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81화 (81/88)

81. 

미안했다. 엄마가 형 때문에 얼마나 마음고생했는지 다 알면서, 운동 그만하라는 부탁조차 들어줄 수가 없다니.

엄마는 내가 시험에서 낙제점을 받아 와도 나더러 뭐든 할 수 있는 애라고 말해 주고, 메달 같은 거 못 따도 건강히 지내기만 하면 기뻐해 줄 텐데.

힘들면 포기하고 도망쳐도 된다고 기꺼이 말해 줄 텐데도.

“그래도 할 수 있는 데까지 해 볼게. 그러고 싶어.”

이 시점에서 내가 계속할 수 있는 건, 포기해도 된다고 말해 주는 사람들이 있어서다.

응원하고 기다려 주는 사람들이 있어 링에 다시 설 결심을 할 수 있었듯, 다 그만둬도 돌아갈 곳이 있어서 최선을 다할 수 있다.

상처 입고 상처 주면서 이 자리에 설 수 있었다.

서로를 생각하는 마음의 아귀가 어긋나더라도 그 안의 다른 모든 것까지 전부 틀어지는 건 아니다. 단 한 라운드로, 한 번의 승패로 결정지어지지 않는다.

예전에는 한 번 틀어지면 끝인 줄 알았다. 복싱을 그만뒀으면 다신 못 하는 거고, 복싱 때문에 형과 싸웠으니 계속하는 한 형하고는 못 보는 거라고 생각했다.

형이 탔을 버스가 지나간다. 버스는 빠르게 멀어졌지만 전 같은 두려움 없이 체육관으로 돌아설 수 있었다.

내가 다치면 형은 다시 달려와 줄 거다. 형은 나를 버리지 않는다.

ROUND. 최수호

[수호야, 힘들다고 포기하면 안 돼.]

영상 속 어머니는 젊고, 나는 어리다.

[기댈 곳이 있다고 생각하면 약해져.]

다큐멘터리에 나오는 어머니는 지금보다 훨씬 젊다. 카메라를 피하듯 고개를 틀고 중얼거리는 어머니의 옆모습에는 애수가 묻어났다.

어릴 적 찍은 다큐멘터리를 직접 틀어 보는 건 처음이다. 다시 볼 날이 올 거라고 생각하지도 않았었다.

[혼자여도 괜찮다고, 항상 벼랑 끝에 서 있는 거라고 생각해야만 해.]

영상에서 나를 향한 어머니의 말은 스스로에게 하는 다짐처럼 들린다.

- 수호야, 듣고 있어?

귀에 대고 있던 핸드폰에서 매니저 형의 채근이 들렸다.

“어, 듣고 있어.”

일시 정지를 눌러 TV에서 재생되던 영상을 멈췄다.

- 어떻게 할 생각이야?

대답을 못 했다.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몰라서.

나도 내가 어떻게 할 생각인지 알 수가 없었다. 내 생각인데도.

- 만날 거야?

매니저 형이 조심스럽게 말했다.

- 너희 아버지.

아버지, 라는 단어가 왜 이렇게 어색한지 모르겠다. 특히나 ‘내 아버지’라니.

진이 형과 헤어지고 집으로 돌아오는 길목에서 어머니한테 걸려 온 전화를 받았다.

- 그 사람, 만나고 싶니?

아버지와 만나고 싶은지 묻는 전화였다.

- 이젠 너도 성인이니까 네 뜻대로 해. 네가 원한다면 그쪽에 전달해 줄게.

어머니는 한결같았다. 미국으로 같이 갈 건지 물었듯이 내게 선택을 맡겼다.

뒤이어 연락한 매니저 형이 설명해 준 내용을 나는 천천히 곱씹었다.

아버지는 지금까지 주기적으로 어머니에게 연락을 시도했다고 한다. 최근 화제가 된 인터뷰 이후에도 연락했다는데, 어머니가 무시하자 이번에는 일방적으로 통보했단다.

한국으로 와서 나를 만나겠다는 내용의 통보였다.

나한테 직접적으로 연락이 닿지 않은 건 어머니와 대표님 덕인 듯했다. 만약 아버지한테 직접 연락을 받았다면 어땠을까.

모르겠다.

“일단 끊을게요.”

- 수호야.

“응.”

- 난 요즘 네 모습 좋아. 사람 대하는 게 까다로웠던 거지, 너 항상 일은 옆에서 보기 안쓰러울 정도로 성실히 했잖아. 시키는 대로, 무리한 일정도 전부 다. 네가 이런 식으로 일에 고집 부리는 거 처음 봤어. 나는 그거, 좋은 변화라고 생각해.

내가 중간에 끊기라도 할까 걱정되는지 매니저 형은 숨도 제대로 쉬지 않고 말을 이어 갔다. 오래 준비한 말 같았다.

- 이런 일로 흔들리지 않았으면 좋겠다.

“기영이 형.”

- 미안. 갑자기 너무 무게를 잡았나.

“빨리 돌아와요. 나도 금방 촬영 들어갈 거니까. 형은 내 매니저잖아.”

- 나 지금 감동해도 돼?

“아뇨. 끊을게요.”

TV 모니터에 앳된 얼굴의 어머니가 멈춰 있다.

소파에 머리를 기대고 눈을 감았다. 베란다에서 노을이 새빨갛게 물결쳤다.

열이가 보고 싶다.

“전화할까.”

해도 될지 모르겠다. 지금 운동 중이려나.

“아까는 통화 중이었는데.”

만나러 갈까.

당장 만나서 꽉 끌어안고, 키스하고, 어떻게 하면 좋을지 물어볼까.

아니면 열이 어깨에 얼굴을 묻고 숨어 버릴까.

열이와 있을 땐 오직 열이만 생각할 수 있어서 편하다. 열이가 주는 건 그게 비록 고통이라 할지라도 어느 정도 달콤한 구석이 있다.

좋아하는 걸 생각하는 건 중독적이다. 고뇌조차 즐겁게 만들어 준다.

온전히 내 편을 들어줄 사람한테 의존하고, 고민을 외주하는 건 간단한 일이었다.

TV를 끄지도 않고 현관으로 향했다. 발이 저절로 열이가 있는 곳으로 움직이는 느낌이 들었다.

현관문을 열어젖히고 나가자 복도의 차고 탁한 공기가 뺨을 감쌌다. 엘리베이터로 당장 뛰어가려다 간신히 발을 멈췄다.

갑자기 들이닥치면 열이도 놀라겠지.

전화 안 받았으니까 훈련 중일 텐데, 그래도 나한테 아버지 연락이 닿았다는 걸 알면 훈련을 미뤄 두고 나하고 있어 줄 거다. 자기 훈련보다 나를 더 앞세워 생각하며 걱정해 줄 게 분명했다.

그건 얼마나 달콤할까. 좋아하는 사람의 온 신경을 차지해 버리는 건.

열이가 염려해 주는 것만으로 위로가 될 거다.

……하지만 열이는 어떨까.

지금 내가 가서 열이의 시간도, 마음도 빼앗아 버리면, 열이는.

그렇지만, 그래도 보고 싶은데. 지금 당장 열이가 필요한데.

얼마나 오래 서 있었는지 모르겠다. 손이 식어서 춥다는 느낌이 들 쯤 엘리베이터가 열렸다.

엘리베이터에서 내린 사람이 나를 지나쳐서 걸어가다가 도로 돌아와 내 앞에 섰다.

“최수호?”

손바닥이 내 시야를 휙 가렸다가 젖혀진다.

진이 형이 내 앞에서 손을 흔들었다.

“뭐야, 왜 가만히 있어? 나가는 길이야?”

앞에서 말을 거는 게 누군지 깨닫자 저절로 자세가 똑바라졌다. 진이 형하고 동네에서 마주치는 게 특별한 일은 아니지만, 우리 집에 올 이유가 없을 텐데. 형이 왜 여기서 나와요.

“형은 어쩐 일로 오셨어요?”

진이 형은 오늘도 모자에 점퍼 차림이었다. 전에 우리 집에 왔을 때하고 비슷하다.

혹시 또 열이 찾으러 오셨나. 본격적으로 반대하러 오신 건가. 몸이 점점 긴장했다.

뒷머리를 긁적이던 진이 형이 내게 불쑥 손을 내밀었다.

“선인장 가지러 오려고 했다며, 오늘.”

손바닥 위에는 수호가, 열이의 선인장이 올라가 있었다.

“정열이 문자로 알려 주더라.”

내 손에 직접 조그만 화분을 쥐여 주며 진이 형이 머쓱하게 헛기침했다.

“오해해서 미안하다.”

뭘, 어디까지, 어떻게 오해했다는 걸까.

오늘 오전만 해도 인상을 구기면서 날 쳐다보던 진이 형이 선인장까지 기꺼이 가져다주러 오게 된 연유가 뭘지 추측하느라 머리가 분주히 움직였다.

“정열이랑 사귄다며. 잘 만나라고.”

더 고민할 것도 없어지는 말이었다. 선인장 화분을 잡은 손에 절로 힘이 들어갔다.

“저 열이랑 사귀어도 괜찮아요?”

“어.”

“저라도 괜찮은 거예요?”

“안 괜찮을 거 있냐? 너보다야 정열이 문젠데, 고집불통에 운동밖에 모르는 놈이긴 해도 네가 옆에 있어 주면 안심이지.”

“……저 있으면 안심이에요?”

“자기 일 확실하게 잘하잖아. 열이도 잘 챙기고, 너 붙어 있으면 정열도 정신 똑바로 차리는 것 같고. 정열 그 자식, 어디로 튈지 몰라 걱정되다가도 너랑 있다고 하면 예전부터 안심이 됐으니까.”

열이가 말하는 내 모습이 그랬듯 진이 형이 얘기하는 나 역시 낯설었다. 진짜 나보다 그들이 알고 있는 나는 훨씬 좋은 사람 같다.

“제가 열이한테 의지가 될까요.”

“무슨 당연한 소리를 해. 너 없었으면 정열 지금처럼 못 했어.”

이마를 구긴 진이 형이 내 어깨를 툭, 쳤다.

“복싱도 네가 꼬셨지?”

어릴 때부터 봐서 진이 형의 험악한 인상에는 익숙하지만, 이럴 땐 똑바로 눈 마주치기 겁난다. 열이는 눈을 세모로 떠도 귀엽던데 진이 형은 무섭다.

“열이가 하고 싶어 했잖아요.”

“그래. 하고 싶어 했지.”

진이 형이 조용히 중얼거렸다.

“너 있어서 좋겠네, 정열은.”

타박이라도 들을 줄 알았는데 진이 형이 한 말은 그게 다였다.

“너도 복싱해야 하잖아.”

“저요?”

“촬영 들어가기 전에 복싱 배워야 한다며. 너희 감독님한테 들었어.”

“황 감독님하고 만나셨어요? 하긴 형네 체육관 다니니까.”

“내 체육관 말고 다른 체육관 갔다가 마주쳤어. 나한테 코칭 부탁하길래 너랑 얘기된 줄 알았는데.”

“……처음 듣는 얘기긴 한데, 형한테 배우면 전 좋아요.”

황 감독님은 다단계 하면 잘할 것 같다. 사돈의 팔촌은 물론 지인의 지인한테까지 금방 정수기 팔아 치워서 한몫 단단히 챙길 느낌이다. 고생만 진탕 하고 몸에 상처만 남긴 어선 말고 다단계에 올라타셨으면 지금쯤 집이 한 채가 아닐지도.

“더 협의하긴 할 건데 우리 체육관에서 찍을 것 같아.”

“촬영 장소를요? 진짜로요? 형, 이런 거 안 좋아하잖아요.”

“너랑 정열이 나온다는 영화기도 하고, 대관 비용도 괜찮길래.”

로케이션 매니저가 할 일을 혼자서 하고 있다니, 어쩐지 황 감독님은 독립으로 찍었어도 어떻게든 해내셨을 것만 같다. 밀림에 떨어뜨려 놔도 보란 듯이 자생할 것 같고 그렇다.

“너라고 안 봐주니까 각오하고 나와.”

형한테 맞을 것만 같던 예감은 예지였던 걸까. 허공에 잽을 날린 진이 형이 엘리베이터를 돌아보았다.

“줄 거 줬으니까 갈게.”

진이 형이 잠시 망설이다 덧붙였다.

“열이, 잘 부탁한다.”

엘리베이터에 탄 형이 사라지고 나서야 내가 손가락 마디가 아릴 정도로 화분을 세게 움켜쥐고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집으로 돌아가 햇볕이 잘 드는 자리를 찾았다. 답답하지 않게 바람이 잘 통하는 곳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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