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87화 (87/88)

87.

우리가 준비를 마치는 동안 링 뒤에는 카메라와 마이크가 설치됐다. 녹음 장비가 돌아가고, 스태프들이 숨죽여 지켜보는 상황이 멋쩍었다.

최수호는 늘 이런 기분일까.

관중들이 쳐다보는 것하고는 또 다르다. 최수호가 촬영하는 걸 구경할 땐 이렇게까지 카메라가 다가오는 줄 몰랐는데, 이건 생각보다 가까웠다.

“넌 이 앞에서 어떻게 연기를 하냐.”

집중이 되는 게 신기했다. 나라면 수십 명이 달라붙어서 내가 하는 것만 보고 있으면 물도 제대로 못 마실 것 같은데.

“시합에서 집중하면 주변 소리도 잘 안 들릴 때 있지 않아?”

“어, 있어.”

“나도 그래.”

최수호가 내게 마우스피스를 건네주었다.

이것까지 끼우고 나면 스파링의 시작이었다. 신호를 주는 관장님은 없었지만 내가 리드하면 그만이었다.

놀란 건 최수호가 내 신호를 잘 따라온다는 점이었다.

영화 준비 기간 동안 복싱을 배웠다는 건 안다. 하지만 그 짧은 시간 동안 이렇게까지 늘었을 건 예상 못 했다. 정신 똑바로 차리고 치라던 내 말을 최수호는 아주 성실이 이행했다.

비록 몇 년 전 일이라고는 해도 세계 챔피언을 아마추어가 상대하는 게 쉬울 리 없다. 겨우 피하거나 견제하는 정도라 할지라도 최수호는 그걸 해내는 중이었다.

대단한 집중력이었다.

스텝 밟으면서 거리 견제 정도나 할 줄 알았더니 최수호는 더킹, 즉 상체를 숙여 직선 공격을 피한 후 반격하는 기술을 던졌다. 숙련자 입장에서는 대단히 기특한 반격기였다.

최수호는 끊임없이 맞고 피하고 기술을 연결해 스파링을 이어 갔다. 체육관에서 회원들하고 스파링했다면 승산이 있었을지도. 그저 촬영을 위해 다시 입문한 초보인데도 말이다.

형이나 관장님이 이 자리에 서서 우리 스파링을 보고 있었더라면 최수호한테 손뼉이라도 쳐 줬을 거다. 천 관장님 입에서 복싱하라는 권유가 나왔어도 놀랍지 않겠다.

견제용 잽을 몇 번 던져 보면서 알았다. 최수호가 나하고 이렇게까지 싸울 수 있는 건 ‘나한테’ 집중하고 있어서다.

아주 어릴 때부터 내가 복싱하는 걸 보면서 자란 최수호는 내가 싸우는 방식에 관해서 누구보다 잘 알았다.

최수호는 내 다음 기술을 읽을 줄 알았다. 내가 어디로, 무슨 펀치를 날리고, 어떻게 피할지. 자기 몸처럼 읽어 냈다.

훅을 던지는 순간, 아니다. 던지기 직전, 벌써 위빙으로 피할 준비를 하고 있다. 공격을 예상하니까 가능한 거다.

순간적인 전율이 뒷덜미를 쓸고 지나갔다.

말 그대로 몸으로 와 닿는 고백이었다. 스파링을 고백으로 느낀다니 누가 들으면 혀를 내두르겠지만.

근육이 긴장하고 심장이 두근거린다. 입이 타서 연신 마른침이 넘어갔다. 최수호는 앞에서 나를 똑바로 보고 있다.

벌써 헤드기어 밑으로 땀이 송골송골 맺힌 게 눈에 들어온다. 숨소리와 링을 밟는 소리, 공기가 펀치에 얻어맞는 소리가 연달아 들렸다.

최수호의 상의가 그새 땀으로 흠뻑 젖은 걸 보고 정신이 들었다. 스파링에 집중한 나머지 이게 촬영이라는 걸 잊었다. 더 끌다간 남은 촬영은 하지도 못하고 드러눕겠다.

끝낼 생각으로 다가섰다. 최수호가 이기게 해 줘야 하나 싶었지만, 원래 하던 스파링대로 하기로 했으니까 빠르게 제압해 끝내면 될 거다.

최수호는 다시 나를 놀라게 했다.

최수호의 파이팅 스타일은 단연 아웃복싱에 가까우리라 생각했다. 스파링 초반에 보이던 것들, 치고 빠지기를 반복하는 것만 봐도 그랬다.

그러나 갑자기 안으로 파고드는 동작은 허를 찌르기 충분했다. 바로 던져지는 훅도.

온 체중을 실어 오는 훅은 제대로만 맞으면 바로 상대를 뻗어 버리게 할 수도 있다. 날아오는 주먹을 피하려 상체를 틀었다가 바로 보디 블로를 친 건 본능이었다.

세게 쳤다고 생각하지 않았는데, 최수호가 크게 비틀거렸다.

그 순간부터 다른 건 보이지 않았다.

나는 자세를 풀고 비틀거리는 최수호를 반사적으로 받쳐 안았다. 생각할 겨를조차 없이 몸이 먼저 반응했다.

수백, 수천 번 샌드백을 쳐 본 팔이 자연스레 뻗어 나가고 발이 저절로 움직이는 것처럼. 최수호를 붙잡는 일도 그랬다.

“와…….”

최수호가 중얼거렸다.

젖은 속눈썹이 최수호의 눈동자를 반쯤 덮는다. 이번에도 최수호는 눈이 부신 것처럼 가느스름한 눈으로 나를 바라보았다.

최수호의 얼굴이 아주 가까운 곳에 있었다. 거칠어진 호흡이 빠르게 오갔다.

뜨거운 숨이 목덜미를 간지럽힌다. 안 그래도 땀이 배어 나오던 목덜미가 뜨끈해졌다.

“보는 사람만 없었어도 키스했을 거야.”

진짜. 시청 중인 드라마에서 나왔어도 몸서리쳤을 이딴 말이 왜 최수호 입에서만 나오면 심장을 다 녹여 버릴 것 같은지.

아무래도 최수호보다 내가 문제인 것 같다. 지금 녹다운당한 건 최수호가 아니라 나인 것 같았다.

어쩌면 지금이 아니라 전부터, 계속.

“컷.”

황 감독님의 외침이 링 뒤에서 들려왔다.

“컷 안 하면 계속 그러고 있을 것 같길래.”

뒤를 돌아보자 황 감독님이 특유의 유들유들한 표정으로 윙크했다.

“아니거든요.”

주변에 다른 사람들이 잔뜩 있는 게 이제야 다시 눈에 들어왔다. 내가 최수호하고 얼싸안고 소곤대는 걸 이 많은 사람이 다 봤다니.

급하게 최수호를 놓아주자 최수호가 링의 주 기둥에 기댔다.

“이야, 둘 다 잘하더라.”

황 감독님은 마구 칭찬을 날렸지만 최수호한테는 안 들리는 듯했다. 나는 글러브를 벗고 최수호의 헤드기어를 벗겨 주었다.

“괜찮냐?”

내 물음에 최수호가 촉촉한 눈을 깜빡였다. 미친 새끼가 또 섹시하려고 그러네.

늘어진 최수호를 앞에 두고 보호구를 벗겼다. 보호대를 벗기니 땀에 푹 젖은 운동복이 상체 형태를 다 드러내며 달라붙어 묘했다.

몸을 가까이 숙여서 보호구를 벗겨 줄 때마다 날 쳐다보는 최수호는 더 묘했다. 최수호의 입술이 소리 없이 벌어졌다.

입 모양이 무언가 글자를 만들면서 움직인다. 아마도…… ‘좋아해.’

똑바로 서기나 하라는 뜻으로 가슴팍을 치자 최수호가 목을 울리며 웃었다. 웃을 일도 많다.

“두 사람 다 수고했어. 그냥 찍어 본 건데 그림 되게 잘 나왔네.”

카메라를 들여다보면서 황 감독님은 뭔가 신난 기색이었다. 최수호는 땀에 절었는데 뭐가 그렇게 좋으신지.

“수호 씨, 이젠 집중해서 촬영할 수 있을 것 같지?”

미끼 상품이었냐고. 왜 갑자기 스파링을 시키나 했더니 최수호 정신 차리라고 환기한 거였나.

“……잠깐 숨만 고르고요.”

집중력은 되찾았으나 체력은 잃은 최수호가 고개를 저었다.

그때 호텔에서는 아주 지칠 줄을 모르더니만, 까지 생각하고 이를 깍, 깨물었다. 옮았나. 사람도 많은 데서 내가 무슨 생각을.

내 고충을 알 리 없는 최수호는 다시 교복으로 갈아입으러 들어가면서도 나한테 입 모양으로 무슨 신호를 보내기 바빴다. 기꺼이 무시해 주었다.

남은 촬영은 원활했다. 지원 누나와 함께 체육관으로 돌아온 형은 황 감독님한테 언제 끝나냐고 묻더니 사무실로 쏙 들어가 버렸고, 지원 누나는 나하고 함께 지나가는 체육관 회원 역할을 성실히 수행했다.

배경으로나마 내가 등장할 부분은 많지 않아서 지원 누나가 사 온 간식이나 먹으면서 시간 보내는 게 대부분이었다. 막판엔 둘러앉아서 황 감독님이 산 분식도 먹었다. 최수호가 촬영 중에 교복을 입어서 그런가, 고등학생이라도 된 기분이었다.

최수호가 오늘치 촬영이 다 끝났다는 얘기를 들었을 땐 이미 7시가 넘어가고 있었다. 황 감독님이나 남은 사람들은 할 게 남은 눈치라, 업무를 마친 톱스타하고 귀가할 행운아는 나뿐이었다.

“분명 다른 일 하다가 나오는 건데 왜 하교하는 기분이 드냐.”

역시 최수호 교복 때문에? 지금은 평상복 차림인데도 딱 시험 마치고 최수호랑 집에 가던 그 느낌이다.

하늘에서는 뉘엿뉘엿 해가 저물었고 몇 년째 엇비슷한 풍경인 우리 동네는 평화로웠다.

“나도. 졸업식 하기 전 같다.”

“진짜? 너도?”

지원 누나가 준 바나나 우유에 빨대를 꽂아 최수호에게 건네자 최수호가 손으로 받지도 않고 빨대를 입에 물었다. 어디서 귀여운 척이야.

“네 손으로 들고 먹어라. 피곤할 텐데 집 들어가.”

“버스 탈 거 아니야? 내가 버스 정류장까지 데려다줄게.”

최수호는 버스 정류장에 도착할 때까지 바나나 우유는 안 받아 가고 대신 바나나 우유를 든 내 손을 감싸 쥐고서 빨대를 빨았다. 이런 게 딱 고등학교에서 하는 연애질 같다는 거다.

뭐라고 하고 손을 뺄까, 하다 그냥 정류장에 앉았다. 솔직히 말하자면, 간지럽긴 해도 싫진 않았다.

정류장을 지나는 바람은 선선하고 최수호한테서는 좋은 냄새가 난다. 정류장 의자에 앉아 비스듬히 고개를 숙인 최수호의 모습이 그림같이 근사해, 짜증이 나려는 중이다.

고등학생 때도 저렇게 멋있었던가? 그랬겠지. 그래도 그땐 보면서 가슴이 욱신거리진 않았는데.

최수호가 스파링에서 때리던 펀치를 못 피하고 연속으로 얻어맞고 있는 것 같다.

“스파링하고 나서 팔이 계속 아파.”

“아파? 아프게 안 때렸는데. 어디 봐.”

어깨를 움켜쥐었더니 최수호가 야릇한 소리를 내며 고개를 떨구었다.

“열아…….”

“그런 목소리로 남의 이름 부르지 말아 주라. 어떻게 아파. 욱신거려? 콕콕 찌르는 것 같아? 뜨거워?”

“그냥 뻐근한 느낌…….”

“무리하게 써서 그래. 가서 약 바르든지, 마사지를 좀 하든지. 냉찜질도 괜찮고.”

“…….”

“왜. 뭘 봐. 느끼하게 쳐다보지만 말고 말을 해.”

“너랑 복싱하니까 기분 이상했어.”

“그러냐. 난 너랑 촬영하니까 이상했다.”

내가 타야 하는 버스가 정류장을 지나쳤다. 오늘도 세 대 정도는 보내게 될 예감이다.

최수호가 내게로 몸을 기울였다. 사람들 본다고 밀어내야 하는데 그러고 싶지 않았다. 어깨에 기대는 최수호를 받쳐 주면서 나는 그냥 최수호를 훔쳐보았다.

“당분간 또 못 보겠네.”

“그렇겠지.”

“열이가 보고 싶어서 어떻게 살지.”

최수호가 눈을 위로 굴려 나와 시선을 맞췄다. 링에서와 달리 나는 속수무책으로 밀리고 있다. 체중을 실은 훅이 아래에서부터 턱을 친다.

매분 매초, 최수호한테 녹다운당하는 이 순간이 싫지 않다.

좋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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