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0.
“놀리다니. 순수한 감탄이야.”
“감탄하셔도 차단할 거예요.”
“에이이, 부끄러워하기는.”
안 부끄럽겠냐고요.
아까 있던 일을 생각하면 아직도 귓불이 뜨겁다.
내가 얼결에 대찬 커밍아웃을 한 이후 장내는 고요하게 술렁거렸다. 샐러드와 토마토, 달걀을 사이에 두고 운동선수 넷과 영화감독 한 명이 당혹감을 감추지 못하고 멈춰 있는 장면이란. 일부러 찍은 블랙 코미디 같았다.
먼저 침묵을 깬 건 형이었다. 형은 지금껏 형이 하고 있던 오해를 차근차근 설명해 주었다.
형 시점으로 재구성하면 이랬다.
시간을 돌리고 돌려 최수호랑 내가 한창 지지고 볶고 있던 어느 날. 최수호의 고백을 뻥 차 버린 내가 고열로 쓰러졌던 날이다.
‘좋아해, 최수호.’
병원에 실려 가 앓아누운 동생이 형 소맷부리를 붙잡고 털어놓은 고백에, ‘그런’ 연애는 한 번도 진지하게 생각해 본 적 없던 우리 형은 적잖은 충격을 받았다.
‘나도, 너 좋아한다고…….’
거기다 무뚝뚝한 친동생이 생전 처음 보는 애절한 얼굴로 속마음을 속삭이는 바람에 충격이 세 배가 됐다고 하는데, 이건 별로 알고 싶지 않았던 사실이다.
당시 상황을 두고 추론한 끝에 형이 내린 결론은 이렇다.
정열과 최수호 사이에 무슨 일이 있다. 단순한 싸움이 아니라, 꽤 심각한 걸로.
그리고 그건 아무래도 치정인 것 같다.
나아가, 아마도 정열의 짝사랑이 문제가 되었을 것이다.
왜 하필 짝사랑이냐고 했더니, 형이 댄 근거는 단순했다.
수호는 누가 봐도 잘생겼으니까. 평범한 남자라도 상대가 최수호라면…… 그래, 좋아할 수 있지. 하물며 내가 어릴 때부터 얼마나 수호 옆에 붙어살았는지를 생각하면 충분히 납득 갔다고 한다.
나만 붙어살았냐? 최수호는 안 그랬냐고. 편파적인 인간.
아무튼, 심지어는 수호하고 처음 만났을 무렵 그의 성별을 오해한 내가 최수호랑 결혼하겠다고 떠들어 댔던 걸 떠올리면서 형 딴에는 고민이 깊어졌던 모양이다.
그렇다면 정열은 사실 어릴 때부터 수호를 좋아했던 것인가. 내 동생은 게이인가. 옛날부터 가족들한테 말도 못 하고 혼자 고민한 건가.
가서 다 안다고 해야 하나? 본인이 말할 때까지 모르는 척해 줘야 하나? 은근하게 고민 있으면 뭐든 말해도 된다고 알려?
대강 이런 고민으로 머리가 터져 나갔다는 걸 형은 몇 마디로 간략하게 설명했다.
내가 최수호랑 울고불고하는 사이, 사연을 모르는 형의 고민은 더욱 깊어만 갔다.
인터넷부터 각종 서적, 성 소수자 부모 연합 가입까지 찾아봤다는 소리를 들으니 나랑 최수호가 열심히 연애질에 돌입하는 동안 정체성 고민은 우리 형이 대신 다 해 주고 있었지 싶다.
“정열 씨, 집에서 참 사랑받는구나.”
“…….”
“막내구나. 귀엽다.”
황 감독님이 허허실실 내 등을 두드렸다. 다 맞는 말이긴 한데 이렇게 들으니까 괜히 쑥스럽다.
“그건 그렇고, 왜 여기까지 따라오셨어요.”
형의 설명을 들은 후 하도 얼굴이 뜨거워서 세수를 핑계로 자리를 떴다. 화장실로 도망쳐 와서 찬물을 연거푸 얼굴에 끼얹고 있는데 황 감독님이 슬그머니 안으로 들어섰다.
그러고 나서 이러고 날 놀리는 중이다.
“첫 커밍아웃에 떨려서 울고 있으면 등 두드려 주려고.”
“진짜 차단할 거예요.”
“그러지 마. 문자 해 줘.”
못 들은 척 화장실을 빠져나와 사무실로 돌아갔다. 사무실에는 천 관장님과 예 사범님뿐이었고, 사무실 테이블은 어느새 깨끗이 정리돼 있었다.
“형은요?”
“갔어. 이제 가서 체육관 열어야 한다더라.”
“벌써요? 하여간 성질 엄청 급해.”
예 사범님하고 눈을 못 마주치겠다. 두 분한테 이렇게 급하게 고백할 마음은 없었는데.
“열아, 너랑 수호에 대해서 할 말이 있는데.”
“……네.”
예 사범님이 목소리를 까는 바람에 긴장했다. 또 뭐가 남았나.
“연애하느라 훈련 소홀히 하고 그러면 안 된다.”
“…….”
“그건 절대 용납 못 해. 알지?”
“……네. 저 걔랑 아직 안 사귀어요.”
“그래? 잘됐다. 메달 따기 전까지 사귀지 마. 알았지.”
“여보야, 왜 그래요. 애들 알아서 하게 내버려 둬.”
“수관 씨가 몰라서 그래. 열이는 성실해서 괜찮을 것 같지? 불붙으면 원래 열이 같은 애들이 제일 무섭게 빠지는 거예요. 나 봐, 어? 자기 만나려고 자기네 숙소 담치기했던 거, 기억 안 나?”
두 분이 불꽃 같은 연애를 하셨구나. 오늘은 여러모로 정보량이 과한 날이다.
“정열 씨, 밖에 정진 선수 있더라.”
황 감독님이 사무실로 들어오면서 바깥을 가리켰다.
간 줄 알았더니 밖에 있었나 보다. 말이라도 할 것이지.
서둘러 체육관 앞으로 나가자 주머니에 손을 꽂고 서 있던 형이 나를 힐긋 보았다.
“가는 거야?”
“버스 기다리는 중인데.”
“버스 정류장 맞은편이잖아.”
“…….”
“나한테 더 할 말은 없냐?”
“엄마가 너 걱정하신다. 연락 드려.”
형이 꺼낸 말은 수호 얘기도, 복싱 얘기도 아니고 우리 엄마 얘기였다. 형답다.
“나 호적에서 나가라며.”
“어, 글러브 벗기 전까지 집에 들어올 생각은 하지도 마.”
좀 전의 감동이 달아날 정도로 살벌한 말투였다. 이것도 형답다.
“나는 여전히 네가 복싱하는 거 반대고, 계속하는 한 동생으로 생각 안 해.”
생각 안 하긴. 그럼 생판 남인 인간이 내가 동성 친구한테 차이고 심란할까 봐 걱정돼서 여기까지 헐레벌떡 뛰어왔냐.
이제는 형이 매몰차게 말해도 별 타격이 없다. 무표정하게 눈을 부라려 봤자 그간 형이 했던 삽질이 떠올라서 무섭지도 않다.
“그래도 수호랑은, 별로 나쁘게 생각 안 한다. 그럴 이유도 없고.”
말하고 나서 형은 어색하게 미간을 찌푸렸다.
“수호한테 잘해라. 간다.”
기껏 밖에서 기다리더니, 형은 그 얘기만 하고 돌아섰다. 하여간 하나부터 열까지 형다웠다.
“나 올림픽 나가기로 했어.”
뒤돌아선 형의 등이 움찔했다.
“그냥 그렇다고. 형이 옛날에 빌려 준 메달 갚을게.”
형은 돌아보지 않았다. 아무 말도 하지 않고 길을 건너가 버렸다. 잘해 보라는 흔한 응원조차 없었다.
형은, 역시 우리 형이다.
형이 가 버리고 나서, 나는 안으로 들어가는 대신 건물 벽에 기대 핸드폰을 들었다. 이왕 말 나온 김에 엄마한테 연락이나 하고 들어갈 작정이다. 이런 건 시간 안 끌고 그때그때 하는 게 제일이다.
막상 엄마한테 전화하려고 마음먹자 손이 더디게 움직였다. 날마다 전화했던 번호인데 괜히 떨리고 난리다.
- 열이니?
엄마는 신호음이 울리자 곧바로 전화를 받았다.
“박 여사님, 잘 지내십니까?”
- 너는 애가, 애가. 대체 어떻게 된 애가 말없이 짐 싸 들고 휙 나가면 그만이야. 왜 연락을 안 해.
한참 벼른 사람처럼 말이 아주 속사포다. 흥분하면 말 빨라지는 내 버릇은 엄마 닮은 게 틀림없다.
“정 사장님이 안부 전해 주실 줄 알았지. 두 분이 요즘 얘기 안 하세요?”
- 아버지가 얘기해 주는 거랑 너한테 듣는 거랑 같아? 기가 막혀. 하여간 아들 놈 길러 봐야 하나 소용없어.
“그래도 딴 아들 하나는 소용 있던데. 형이 엄마한테 전화하랬어.”
- 진이랑 화해했어?
“화해는 아니고. 그냥 잠깐 만났어.”
엉겁결에 최수호랑 사귈 거라고 깜짝 발표도 하고 형이 나도 모르게 내 편을 들어주고 있던 것도 알게 됐지만, 그걸 화해라고 부르긴 뭐 하다. 형은 내가 메달을 따 와도 눈물을 흘리며 얼싸안고 화해해 주진 않을 것 같다.
- 정말 복싱 그대로 계속하려고?
“어, 재수 학원도 이미 아빠가 가서 학원비 다 환불받았어. 나 복싱 아니면 따로 할 것도 없어.”
- 할 게 왜 없어. 하려고 들면 다 하지. 네가 얼마나 머리가 좋은데.
“나 재수 학원 테스트, 거의 낙제점이었는데?”
- 그 머리랑 달라.
머리가 두 개 달린 것도 아닌데 대체 뭐가 다르다는 건지 몰라도 엄마가 그렇다면 그런 거겠지. 성적은 잘 안 나와도 아무튼 난 머리가 좋은 놈인 걸로 하자.
- 영상 통화 좀 해 봐. 잘생긴 얼굴이나 보게.
엄마가 갑자기 나를 채근했다. 아빠가 출장 갔을 때나 시키던 건데. 예전에도 천 관장님네 살다시피 하던 때가 많아서 별생각 없었는데 내가 가출 중이긴 하구나.
“이럴 때만 잘생겼대. 잠깐만.”
영상 통화를 켜자 액정에 사람 얼굴이 가득 찼다. 표정이 칙칙한 우리 엄마가 카메라를 쳐다보고 있다.
- 거 봐. 얼굴에 멍이, 그게 뭐야.
엄마가 핸드폰에 고개를 바짝 붙이고 내 얼굴을 뜯어보며 탄식했다. 멍도 거의 빠졌는데 이 정도 반응이라니, 맞자마자 봤으면 기절하셨겠다.
- 복싱 다시 하자마자 얼굴이 왜 그 모양이야. 엄마가 이래서 반대하는 거야.
“엄마, 이건 형이 때린 거야.”
- 아유유…….
엄마가 푹, 한숨을 쉬었다. 엄마 아들이 마우스피스도 안 끼고 동생을 두들겨 팼다고요, 아주.
“걱정하지 마. 나도 때리긴 했으니까.”
- 자랑이다. 하여간 정 씨들.
“아무튼, 박 여사 언제 한가해. 나 엄마랑 아빠한테 할 말 있어.”
- 너희 아빠 쉬는 날 엄마도 쉬지. 무슨 말이길래.
“그때 알려 줄게. 최수호랑 같이 얘기해야 돼.”
- 수호랑? 나쁜 얘기는 아니지?
“어, 아마도.”
엄마랑 아빠가 내가 좋아하는 게 남자라는 사실에 충격받아 쓰러지지만 않는다면. 혹시 그러면 형한테 도와 달라고 해야지, 뭐.
형 때문에 집에서 나와 놓고 형한테 구조 신호 보낼 계획을 세우고 있는 게 이상하긴 한데, 관계란 건 그런 거 아닐까. 어떤 건 서로 용납할 수 없다가도 어디서는 한편이 되기도 하는 거.
“끊을게. 오후 훈련하러 가야 해.”
- 밥 잘 챙겨 먹어.
“잘 먹고 있어.”
월드 챔피언들의 영양을 고려한 선수식으로 삼시 세끼 채우고 있다. 천 관장님네 있다는 걸 들었으면 엄마도 그런 면에서는 안심하고 있을 거다.
- 열아, 힘들면 언제든 그만두고 집에 와.
애정 어린 응원이었지만, 엄마의 바람이기도 한 것 같았다.
형과 엄마는 내가 여전히 포기하길 바란다.
“엄마, 미안해. 계속해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