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6.
“촬영하는 동안 계속 여기 있을 거야, 형은?”
슬쩍 말을 돌리기로 했다. 촬영 팀이 체육관 부수지는 않나, 감시라도 하고 있을 참인가.
“너랑 수호 기다렸어. 아버지 도와 드리러 나갈 거야.”
“효자네.”
더는 잡담을 이어 갈 필요가 없다고 생각했는지 형이 벽에서 등을 뗐다. 나가려는 듯했다.
“나 이번에 대회 우승했어.”
내 말이 들리지 않을 정도로 멀어지기 전에 급하게 말을 걸었다.
“국제 대회도 금방 나가.”
형은 멈춰 섰지만, 다른 반응은 없었다.
“형이 궁금할 거 같아서.”
나오는 대로 한 말이다. 형이 궁금해할 것 같아서가 아니라 내가 말하고 싶어서 얘기했다. 어쩌면 형은 지금 또 무섭게 열 받은 표정일 수도 있겠다.
“넌 마지막 라운드에서 마무리를 너무 급하게 하려고 해.”
여전히 등을 돌린 채로 형이 입을 열었다.
“특히 승기를 잡았을 때. 그 정도면 됐다고 생각하나 본데, 상대 레벨이 높아지면 언제 역습당할 지 몰라.”
“내 경기 봤어?”
형은 들은 척도 안 하고 체육관 밖으로 나가 버렸다.
봤으면 봤다고 말을 하지. 하여간, 정진.
평상시와 다른 체육관 광경에 긴장했던 게 거짓말인 것처럼 어깨가 가벼워졌다. 오히려 익숙한 풍경이라는 생각을 새삼 하게 된다.
사각 링과 그 주변을 둘러싼 운동 기구들, 미트와 샌드백, 글러브와 보호구들. 내가 평생 보면서 자라 온 것들이다.
화면에 옮겨 놓으면 어떤 모습일까. 남들이 이 풍경을 보면 어떻게 느낄지 궁금해졌다.
“정열 씨!”
부르는 소리가 들려 쳐다보자 황 감독님이 내게 열렬한 손짓을 보냈다. 나중에는 아예 이리로 걸어왔다.
“언제 왔어?”
“아까요. 최수호는 의상 갈아입고 있어요?”
할 게 많은 주인공께서는 나보다 일찍 도착했다. 체육관 안의 휴게실이랄 만한 데는 사무실 정도니까 거기서 준비하고 있지 않을까.
투자 확보가 꽤 됐다고 들었는데도 그간 최수호가 찍던 환경에 비하면 조촐한 정도였다. 체육관 문제가 아니라, 돌아가는 카메라 수도 많지 않고 스태프 수도 그랬다. 저번에 갔던 드라마 촬영장은 여기에 비하면 인산인해다.
“감독님은 촬영마다 다 나오세요?”
“나 이 영화에 사활을 걸었다니까. 다른 거 해야 할 땐 못 나와도 오늘은 개인적으로 보고 싶은 그림이라, 또.”
보고 싶다는 게 무슨 그림인지는 굳이 묻지 않기로 했다. 별로 안 듣고 싶다.
“그래서 저는 뭐 하면 되는데요.”
촬영이 당장 오늘인데 와서 뭘 찍으면 되는지도 못 들었다. 대강 최수호랑 같이 체육관에서 복싱하는 회원 역으로 배경 채워 주면 된다고는 했지만.
“정열 씨가 여기서 맨날 하던 거.”
“복싱이요?”
“응.”
“진짜 그거만 해요?”
그래도 영화인데 뭔가 더 해야 하는 거 아닌가. 그 뭔가가 뭔지는 나도 상상이 안 된다만.
황 감독님은 그저 고개를 저었다.
“위치 알려 주면 거기서 운동만 열심히 하면 돼. 카메라 신경 쓰지 말고. 아니다, 쪼끔만 신경 쓰고.”
엑스트라 위치 잡아 주는 것 말고도 할 일이 많은지, 황 감독님은 화면에 나오는 기물 배치와 내가 어디 서서, 뭘 하면 되는지만 대강 짚어 주고 다시 카메라 쪽으로 돌아갔다.
뭐, 더 덧붙일 것 없이 말 그대로 최수호 잡히는 뒤쪽에서 샌드백 치고 있으면 되는 거였다.
황 감독님, 조명과 카메라 감독으로 보이는 사람, 등등의 스태프들이 체육관 내부를 돌아다니고 동선 얘기를 하는 동안 나는 스트레칭을 시작했다. 촬영이라도 어쨌든 운동은 운동이니까.
내가 쓸 글러브를 풀어 놓고 있을 때, 교복으로 갈아입은 최수호가 걸어 나왔다. 머리고 얼굴이고 손댄 게 하나도 없는데 역시 감탄이 나오게 잘생겼다.
“수호 씨, 이쪽.”
나하고 눈이 제대로 마주치기도 전에 촬영 스태프 중 하나가 최수호를 불렀다.
일터라 그런지, 최수호는 나를 쳐다보다가도 금세 부르는 곳으로 걸어갔다.
하긴. 오늘 아침에도 인사하고 왔는데 일하러 와서까지 붙어서 시간 낭비할 거 있나. 나도 맡은 바에나 전념하기로 했다.
촬영 시작은 교복 차림의 최수호가 체육관에 들어오는 장면이었다. 안에는 나 말고도 두어 명의 배우들이 대기했고, 관장 역할인 사람은 연신 대사를 외우느라 바빴다.
카메라가 체육관 문 바깥에서부터 최수호를 따라왔다.
나는 계속 샌드백을 치고 있기만 하면 됐다. 어려울 거라고는 없는 일이었다. 맨날 하는 짓이라 주먹만 뻗어도 다음 동작이 자연스럽게 나왔다.
“컷.”
갑자기 외쳐진 소리에, 처음엔 내가 뭘 잘못한 줄 알았다.
황 감독님이 최수호 쪽으로 손을 휘저었다.
“수호 씨, 집중해야지.”
방금 NG가 날 상황이었나? 최수호는 그냥 체육관 안쪽으로 계속 걸어 들어오기만 하면 되는 거였다.
그 정도 장면에서 실수할 최수호가 아니었다. 명색이 아역 배우 출신 아니던가.
하지만 촬영은 그 후로도 몇 번이고 다시 끊어졌다. 네 번째 NG를 외치는 황 감독님의 고개가 갸우뚱 기울었다.
“수호 씨?”
“죄송합니다.”
최수호가 꾸벅 고개 숙였다. 누가 봐도 뭔가 이상한 상황이었다.
“정열 씨, 잠깐만 여기로 나와 볼래?”
부르니까 나갔다. 나를 콕, 집어 지목한 이유가 지금 내가 예상하는 그것만은 아니기를 바라면서.
황 감독님이 뒷덜미를 긁적거렸다. 그러더니 내가 제발 아니기를 바랐던 그 얘기를 했다.
“정열 씨 때문에 집중 못 하는 것 같지?”
“…….”
“아주 정신을 못 차려.”
“…….”
“둘이 막 좋아 죽으려고 그러네.”
“이러다 쪽팔려서 죽을 것 같으니까 그만하세요. 아무튼, 그럼 저 나갈까요? 뒤에서 운동하는 것 정도는 다른 사람이 해도 되잖아요.”
단역 아르바이트 얘기는 어차피 반은 장난삼아 오갔던 거고, 당일에 잘렸다고 생각하고 현장 구경이나 하다 가면 되지 않을까.
“안 돼.”
황 감독님은 강경했다.
“편집해서 홍보에 쓸 거란 말이야.”
강경함 아래 감춘 꿍꿍이도 있었다.
“웬 홍보요.”
“정열 씨랑 정진 씨랑 천수관 선수까지 합해서 편집한 다음, ‘한국 복싱계의 트로이카 출연’이라는 문구 박아서 홍보물로 쓰고 정열 씨 올림픽 우승하면 알차게 또 써먹어야지.”
“계획이 되게 뚜렷하시네요. 우승을 할지, 안 할지 어떻게 알고. 근데 관장님 나오신대요? 우리 형까지?”
“안 되면 되게 해야지. 어쨌든 정열 씨가 빠지는 건 안 돼. 내가 팬이니까!”
어쩐지 이 영화에 감독님 사심이 너무 들어갔지 싶은데, 본인이 만족한다면 된 거겠지.
“최수호는 어쩌고요.”
“그거는…….”
황 감독님은 잠시 고민하는 듯하더니 내 어깨를 굳게 쥐었다.
“정열 씨가 어떻게 해 봐.”
뭘 어떻게 해요, 뭘.
최수호 주변인들은 내가 무슨 최수호를 조종하는 흑마법사인 줄 아는데, 그게 말처럼 쉬운 게 아니라고요.
최수호는 자기가 듣고 싶은 말만 듣는데다가 하기 싫은 건 죽어도 안 한다. 예를 들어 나한테 관심 끄기 같은 거.
내가 시킨다고 다 되면 쟤랑 그 많은 뽀뽀를 했겠냐고.
복잡한 내 심경을 아는지 모르는지, 최수호는 이 순간에도 나를 열심히 쳐다보고 있었다. 뚫어지겠다.
“일단 이 신은 나중에 찍고, 다른 것부터 찍읍시다. 음.”
황 감독님은 고민에 잠긴 태도로 벽에 붙은 시계를 힐긋거렸다. 라운드 종료까지 뭐든 득점을 내야겠는데 상대방의 틈이 보이지 않아 초조한 상태 같았다. 스텝만 밟으면서 체력을 허비 중인, 딱 그 모습이다.
“아, 그거 찍으면 되겠다.”
드디어 돌파구를 찾았는지 황 감독님이 손가락을 부딪쳐 딱, 소리를 냈다.
그 손가락이 왜 나를 향했는지는 모를 일이다.
* * *
“핸드 랩 감는 법, 형이 안 가르쳐 줬어?”
“가르쳐 주셨는데 헷갈려. 이렇게 하는 거였던 것 같은데.”
운동복 차림의 최수호가 내 앞에 앉아서 복싱용 붕대를 들고 낑낑거리고 있었다. 새빨간 핸드 랩이 자꾸 최수호의 손가락 사이에서 엉켰다.
“줘 봐. 감아 줄게.”
최수호가 순순히 손을 내밀었다. 능숙하게 손바닥부터 손목까지 핸드 랩을 감기 시작하자 최수호가 멍하니 나를 쳐다보았다.
“다른 손.”
“…….”
“야. 너 왜 이렇게 정신을 못 차려.”
손등으로 볼을 톡, 건드리자 최수호의 눈매가 가늘어졌다. 눈부신 햇살이라도 정면으로 본 듯한 얼굴이라 나는 내가 태양을 등지고 있지는 않은가, 의심했다.
중대한 비밀이라도 말하려는 듯 최수호가 내게로 고개를 바짝 붙였다.
“운동하는 열이가 섹시해서.”
그러고서 한다는 말이 저따위다.
“답도 없다, 너는.”
“복싱하는 거 오랜만에 보잖아. 일한다고 천 관장님네 체육관도 못 놀러 가서.”
“다 좋은데 촬영에 더 집중해야 하지 않냐, 어? 일터에서 제대로 안 하는 사람 싫다며.”
찔렸는지 최수호가 찡그리며 눈을 굴렸다.
“나도 지금은 여기가 일터니까 집중해서 할 거야. 나는 카메라에 어떻게 잡혀야 멋있는지는 잘 몰라. 스파링하던 대로 할 거니까 너도 정신 똑바로 차리고 쳐.”
대충 와서 뒷배경만 돼 주면 된다고 알았건만, 졸지에 주인공인 최수호하고 투샷을 찍을 참이다. 황 감독님이 나한테 최수호와 스파링을 해 달라고 요청했기 때문이다.
치고받고 합 맞추는 건 못 한다고 난감해하는 내게 황 감독님은 진짜 스파링이라고 생각하면 된다고 세 번이나 강조했다. 카메라 앞에서 배우인 최수호 데리고 뭔 진짜 스파링이 될까 싶지만, 뭐.
그래도 옛날에 배워 봤고, 형이 허투루 가르치지도 않았을 테니 어느 정도는 하겠지. 최수호 운동 신경이면 그림 나올 만큼은 될 거다.
16온스 글러브를 끼워 놓고 가슴 보호대로 시작해 헤드기어까지 보호구를 다 채워 놓고 나니 제법 그럴싸해 보인다.
“형이랑 스파링해 봤냐?”
“응.”
“그러면 괜찮겠네. 정진은 스파링할 때 가차 없잖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