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82화 (82/88)

82.

화분 속의 선인장은 선명한 초록색이다. 열이한테 이걸 왜 선물로 줬는지 기억한다. 늘어놓고 팔던 화분 옆에 꽂힌 전자파 차단, 공기 청정 따위의 알록달록한 문구들 때문이었다.

그러니까, 이게 열이한테 도움이 되기를 바라서.

“잘 자라 봐, 수호야.”

창가에 올라앉은 선인장 가시에 노을빛이 설탕처럼 맺혔다.

“열이가 있으니까. 열이가 안심할 수 있게.”

말하고 보니 유치했다는 생각이 들어 간지러운 웃음이 샜다.

누구한테 쫓겨 서둘러 자리를 피하기라도 한 듯 거실의 풍경은 조금도 정리가 되지 않고 흐트러져 있다. 나는 멈춘 영상을 다시 틀었다.

영상 속에서 창백한 얼굴의 어머니가 또박또박 말한다. 어머니는 본인이 선 벼랑에 거센 눈보라가 몰아쳐도 혼자 버틸 수 있는 사람처럼 보인다. 그렇게 보이기를 간절히 원하는 사람 같았다.

혼자서도 이겨 낼 수 있기를 너무 원한 나머지 옆에 내가 있다는 사실 따위는 까마득하게 잊은 사람처럼.

TV를 껐다. 까맣게 반들대는 모니터에 내 얼굴이 비친다.

* * *

하늘이 남색으로 젖어 들고 있었다. 노을마저 사그라지면서 지평선을 따라 연보랏빛 띠가 검푸른 어둠에 쫓겨 밀려났다.

어머니가 한국에 있는 동안 머물기로 했다는 집은 담이 높은 주택이었다. 하얗게 칠한 담장 때문에 아무리 애써 발돋움을 해도 정원 끝자락조차 볼 수 없다.

철로 된 대문이 열리고 나서야 담장 안이 어떤 모습인지 환하게 켜진 불빛 사이로 볼 수 있었다. 파릇파릇한 잔디와 징검다리처럼 놓인 돌 곁으로 조그맣게 정돈된 화단이 자리했다.

어머니는 긴 카디건을 걸치고 화장기 없는 얼굴로 나타났다. 머리카락은 흐트러지고, 맨발에 슬리퍼 차림인 모습이 낯설었다.

“무슨 일이야? 이렇게 갑자기.”

조금 전, 자택으로 가는 중이라는 내 연락을 받고 어머니는 당황한 듯 침묵하다 알겠다고만 했다.

택시를 타고 나는 열이에게 가는 대신 어머니에게로 왔다.

“갑자기 오면 안 돼요?”

“전화로도 충분히…….”

“아들인데.”

내가 이렇게 말할 때마다 어머니는 입을 다문다. 누군가 긴 막대로 쿡, 찔러 대기라도 한 듯 불유쾌하면서 곤혹스러운 모습이다.

“아들이잖아요.”

나는 고집스럽게 반복했다.

원치 않았는데 생겼고, 차라리 안 보고 사는 게 더 마음 편한 애라고 해도, 나는 저 사람의 자식이고 저 사람은 그걸 부정해서는 안 된다.

어머니는 말없이 카디건을 여몄다. 들어오라는 권유조차 하지 않는다. 나를 마주 보는 대신 비스듬하게 서 있다.

“오늘 옛날에 찍은 다큐멘터리 봤어요. 거기 아버지 얘기가 나왔던 것 같아서.”

어머니는 자기 입으로 나한테 아버지 얘기를 한 적이 없다. 온 세상 사람들이 다 아버지와 어머니를 엮어서 떠들 때도 어머니는 침묵했다.

“근데 착각이었나 봐요. 100분 동안 아버지 얘기는 한마디도 안 하시더라고요.”

나를 어떻게 가지게 됐는지, 어머니가 그 남자와 꿈꿨던 가족이란 어떤 것이었는지, 어떤 환상이 어머니를 속여 넘겼는지 어머니는 끝까지 내게 설명해 주지 않았다.

어머니의 기억은 모두 어머니만의 것이었고 나는 역사가 없는 존재였다. 어머니가 왜 나를 원하지 않았는지조차 제대로 알 수 없었다.

빈 곳을 메우려면 상상력이 필요했다.

“어머니가 왜 그랬는지, 당시에 얼마나 힘들었는지…… 이해하려고 노력하면 할 수 있을 것 같긴 한데, 이제 그렇게 애쓰지는 않으려고요.”

쉽게 상상할 수 있었다. 무거운 삶을 나눠 들어 줄 사람이 필요했던 어머니가 나라는 짐을 홀로 지게 되었을 때의 당혹감과 분노를. 울음을 그치지 않는 갓난아이 앞에서 귀를 틀어막고 이를 악무는 어머니의 앳된 얼굴을.

이 사람도 힘들었고, 자기 딴에는 노력했고, 나를 상처 입힌 이유가 있으리라는 추측과 이해로 많은 시간을 보냈다.

내 잘못이라고 생각하면 오히려 편했던 것 같다. 내가 노력하면 나아질 수 있을 것처럼 느껴지니까.

내가 아버지와 닮아서, 내가 성가신 애라서, 일을 충분히 잘 하지 못해서 등등. 내게 책임을 묻는 건 너무 쉬워서 그만두기 힘들었다.

“아버지랑 만날 생각 없어요.”

내 말에 어머니가 놀란 듯 눈을 깜빡거렸다. 표정이 깃들 때마다 어머니의 얼굴은 다큐멘터리 영상 속에 나오던 앳된 여자와 비슷해진다.

“저한테 부모님은 한 사람이니까요.”

몸서리쳐지는 나날도 있었다지만 적어도 이 사람은 나를 길러 주었다. 지금껏 한 번도 내 삶에 제대로 등장하지 않았던 사람을 피가 통했다는 이유만으로 부모라고 생각하진 않는다.

“그 사람하고는 만나도 아무 느낌 없을 거예요, 분명.”

내게 어머니가 어려운 건 나를 지켰기 때문이다. 단순히 의무 때문일지라도, 어머니는 내가 가장 연약하던 시절에 곁에서 나를 먹이고 입히며 보호했다.

나를 어머니에게 매어 놓는 건 피가 아니라 지나온 시절의 기억이었다. 내가 어머니의 자식인 이유는 어머니가 나를 길러서다.

나는 역시 혼자서도 괜찮을 수는 없다.

혼자서는, 아무리 해도 버틸 수가 없었다.

어머니가 원하는 강한 인간은 되지 못할 거다. 앞으로도 벼랑에서도 꿋꿋한 혼자로는 살아갈 수 없으리라고 생각한다.

“그럼, 갈게요. 만나는 건 제가 거절했다고 해 주세요.”

대답을 바라지는 않는다. 그간 겪어 온 게 있으니 별다른 말을 들을 수 있을 거라 기대하지도 않았다.

내가 돌아서기 직전, 정원에 깔린 흰 돌처럼 가만하던 어머니가 입을 열었다.

“난 자라면서 마음대로 할 수 있었던 게 아무것도 없어.”

기대도 한 적 없던 대답이 돌아오는 바람에 잠시 멈췄다. 정원에 부는 바람이 나뭇가지를 흔들었다.

“네가 어렸을 때 가졌던 건 다 내가 가지고 싶어 했던 것들이야.”

알고 있다. 집안 사정이 어려웠던 때도 어머니는 내가 굶거나 춥지 않게 했다. 네 살도 안 된 내게 솜이불을 덮어 주면서 추운 게 너무 싫다고 중얼거리던 걸 아직도 기억한다.

“네가 정말 원하는 게 뭔지 모른 척해서 미안해.”

그렇지만 그날 밤에도 어머니는 내 손을 잡아 주지는 않았다. 같이 자면 안 되냐고 붙잡는 손길을 떨어내고 멀찍이 떨어져 잠을 청했다.

다큐멘터리 속의 여자와 어머니는 똑같다. 달라지지 않았다. 세월과 함께 늘어난 주름과 좀 더 뚜렷해진 턱의 모양은 중요한 게 아니다.

시간은 사람을 나이 들게 하지만 그게 반드시 성장이나 변화를 의미하지는 않는다.

내 나이만큼 어렸을 때도 어머니는 벼랑에 홀로 서서도 버틸 줄 알아야 한다고 믿는 사람이었을 것이다.

결혼하고, 아이를 낳으면 저절로 부모가 되는 건 줄 알았다. 정해진 사건을 겪으면 그냥 변하고 성장하는 줄.

하지만 세상에 저절로 되는 건 없다.

“태어난 게 실수 같았어요. 남들이 그랬으니까. 나만 아니었으면 된다고, 어머니가 매일 그렇게 말하는 것 같아서, 사는 게 다 무서웠는데.”

“……수호야.”

“지금은 태어나서 다행이라고 생각해요.”

태어나서, 열이를 만날 수 있어서 다행이었다.

만나고, 얘기하고, 끌어안을 수 있어서 다행이다.

“언젠가 어머니도 제가 있어서 다행이라고…… 생각하실지도 몰라요. 언젠가는요.”

이 사람에게 인정받거나 떨쳐 내고 싶었다. 사랑받을 수 없다면 버리고 싶었다. 용서하거나 복수하고 싶었다.

“저는 어머니를 버리지 않을게요.”

어머니는 읽기 힘든 표정으로 나를 응시한다. 건조하게 껍질이 일어난 입술이 더디 움직였다.

“들어와서 차라도 마실래?”

머뭇거리며, 어머니가 집 쪽을 돌아보았다.

“아니요. 집에 가서 대본 다시 봐야 해요. 나중에 시간 나면 또 식사해요.”

나는 어둠을 밀어낸 불빛 사이로 어머니의 얼굴을 분명히 마주 보고 돌아섰다. 열이가 보고 싶다. 그렇지만 당장 보지 않아도 괜찮다. 지금이 아니어도 열이는 거기 있어 줄 테니까.

1년이 지나면, 열이가 우승하면, 우리가 서로를 책임질 수 있게 되면…….

나는 열이의 애인이 될 거다.

그 애가 안심할 수 있는 애인이 될 거다.

나도 열이를 지켜 주고 싶다.

ROUND. 정열&최수호

“열아, 오늘은 체육관 가도 돼?”

- 아니. 나 오늘 다른 체육관에서 훈련해.

“다른 체육관? 어디?”

- 여기, 그. 동네 근처. 최수호, 미안한데 나 들어가 봐야겠다.

“응. 운동 잘하고, 식사도…….”

- 끊을게.

* * *

“최수호, 내일 뭐 해?”

- 미안해. 나 내일은 대본 리딩하러 가.

“그래? 어쩔 수 없지.”

- 저녁에는 끝나는데.

“저녁에는 내가 훈련이라.”

- 그러면 모레는?

“점심에 잠깐 볼래?”

- 모레 갈게.

* * *

[대표님한테 잠깐 붙잡혔어.]

[금방 갈게.]

[30분만.]

[나 이제부터 스파링하러 갈 건데]

[무리하지 말고 그냥 천천히 일 봐.]

[어차피 지금 와도 얼굴도 얼마 못 봐. 다음에 만나자.]

* * *

[열아, 바빠?]

[미안. 다음 달에 시합 잡혔다.]

* * *

[열아, 나 다음 달부터 촬영이야.]

[전화했던 거 이제 봤네. 열심히 해.]

[나도 열심히 할 테니까.]

* * *

[뭐 해?]

[스파링.]

[관장님한테 엄청 깨졌다.]

* * *

[뭐 하냐?]

[오늘 첫 촬영이었어.]

[열아, 전화해도 돼?]

[자느라 못 받았어.]

* * *

[저녁에 가도 돼?]

[내일이 시합이라 오늘은 안 돼.]

* * *

[너희 집 가도 되냐?]

[나 오늘은 지방 촬영이야.]

* * *

“최수호, 너 눈을 왜 그렇게 뜨냐.”

“뭐가.”

“말 걸지 말라고 눈에다 써 놓고 플래시 켠 것 같아.”

“양용배, 알면 말 걸지 마.”

“요즘 정열 못 봤다고 그래? 니네 신기하긴 하더라. 둘이 타이밍 엄청 안 맞아. 어떻게 촬영 날짜 잡힐 때까지 한 번을 못 만나냐.”

“조용히 해…….”

“어쩌겠냐, 둘 다 바쁘신 몸인걸.”

“…….”

“우냐? 울어?”

“가, 좀……. 저리 가.”

* * *

“역시 센스가 좋아. 금방 따라잡네. 괜히 챔피언이 아니야, 정열?”

“관장님하고 사범님이 잘 가르쳐 주셔서 그런 거죠.”

“엄청 립 서비스 같은 건 그렇다 치고. 우리 정열이, 오늘따라 왜 이렇게 힘이 없어. 모처럼 대회 우승인데. 수관 씨가 오늘 굶겼어? 혼났어?”

“아니요. 컨디션 좋은데요.”

“알았다. 그거구나.”

“그거요……?”

“연애로 인한 영양 결핍.”

“……그런 거 아니에요.”

“참, 아닌 것처럼 보인다. 안 되겠다. 우승 기념으로 특별히 허락할게.”

“뭘, 허락해요?”

“결핍을 채워 줄 훈련 중의 과도한 연애.”

* * *

[촬영장에 보러 갈게.]

[내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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