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3.
ROUND. 정열
최수호하고 제대로 얼굴 본 지 몇 달은 족히 넘었다.
그나마 통화도 잠들기 전이나 밥 먹을 때나 겨우 했고, 문자 확인도 시차가 나는 수준이었다. 멀리 사는 것도 아닌데 각자 일정이 분주해지니 잠깐 만나기도 쉽지 않았다.
처음엔 최수호는 잘 지내는지 걱정되는 정도였는데, 요즘은 내가 더 문제였다. 잘 먹고, 잘 자고, 열심히 운동까지 하는 중인데 이상하게 축 늘어진다.
예 사범님한테 연애로 인한 영양 결핍이라는 소리를 처음 들었을 때는 도대체 무슨 말인가 싶었는데, 점점 알 것 같았다.
예전에는 그래도 최수호하고 떨어져 있다고 힘이 없어지진 않았는데. 최수호한테 옮은 건가.
은근슬쩍 최수호 탓으로 돌리면서 나는 버스에서 내렸다. 내린 곳은 우리 동네도 아니요, 천 관장님 댁도 아니었다. 물론 훈련 때문에 온 곳도 아니다.
얼마 전 있었던 지역 선수권 대회에서의 우승과 시들시들한 내 상태를 고려해 예 사범님이 내려 준 처방 장소다.
처방전 이름은 최수호 방문 휴가.
정류장 건너편은 바로 고등학교 정문이었다. 최수호가 영화를 찍고 있는 곳이다.
지난번에 갔던 세트장하고 달리 이번에는 학생들이 다니는 실제 고등학교가 촬영 장소였다. 방학이라 비어 있는 교실을 빌린다는 듯했다.
학교에 오는 것도 오랜만이다. 운동장을 걷고 있자니 우리 학교도 아닌데 괜한 향수가 느껴졌다.
“최수호, 나 도착. 지금 건물 들어가는 중인데 너 몇 층이라고?”
무슨 신호음도 울리기 전에 받냐. 학교 로비로 들어서면서 건 전화는 곧장 연결됐다.
그리고 대답은 핸드폰 스피커가 아니라 머리 위에서 들려왔다.
“열아!”
교복 와이셔츠와 넥타이 차림의 최수호가 계단을 날듯 뛰어 내려왔다.
“야, 다쳐!”
최수호는 그 긴 다리로 계단을 한꺼번에 뛰어넘어 댔다. 두세 개는 기본이고 아예 난간을 잡고 미끄러지듯 하는 통에 아래에서 보는 나만 심장이 쪼그라든다.
“안 다쳐.”
내 앞에 무사히 선 최수호가 해맑게 말했다. 하도 예쁘게 웃어서 뭐라 타박하지도 못하겠다.
“열아, 너무 보고 싶었어.”
뭐라고 대꾸할 틈도 없이 최수호가 나를 끌어안았다.
“너무, 너무.”
와, 꼬리 보인다. 방금 쫑긋거리는 귀도 본 것만 같다.
이럴 때마다 최수호가 무시무시하게 잘생긴 연예인이 아니라 원반을 입에 물고 날아다니는 커다란 강아지처럼 느껴지곤 한다.
“숨 막혀.”
산만 한 덩치로 온 무게를 다 실어서 달라붙는 걸 받아 주느라 가슴이 짓눌렸다. 유도 기술 중에 누르기 기술이 있는데, 그걸 일어서서 당하는 기분이다.
“야……. 조금만 떨어지면 안 될까.”
“충전 다 하고 나서.”
“건전지냐, 충전은 무슨.”
“뽀뽀해도 돼?”
“학교에서? 촬영 스태프들 돌아다니고 있을 텐데? 미쳤지?”
“나 너한테 미쳤어…….”
“아! 미친 새끼야!”
소름이 두피까지 돋았다. 최수호를 떠밀어 버리고 팔뚝을 열심히 긁어 대도 속이 근지럽다.
“그거 하지 마. 금지야.”
“그거가 뭔데?”
“목소리 깔고 드라마 대사 같은 거 하지 말라고.”
“다시 태어나도 난 너야, 열아. 난 네 거고 넌 내 거야.”
“하지 말라면 하지 마라. 확 집에 간다.”
목까지 다닥다닥 오른 닭살을 긁으면서 한 발자국 물러서자 최수호가 어깨를 축 늘어뜨렸다. 이 새끼가 또 귀여운 척하네.
“알았어. 안 할게. 가지 마.”
근데 귀엽다. 짜증 나게.
“계속 교복 입고 촬영해?”
교복 바지에 반소매 와이셔츠 차림이 특히 귀엽다. 좀 떨어져서 보니 옷차림이 차차 눈에 들어왔다.
“응. 거의?”
최수호가 와이셔츠 자락을 쥐고 보란 듯 펄럭거렸다. 교복 입은 모습은 작년까지만 해도 물리게 본 건데 왜 새삼스러운 기분으로 감상하게 되는 건지.
“잘 어울려?”
웃으면서 물어보니 눈이 부시다. 반사판이라도 뒤에 달고 왔나.
“우리 학교 교복보다 예쁘다.”
근처에 유명했던 망한 교복 디자인도 최수호가 입으니 근사해 보이긴 했다. 옷이 날개가 아니라 옷걸이가 중요한 경우랄까.
좋은 옷걸이에 예쁜 옷을 걸쳐 놓으니 그야말로 학원 청춘물의 향기가 진동한다. 최수호 혼자 앉아 있기만 해도 <그 시절 내가 사랑했던 그 소년> 비슷한 거 한 편 뚝딱 나오겠다.
“많이 찍었냐?”
“응. 앞으로 2주면 다 찍어.”
옆에서 지켜본 바에 따르면 영화 촬영 기간이란 들쭉날쭉했다. 반년 넘게 찍는가 하면, 한 달이면 끝난 적도 있었다. 이번 영화도 빨리 끝나는 축인가 보다.
“촬영 재밌어?”
“그냥, 하루에 오래 안 찍어서 좋아.”
드라마 찍다가 매일 쓰러지기 직전까지 내몰렸던 애가 하는 말이라 그런가, 어째 애잔하게 들린다.
확실히 얼굴은 좋아 보인다. 졸려서 눈도 못 뜨거나 피골이 상접해서 안색이 납빛인 상황은 아니었다.
최수호가 잘 지냈다는 건 참 다행스러운 일인데, 해맑아도 너무 해맑으니 불쑥 이런 생각이 든다.
이 자식은 나랑 못 보는 동안 괜찮았나?
아닌 걸 알면서 왜 이러는지. 사람의 마음이란 교활한 거다.
당장 메신저만 뒤져도 최수호 메시지가 내가 보낸 메시지의 두 배는 된다. 지금 저렇게 웃기 바쁜 것도 내가 있어서 그런 걸 텐데.
“양용배랑 찍는 건 재밌냐.”
“응?”
“아니, 뭐. 둘이 뭐, 어? 붙어서 찍을 거 아니야.”
최수호랑 양용배가 붙어서 애정신을 찍는 그림이라니…… 도저히 상상이 안 가는데, 그 일이 실제로 벌어지고 있단다.
내 안부부터 영화 얘기까지 늘어놓던 황 감독님 전화에 의하면 요즘 한창 그런 촬영 중이라고 했다. 대부분 둘이 하도 티격태격해서 그러다 진짜 싸울까, 걱정이라는 얘기긴 했지만. 다른 장면은 잘만 찍던 최수호가 양용배랑만 붙으면 NG를 자꾸 내서 양용배가 놀리느라 바쁘다는 얘기도 있었다.
평범하게 예상 가능한 스토리였다. 그 얘기를 듣는 내 심경만 제외하고.
들으면서 괜히 양용배가 부러워지리라고는 상상도 못 했다. 난 최수호 구경도 못 하는데 종일 같이 있을 거라는 게 부러웠다.
그딴 생각을 하는 게 민망해서 샌드백이나 열심히 쳤지만.
“붙어서……. 응, 양용배랑 붙어 있어야 해서 짜증 나.”
“…….”
“떨어지고 싶어.”
“그러냐.”
“같이 찍자고 하지 말걸.”
“……안아 줄까?”
“응.”
최수호가 진심으로 열 받아 보여서 숙연해졌다. 아까는 신나서 귀부터 펄럭대는 강아지가 절로 떠올랐다면, 이번에는 사이 나쁜 강아지랑 맨날 산책하느라고 지치고 짜증 난 개가 시무룩하게 꼬리를 떨군 모습이 연상된다.
그래, 아무렴 최수호가 피곤한 것보다는 기분 좋은 게 낫지. 금방 다시 품에 안기려고 드는 최수호의 등에 축구공이 떨어졌다.
“야! 정열!”
계단 층계참에서 익숙한 얼굴이 손을 흔들었다.
보아하니 축구공은 양용배가 저기서 던진 듯했다. 최수호가 웃음기라곤 없는 얼굴로 공을 주워 들었다.
“공 다시 줘.”
팔을 뻗는 양용배를 무시하고 최수호가 복도로 축구공을 내던졌다. 얘네 둘이 사이좋아질 날이 오기는 할까.
“치사한 새끼. 그걸 던지냐.”
양용배가 난간을 잡더니 엉덩이를 걸치고 미끄러지기 시작했다.
최수호는 뛰어내리더니 저 자식은 아예 미끄럼틀을 타네. 이쯤 되니 위험하다고 말릴 생각도 안 든다.
“저 새끼, 역시 정열 때문에 뛰어 내려간 거였네. 너 이겼다며.”
바닥에 한껏 멋지게 착지한 양용배가 나를 향해 잽을 날리는 시늉을 했다.
“펀치 폼이 별로다. 넌 복싱 안 배우냐.”
“난 복싱하는 장면 없거든? 지금은 그냥 한 거고 진지하게 하면 잘해. 볼래?”
“됐어. 너도 우리 형한테 배우나 궁금해서 물어본 거야.”
“열아, 진이 형이 난 잘한대.”
둘이 떠드는 잠깐을 못 참고 최수호가 나하고 양용배 사이에 끼어들었다. 양용배는 그 뒤에서 어느새 다시 주워 온 축구공으로 드리블 묘기 중이다.
한 놈은 주먹질에, 한 놈은 공놀이에. 잘생긴 바보 둘 같다.
“봤지? 내가 축구는 이 중에서 제일 잘한다니까.”
“안 봤다. 물어보지도 않았어.”
“이게. 그리고 오면 온다고 말을 하지, 왜 최수호한테만 전화하는데? 최수호, 넌 정열하고만 붙어 있으면 남자 친구가 질투 안 하냐?”
남자 친구라는 말에 놀라서 쳐다보자 양용배가 뽐내듯 턱을 치켰다. 왜 본인이 으쓱하는 건지는 모르겠다.
“뭐얼, 또 그렇게 쳐다봐. 나 그르케 꽉 막히고 그런 사람 아냐. 최수호 자식이 남자랑 사귀든, 여자랑 사귀든 상관을 안 해요.”
“용배야, 넌 진짜.”
“배포가 크고 의리가 넘친다고?”
“아니. 정말 트인 듯이 막혀 있다.”
최수호가 남자랑 사귄다는 걸 알고 있으면서도 상대가 나일 거라는 생각은 못 하는 저 눈치. 어떻게 보면 대단하다.
“그게 뭐야. 트였으면 트인 거고, 막혔으면 막힌 거지.”
“내 말이 그 말이야. 넌 어떻게 그게 되냐?”
끝까지 내 말을 못 알아듣고 인상을 찡그리던 양용배가 이마로 축구공을 받으면서 놀기 시작했다. 최수호는 어느새 급격히 피로한 얼굴이었다.
황 감독님 얘기가 과장이 아니었다는 걸 알겠다. 둘이 맨날 싸운다더니.
“오후 촬영 같이하러 온 거 아니야? 감독님이 네 얘기 했던 거 같은데. 교복으로 안 갈아입어?”
이마에서 어깨로, 다시 팔로 축구공을 정신 사납게 옮겨 가며 양용배가 물었다.
“나는 내일 체육관 촬영.”
최수호랑 같은 체육관 회원 A 비슷한 역할이다. 덕분에 오랜만에 형 체육관에 가게 생겼다.
“오늘은 최수호 데리러 온 거야.”
음침하게 공과 양용배를 노려보던 최수호의 눈에 다시 빛이 깃들었다.
그렇다. 오늘은 대망의 그날이다.
“우리 엄마, 아빠랑 밥 먹기로 해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