 하니까, 이것도 그냥 헛소리 중 하나라고 생각해 버리고 마는 거?
야, 나는 너 대신 교도소는 못 가도 매일 면회는 갈 수 있어.
아니면 아예 둘이 같이 멀리 도망가 버리든지.
나라면 그렇게 해서 계속 같이 있을 수 있는 방법을 찾아볼 거야.
이준원이야 널 교도소에 처박아 놓고 지 맘대로 밖에서 즐겁게 살겠지. 걘 면회도 잘 안 올걸?
너도 알지? 안 그래?
그러면서도 걔가 그렇게 좋아?
“아…… 존나 취하네.”
명선이 중얼거리며 길게 기대앉았다.
“나 취해가지고 아까 내 친구한테 딥 키스할 뻔했다니까. 취하면 감정이 막 업되잖아. 이상해지고. 그렇지 않아? 난 그렇거든. 그게 되게 심해. 이상한 말도 막 하고 이상한 짓도 막 하고. 아, 큰일 날 뻔했네, 진짜. 내 친구 토하려 그러고 막.”
명선은 없던 일을 지어내며 과장되게 낄낄거렸다.
재강은 말없이 앞만 보고 운전했다.
“아, 그럼 얼마 주면 돼? 대리 한 번 뛰면 얼마 받아?”
“……됐어.”
“어? 왜? 아까 불러내면서 준다고 했잖아.”
“……친구 데려다주는 셈 치지, 뭐.”
친구.
“우워, 나를 친구로 생각해 주는 거야? 이렇게 영광스러울 데가?”
“…….”
“친구야. 몸이 예쁜 내 친구.”
“자라, 좀.”
친구라니.
명선은 재강의 옆얼굴을 보며 그의 어깨를 만지작거렸다.
섹파라고 불러주는 게 더 나았으려나.
친구나 섹파나 그게 그건가?
“……나 키스하고 싶어.”
명선이 재강의 귀를 어루만지며 나직이 말했다.
재강의 목울대가 작게 꿀럭거렸다.
“집에 가서 해.”
“지금 당장 하고 싶은데. 원래 취하면 평소보다 더 키스하고 싶고 그러지 않아?”
“…….”
“거기서 술 마시자마자 나는 네 생각밖에 안 났어. 키스하고 싶고 가슴 빨고 싶고 만지고 싶고. 지금 늦어서 사람도 거의 없잖아. 저쪽에 잠깐 세워 놓고 후딱 하자. 키스만 할게, 응?”
“…….”
“아잉, 숯부우우울.”
명선이 재강의 어깨에 이마를 비벼대자 재강이 밀쳐냈다.
“운전하는데, 씨발.”
“키스해 줘. 키스하자.”
질척이는 명선을 밀어내느라 바빠 보이던 재강은 어느새 한적한 길가에 차를 세웠다.
“네가 최고야.”
명선이 배시시 웃으며 재강의 얼굴을 감싸 잡았다.
둘은 곧장 얼굴을 바싹 붙이고 서로의 입술을 세게 빨았다.
혼자 있을 땐 내 생각을 했을까, 이준원 생각을 했을까.
명선은 재강의 목덜미와 어깨, 가슴을 꽉 쥐거나 다급하게 쓰다듬기도 했다.
재강의 손이 허벅지로 와 닿자 명선은 작게 신음했다.
재강은 명선의 허벅지를 한 번 움켜잡았다가 손가락을 넓게 펼쳐 어루만졌다.
더 안쪽으로 들어와 만져 줬으면 싶었지만 재강은 오히려 무릎 쪽으로 손을 쓸어내렸다.
“네 거 너무 빨고 싶어.”
입술을 살짝 떼고 명선이 속삭였다.
재강은 명선의 입술과 풀린 눈을 차례로 들여다봤다.
“나는 지금 당장 하고 싶은데, 너는 이런 데서 하는 거 불편하지? 그러니까 안 할게. 집에 가자마자 빨아 줄게. 너 쌀 때까지.”
“…….”
“내 얼굴이랑, 몸에 뿌려 줘. 해줄래? 해줄 거지?”
“…….”
명선이 다시 달려들고, 둘은 혀를 뒤섞으며 맹렬하게 키스했다.
명선이 재강의 바지 앞섶에 손을 갖다 대자 움찔했던 재강은 그 손을 꽉 잡았다가 간신히 치웠다.
“일단, 집에…….”
입술을 뗀 재강이 살짝 헐떡이며 웅얼거렸다.
“알았어, 알았어. 여기선 키스만 한댔으니까.”
명선은 이글거리는 눈으로 재강의 얼굴을 응시하며 천천히 몸을 젖혀 의자에 기댔다.
재강이 다시 차를 출발시키고 운전하는 동안 명선은 재강의 몸을 계속 바라봤다.
고백 같지도 않은 고백을 해버렸네.
그나마도 완전히 무시당하고. 진짜 한심하다.
정말, 자업자득인가…….
명선의 시선이 느껴질 텐데도 재강은 아무 말도 제지도 없이, 조용히 운전만 했다.
* * *
잠결에 무언가 가슴 위로 살며시 와 닿는 게 느껴졌다. 익숙한 촉감, 온도, 무게.
크고 단단한 재강의 손.
그 손이 잠시 그대로 있다가 살짝 흔들었다.
“야, 가든.”
명선은 끙 소리를 내며 이마를 찡그렸다.
재강이 다시 명선의 가슴을 흔들었다.
“야, 너 출근…… 할 거야?”
명선이 억지로 눈을 떴다.
침대 위로 몸을 기울인 채 들여다보는 재강의 얼굴이 보였다.
방 안은 어둑하고, 밖에서 엷게 빗소리가 났다.
명선은 눈을 끔뻑대다 배시시 웃으며 가슴에 올라와 있는 재강의 손을 잡았다.
“안녕, 숯불…….”
그 손에서 팔, 어깨로 쓸어 올려 목덜미를 잡고 끌어당기자 재강이 풀썩 엎어졌다.
명선은 두 팔과 다리를 이용해 재강의 몸을 얼른 포박했다.
긴장하는가 싶던 재강은 곧 잠잠해지며 몸에 힘을 뺐다.
명선은 한껏 행복한 기분으로 눈을 감은 채 재강의 등을 쓰다듬었다.
안녕, 숯불.
자는 동안 보고 싶었어.
아침에 깨서 볼 수 있는 게 제일 좋아. 이렇게 순순히 안겨 오면 더 좋고.
“밖에 비 오나 보네?”
“어.”
“비 오는 아침에 이러고 있으니까 아늑하다, 그치?”
“……출근할 거냐고.”
“몇 신데?”
“9시 넘었어.”
“으.”
명선이 몸을 뒤틀며 재강의 등을 쥐어짰다.
“피곤하면 부모님한테 말씀드리고 쉬든지 해. 그냥 자게 둘까 하다가 혹시 몰라서 깨워 본 거야.”
“출근해야지, 왜 안 해. 너랑 같이 가야지.”
“술 먹고 늦게 잤잖아, 어제.”
문득 어젯밤 일이 떠오르자 명선은 미간을 살짝 찌푸렸다.
너무 보고 싶어 못 참고 대리운전을 해달라고 불러 놓고는, 말도 안 되는 고백을 했다.
그러고는 집에 와서 섹스하고 거의 새벽에 잠들었다.
내가 했던 말을 아직 기억하고 있으려나?
신경을 쓰기나 하려나?
……신경 쓰는 게 좋은 건지, 그냥 잊어 주는 게 좋은 건지 모르겠네.
“숯불, 넌 안 피곤해?”
“그냥 그래.”
“음…… 미안해. 어제 내가 안 불러냈으면 더 오래 잤을 텐데.”
“어차피 너 있어야 잘 잤을 텐데, 뭐.”
“…….”
재강은 늘 그렇듯 무심하게 한 말이었겠지만, 명선은 문득 가슴이 벅차오르는 듯했다.
저 말이 왜 이렇게 다정하게 느껴지지?
정말로, 사귀는 사이 같잖아.
이준원의 존재만 아니었으면 완벽했을 텐데.
……아, 이준원! 꺼져!
“암튼 출근할 거면, 일어나.”
재강이 몸을 일으키려 하자 명선은 팔다리에 힘을 줘 매달렸다.
“아, 좀만 더 이러고 있자. 비도 오는데.”
“늦는다고.”
“1분만, 1분만.”
재강은 짧게 한숨을 쉬고 다시 몸에 힘을 뺐다.
“착하네, 숯불.”
명선이 히히 웃으며 재강의 엉덩이를 두들겼다.
“……속은, 괜찮냐?”
“막 숙취 심하고 그런 건 아닌데…… 근데 나 오이 먹고 싶다.”
“알았어.”
* * *
둘이 나올 때쯤엔 비가 그쳐 있었다.
명선은 종이컵을 든 채 조수석에 올랐다. 컵 안에는 재강이 잘라 담아 준 오이 스틱이 들어 있었다.
재강이 운전석에 올라 시동을 걸었다.
명선은 재강이 운전하는 동안 편하게 기대앉아 오이를 우적우적 씹었다.
“역시 해장엔 오이지. 이제 술 먹은 다음 날에 오이를 안 먹으면 너무 허전해. 뭔가 완성되지 않은 느낌이야.”
명선이 오이 하나를 내밀자 재강은 말없이 받아먹었다.
명선은 재강이 씹을 때마다 귀 아래쪽의 근육이 울룩불룩 움직이는 모습을 바라봤다.
턱 근육도 예뻐.
구석구석 안 예쁜 곳이 없네.
명선이 홀린 듯 그곳에 손끝을 댔다. 재강은 멈칫하며 눈만 움직여 명선을 힐끗 봤다가 마저 씹었다.
재강이 손을 쳐내지 않고 가만히 있는 게 좋았다.
명선은 그렇게 턱 근육의 움직임을 느끼다 재강이 오이를 다 씹어 삼키자 손을 뗐다.
“어제 데리러 와 줘서 고마워. 갑자기 부른 거였는데.”
“고맙긴.”
“근데 정말…… 언제 내 친구들 만날 때 같이 가 볼래? 그냥 요새 나랑 제일 친한 형이라고 소개하면 되잖아. 사실이기도 하고.”
“…….”
“사람들이랑 어울려서 나쁠 것도 없고, 어차피 너도 술 좋아하고.”
“……됐어. 거길 내가 왜 가.”
“그럼 계속 같이 있을 수 있으니까.”
명선이 히죽대며 재강 쪽으로 몸을 기울였다.
“떨어져.”
재강이 파리 쫓듯 손짓했다. 명선은 도로 몸을 제 위치시키고 입을 비죽댔다.
“너는 빈말하는 법 좀 배워야 돼.”
“너나 헛소리 그만하는 법 좀 배워.”
“사람이 가끔은 기분 좋으라고 한마디씩 던질 줄도 알아야지.”
“헛소린 거 뻔히 아는데 뭐가 기분이 좋아? 말에 진심이 있기는 하냐?”
“무슨 소리야, 내 말의 50은 진심이고 50은 하얀 거짓말인데. 즉, 내가 하는 말을 듣는 사람은 진심을 듣거나 기분이 좋아지거나 둘 중 하나라는 얘기지.”
“난 거기에 포함 안 되니까 좀 닥쳐.”
“너는 빈말하는 법 말고, 빈말 듣는 법을 배워야겠다. 조신하게 좀 받아들이고 기분 좋아할 줄 아는 법.”
명선은 입 안에 오이를 쑤셔 넣고 재강에게도 내밀었다. 재강이 오이를 받아먹었다.
“혹시 내 친구들 앞에서 반말 듣는 게 껄끄러울까 봐 그래?”
“……뭐?”
“너 나보다 세 살 많은데 내가 너한테 형이라고 안 부르잖아. 근데 내 친구들 앞에서도 그러면 네가…… 아, 그러고 보니, 평소 그렇게 꼰대 같으면서 내가 기어오르는 건 어떻게 견뎠대?”
“됐어. 부르던 대로 불러.”
“왜? 생일 몇 개월만 빨라도 형 소리 듣고 싶어 하는 사람도 있는데.”
“그거 다 정신 나간 놈들이야.”
명선이 킥 웃으며 다시 오이 스틱을 재강의 입 안에 넣어 주었다.
“형. 왜? 형은 형 소리 듣기 싫어?”
“그냥 부르던 대로 부르라고.”
“형, 왜 갑자기 예민하게 굴어, 형?”
재강이 오만상을 찡그리고 명선을 흘겨봤다. 명선이 키득거렸다.
“형아는 ‘너’라고 하거나 ‘이 새끼야’라고 하는 게 더 듣기 좋은가 보다. 약간 마조 성향이 있나?”
“너 가든 사람들 앞에서 계속 형, 형 거리고 질척댈 때도 재수 없어. 적당히 해.”
“내 애정 표현이야. 형아가 너무 좋아서 그래.”
재강은 오이를 질겅질겅 씹으며 한숨만 쉬었다.
명선은 다시 재강의 턱 근육을 만지며 그 옆얼굴을 흐뭇하게 바라봤다.
* * *
그날 명선은 일하는 동안, 유난히 재강을 더 자주 불러댔다. 주위에서 들리도록 크게.
“형! 덥지?”
“형아! 이거 마셔!”
“형! 땀 닦아 줄까?”
“형! 밥 먹어!”
“형아는 내 옆자리. 소주 완비.”
“형아!”
“혀어엉!”
주변에 직원들이 있으면 재강은 애써 어색한 미소를 지었고, 틈틈이 명선에게 눈으로 욕을 날렸다.
그 반응이 즐거워, 명선은 아랑곳하지 않고 끊임없이 지분댔다.
“너 일부러 그랬지.”
명선의 차 조수석에 올라탄 재강이 피곤한 얼굴인 채 말했다.
“애정 표현이라니까, 형. 왜 그래. 왜 내 애정을 자꾸 거부해.”
명선은 키득대며 시동을 걸었다.
“너 진짜 사람 진 빼는 데 뭐 있는 것 같다.”
“정액 빼는 데도 뭐 있는 것 같고, 그치?”
“…….”
“오늘도 기대해. 쪽쪽 빨아먹어 줄 테니까.”
재강은 한숨만 쉬었다.
“숯불, 근데 좀 있으면 휴가잖아. 그때 뭐 할 거야?”
“그냥 쉬겠지.”
“어디 놀러 가고 싶지 않아?”
“딱히.”
“같이 제주도 갈래? 아니면 호주?”
재강이 황당하다는 얼굴로 명선을 쳐다봤다.
“뭐?”
“제주도에서 우리 누나가 게스트 하우스 하거든. 거기 가면 숙박은 공짜야.”
“…….”
“호주에 우리 형 사는데, 형 집에서 자도 되고.”
“야, 뭔 쉰 소리야, 또.”
“왜? 숙박비 아끼면 좋은 거 아닌가? 그 돈으로 맛있는 거 사 먹고.”
“나를 왜 네 가족들이랑 엮냐고. 갈 거면 너 혼자 가.”
“같이 있고 싶으니까 그러지. 아휴, 알았어. 그럼 딴 데 찾아보면 되잖아. 꼬장꼬장하기는.”
같이 가면 비행기 티켓은 내가 사 주려고 했는데.
암튼 숯불, 굴러들어온 복도 걷어차고…… 바보.
“그럼 어디 갈까? 너 산이 좋아, 바다가 좋아? 아니면 워터 파크?”
“됐어. 너희 부모님이랑 놀아.”
“나 그럴 나이는 지났어.”
“아, 그러냐? 몰랐네.”
재강이 코웃음을 쳤다.
“꼰대질 그만하고, 휴가 어디로 가고 싶은지 생각 좀 해봐.”
“내가 휴가는 무슨…….”
“무슨 소리야, 너도 그간 힘들게 일했는데 시원한 데서 좀 즐겨야지. 맛있는 것도 먹고, 좋은 것도 보고, 밤에는 새로운 공간에서 새롭게 섹스도 하고, 내 옆에서 꿀잠도 자고. 네가 그 정도의 즐거움은 누릴 자격이 있지 않냐? 어? 사람이 이렇게 성실하게, 어? 땀 뻘뻘 흘리면서 노동을 했는데 말이야.”
“…….”
재강은 입을 다물고 앞쪽만 바라봤다.
명선이 그런 재강을 힐끔거렸다.
살살 넘어오나? 섹스랑 꿀잠을 미끼로 걸어도 안 넘어오면 어려워지는데.
“너는…….”
재강은 한참 만에야 입을 열었다.
“뭐 하고 싶은데.”
예스!
명선은 속으로 환호하며 함박웃음이 터져 나오려는 얼굴을 간신히 진정시켰다.
“내 일 순위는 너야. 네가 원하는 거. 네가 하고 싶은 거 하자. 네가 가고 싶은 곳으로 가서.”
“됐어, 나는…… 네가 하고 싶은 거 해.”
“어, 왜? 특별히 원하는 게 없어?”
“난 네가 하고 싶은 걸 하는 것도 좋아.”
“…….”
명선의 미간이 살짝 떨렸다.
재강이 이럴 때마다 가슴속 어딘가가 사르르 녹아내리는 듯한 기분이 들었다. 달콤한 것 같기도 하고 쓴 것 같기도 한 무언가가.
명선은 얼마간 말없이 운전하다 살짝 미소를 띤 채 입을 열었다.
“너는 가끔 말을 참 예쁘게도 한다.”
재강은 앞 유리 너머를 바라보다 머리를 문질렀다.
“……근데 제주도랑 호주는 빼고.”
명선이 킥킥 웃었다.
“알았어.”
우리 귀염둥이 숯불이랑 처음 가는 휴가인데.
어디에 데려가서 뭘 먹일까.
이준원이랑 해보지 않은 걸 하면 더 좋겠지?
둘이 제대로 된 휴가라도 다녀온 적이 있을지는 모르겠지만.
그래, 이준원이 그런 걸 챙겼을 리가 없어. 휴가라기보다는, 자기 꼴릴 때 이리저리 끌고 다니면서 부려먹었겠지.
그따위로 했으니까 숯불 얘가 휴가를 제대로 즐겨보겠다는 생각도 못 하는 사람이 된 거 아냐.
이게 다 너 때문이야, 이준원, 이 새끼야.
이준원! 꺼져!
아…… 섹스를 대비해서 작스트랩을 하나 더 사 놓을까, 이번엔 좀 야한 색깔로…….
명선의 머릿속이 바빠지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