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9.
모자를 쓴 남자는 안을 들여다보려 서성대는 것 같다가도 금세 딴청이다. 본인 딴에는 안 수상해 보이려고 애쓰는 것 같은데 바로 그 점이 엄청나게 수상해 보였다.
큰 키, 굳게 다물린 입가, 뭣보다 저 어색한 동작.
모로 봐도 우리 형이다.
“진이가 여길 왜 왔지?”
“열이 보러 왔나?”
예 사범님이나 천 관장님이나 적잖이 당황한 투였다. 하지만 이 중에 제일 당황한 건 역시 나일 거다. 형이 왜 거기서 나와?
모두가 의아해하는 가운데 예 사범님이 입구로 저벅저벅 걸어갔다.
유리문이 활짝 열리면서 차가운 바람이 불어닥쳤다. 모자챙 아래 당황으로 얼룩진 형의 얼굴이 보인다.
“진아! 들어와서 같이 점심 먹자!”
나는 내가 아는 사람 중 가장 불도저 같은 사람이 누군지 기억해 냈다. 나도 아니요, 최수호도 아니요, 바로 예 사범님이었다.
* * *
어쩌다 이 멤버로 옹기종기 앉아 점심을 먹게 됐을까.
최수호네 어머니하고 마주 앉아서 밥 먹을 때만큼이나 어색해서 체할 것 같다.
예 사범님과 천 관장님, 나랑 황 감독님, 그리고 우리 형.
황 감독님까지는 그렇다 쳐도 마지막 멤버가 문제다.
차라리 거절하고 가 줬으면 좋았으련만, 정진은 후퇴가 없는 사나이였다. 존나 멋진 우리 형답게 꼴사나운 모습으로 도망을 치느니 이 불편한 점심 식사에 끼어 앉고 말았다.
체육관 1층 사무실에 둘러앉아 도시락 뚜껑을 따고 있으려니 입맛이 뚝뚝 떨어진다.
“와, 되게 건강한 식탁이네.”
“열이랑 같이 선수용으로 먹고 있어서요. 딴 거 드릴까요?”
“아닙니다. 닭가슴살 좋아합니다.”
닭가슴살, 달걀, 녹황색 채소와 플레인 요거트 등, 체중 조절용 식단 일색인 테이블에서 황 감독님은 어색하게 젓가락을 고쳐 쥐고 있었다. 반면 형은 익숙하게 파프리카를 씹었다.
“진아, 체육관은 닫고 왔어?”
“방학 끝나고 개관 시간 늦춰서요.”
“우리도. 요즘 체육관은 잘 돼?”
“예, 그냥저냥.”
“잘됐다. 우리 체육관이랑도 교류 좀 해. 올해도 우리 체육관에서 지역 경기 여는 거 알지?”
“예.”
서늘한 공기가 몰아치는 식사 자리에서, 예 사범님만 아무렇지 않게 우리 형한테 말을 걸고 있다.
그리고 넋이 빠진 인간처럼 단답 중인 우리 형 때문에 내가 더 눈치 보이는 중이었다.
나 모르는 사이에 싸가지를 어디다 바꿔 먹고 온 건 아닐까. 아무리 요즘 천 관장님한테도 막 나가고 나랑 싸웠다지만, 갑자기 왜 저럴까. 예의범절 빼면 시체던 인간이.
거기다 내가 아는 형이라면 갑자기 여기 얼굴을 디밀 이유가 없었다. 링에서 한 판 붙고도 내가 짐 싸서 챙겨 나갔으면, 제 발로 돌아올 때까지는 본인 말대로 그냥 안 보고 살 인간이다.
근데도 굳이 여기 온 건…….
역시 최수호 때문에? 나 뜯어말리러? 2층 가서 정진이랑 한 판 할 준비해야 하나?
“정열 씨, 치커리 먹을래?”
아몬드를 씹으며 고민에 잠긴 내게 황 감독님이 슬그머니 자기 그릇을 밀었다.
“나이가 몇인데 편식을 하세요.”
“치커리랑 사이가 안 좋아서 그래.”
하여간에 말은 잘한다. 황 감독님 그릇에 있던 치커리를 씹고 있자 형한테서 시선이 느껴졌다. 그것도 아주 따가운 시선이다.
“왜?”
예 사범님이 형 눈앞에서 젓가락을 휘휘 흔들었다. 형이 나 쳐다보다 갑자기 내 얼굴에 글러브를 내던질까 걱정이라도 되시나. 짬밥이 어디 가진 않는지 가히 대치 중인 선수들을 살피는 심판의 태도라 하겠다.
“아뇨. 그냥. 저희 체육관 다니시죠?”
형은 나 대신 황 감독님에게 말을 걸었다.
“앗, 예. 아까 인사드린다는 게. 관장님하고 여기서 뵙네요, 하하.”
황 감독님이 넉살 좋게 묵례하는 동안 나하고 천 관장님은 접시나 부지런히 비우고 있었다. 분위기는 여전히 못내 껄끄럽다.
“너희 체육관 회원 빼돌린 건 아니고, 수관 씨한테 영화 같이 찍자고 제안하러 오신 거래.”
“수호 찍는다는 그 영화요?”
시선이 자연스럽게 황 감독님에게로 몰렸다. 내 그릇에 슬그머니 셀러리 줄기를 넣던 황 감독님이 급하게 헛기침을 했다.
“그, 영화 얘기는 지금 말고 나중에 하죠.”
“왜요?”
형의 반문에 황 감독님이 눈에 띄게 당황했다.
정진 왜 저래. 답지 않게 이럴 때 토를 달고 난리다.
“아무래도 정진 선수, 아니 관장님 듣기에는 불편하실 수도 있을 것 같아서.”
“제가요?”
“영화 내용이 좀…….”
황 감독님이 어물거렸다.
“영화 내용이 어떤데요?”
예 사범님이 호기심 어린 태도로 물었다. 황 감독님은 들고 있던 방울토마토를 황급히 입에 던져 넣었다.
“영화에서 최수호가 게이로 나와요.”
어떻게 설명해야 하나, 보기에도 말문이 막힌 표정이라 그냥 내가 선수를 쳤다. 나하고 우리 형 때문에 눈치 보고 있는 걸 테니까.
볼이 볼록해지도록 토마토를 입에 문 황 감독님이 급히 고개를 끄덕거렸다. 키우는 동물은 주인하고 닮는다던데, 반대로 본인이 햄스터 닮아 가시는 중인가.
“요즘 시대에 뭘 그런 걸 가지고. 아, 그러고 보니 나 이 영화 얘기 기사로 본 것 같은데. 수호랑, 그…… 잘생긴 배우 누구지?”
예 사범님은 대수롭지 않게 배우 얘기로 나아갔다.
“양용배요.”
“아냐. 그런 이름 아니었는데.”
“장혁준?”
듣고 있던 천 관장님이 끼어들자 예 사범님이 손뼉을 쳤다.
“맞다! 장혁준.”
“걔랑 최수호랑 둘이 좋아하는 사이로 나와요.”
내 부연 설명에 맞은편에 앉아 있던 형 눈썹이 꿈틀거리는 게 보였다. 딱 봐도 마음에 안 들어 하는 표정이다.
이건 빼도 박도 못하겠다.
존나 멋진 우리 형이 호모포비아라니.
“열아, 갑자기 왜 표정이 안 좋아.”
“제가요? 아니요.”
우리 형이 나하고 내 예비 애인을 반대해서 그런 거라고 말할 수는 없어서 닭가슴살만 열중해 씹었다.
왜 사귀지도 않은 시점에 벌써 온갖 단계는 다 밟는 기분이냐. 상대방 어머님께 인사드리는 것부터 가족인 형의 반대까지, 아주 골고루 겪는 중이다.
“수호는 왜 그런 영화를 찍어서.”
형이 중얼거렸다.
삽시간에 주변이 조용해진 걸 본인만 모르는 기색이다. 내가 볼 때 저건 정진이 생각이 많을 때 자기도 모르게 머릿속 생각을 입 밖에까지 꺼낸 경우인데, 현역 시절 매체에서 인터뷰하다가도 저 버릇 때문에 오해받은 적이 몇 번 있다.
“진아, 너 무슨…….”
“최수호가 그 영화 찍는 게 왜.”
천 관장님이 말리기도 전에 내가 먼저 언성을 높였다.
다 참아도 최수호한테 함부로 구는 건 못 참는다.
“형, 최수호한테 불만 있냐?”
“뭐?”
“왜 최수호한테까지 시비냐고. 혹시 수호 앞에서도 그따위로 말해? 오늘 그랬냐?”
말하다 보니 점점 더 울컥한다. 뭐라고 했길래 애가 가자마자 나한테 전화를 거냐.
형은 어이가 없다는 얼굴이다. 가만히 있다가 가족의 반대에 부딪힌 사람은 난데, 형이 왜.
“정열, 넌 밸도 없냐? 수호가 그렇게 좋아?”
“어.”
저런 유치한 질문을 다 하냐 싶으면서도 나도 애처럼 고집스럽게 대꾸했다. 그냥 말이 그렇게 나온다.
“그러니까 최수호한테 뭐라고 하지 마. 할 말 있으면 나한테 해.”
듣고 있던 형이 탁, 소리 나게 젓가락을 내려놓았다.
“걱정돼서 와 줬더니.”
“형이 내 걱정을 왜 해. 이게 걱정할 일이냐?”
“또 쓰러져서 병원 실려 갈까 봐 걱정했다, 이 새끼야. 거기서 또 헛소리하며 수호나 찾을까 봐.”
“그건 또 뭔 소리야. 시비를 걸려면 상황에 맞게 걸어.”
“시비? 정열, 나와. 둘이 얘기하게.”
“나오라면 못 나올 줄 아나.”
이미 한 번 싸운 거 두 번은 못 싸우겠냐. 형하고 나는 거의 동시에 일어서서 테이블 바깥쪽으로 빠져나왔다.
그리고 순식간에 도로 잡혀서 끌려갔다.
“정진, 정열. 그만 싸우지?”
도복을 입은 것도 아닌데 손쉽게 뒷덜미가 낚였다. 티셔츠 목 뒤가 잡혀 질질 끌려간다.
“너희 왜 이래.”
우리 두 형제의 덜미를 양손에 틀어쥐고서, 예 사범님은 꼭 일곱 살배기 말썽꾸러기를 다루듯 우리를 다그쳤다.
진짜 일곱 살 때도 예 사범님한테 이렇게 혼나진 않았는데. 일단 그땐 형하고 안 싸웠다.
갑자기 더 분해졌다. 형하고 왜 이러고 있어야 하나 싶고, 왜 정진은 요즘 사사건건 내가 하는 게 다 싫은가 싶고, 최수호랑 사귀는 게 뭐 어때서 그런가 억울하다. 내가 뭘 잘못했다고.
우리 형하고 이러기 싫은데. 그냥 전부 다 억울하다.
복싱, 아니면 우리 형. 최수호, 아니면 우리 형.
왜 자꾸 그런 선택을 하게 만드냐고, 나한테.
“씨…….”
“열아, 울어?!”
예 사범님이 화들짝 놀라 내 목을 잡은 손을 놓았다. 목이 자유로워졌는데도 고개를 못 들겠다.
“아니요…….”
정말 우는 건 아니다. 이 상황이 거지 같고 섭섭해서 표정 관리가 안 될 따름이다.
“형은 내가 최수호랑 사귀는 게 그렇게 싫냐?”
이마에는 열이 올랐고 시뻘겋게 물들었을 귀도 뜨끈했다. 애처럼 칭얼거리고 있단 생각이 들었지만 이미 말이 입 밖으로 나간 뒤였다.
“정열, 무슨 소리야.”
“하나밖에 없는 동생이 좋다는데, 그냥 그러려니 해 주면 안 되냐? 인간이 왜 그렇게 꽉 막혔냐. 나였으면, 형이 남자가 아니라 외계인이랑 사귀어도 형수라고 불러 줬어. 복싱 때문에 화낸 건 그렇다 쳐도 어떻게 수호한테까지 이러냐.”
말이 앞다투어 입 밖으로 뛰쳐나왔다. 제어가 안 되는 수준이었다.
한꺼번에 쏟아 내느라 어깨는 들썩대고 숨은 가빠졌다. 쪽팔렸지만, 이미 쏟은 걸 주워 담을 수는 없다.
“그게 뭔 소리냐고. 수호는 양용배랑 사귀는 거 아니야?”
형이 딱 나처럼 씩씩거리며 말했다.
“형이야말로 뭔 소리야. 최수호가 양용배랑 왜 사귀어.”
“진짜 무슨 소리야? 수호랑 열이랑 사귀니?”
황당해하는 와중에 들려온 정곡을 찌르는 말에 놀라 내내 숙였던 고개를 치켜들자 나만큼이나 황당한 표정의 형이 보였다. 비슷비슷한 얼굴인 예 사범님과 천 관장님, 입을 떡 벌리고 나를 향해 엄지를 척 치켜드는 황 감독님도.
아직도 이게 정확히 무슨 사태인지는 모르겠는데, 적어도 아주 엉망진창이라는 것만은 알겠다.
홀딱, 쫄딱 망했다.
* * *
“정열 씨, 커밍아웃 진짜 잘한다.”
“놀리면 감독님 번호 차단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