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8.
형, 제 어디가 마음에 안 들어요.
소용돌이치는 충격 속에서 핸드폰을 꺼냈다. 열이한테 전화하기 위해서였다.
이제 훈련 들어가야 할 텐데 심란하게 하고 싶지는 않지만, 이건 아무래도 말해야 할 상황인 것 같다.
핸드폰을 타고 열이가 내 이름을 부르는 게 들리자 나도 모르게 목소리가 가라앉았다.
“열아, 선인장이 문제가 아닌 것 같아.”
ROUND. 정열
한마디로 어릴 때의 우리 형을 묘사하자면, 그야말로 ‘정의의 사자’라고 할 수 있겠다.
형은 불의를 보면 그냥 넘어가지 않는 어린이였다. 자기보다 훨씬 큰 고등학생 형들하고 싸운 적도 있었는데, 마침 그곳을 지나가던 예 사범님이 아니었으면 경을 칠 뻔했지만 형은 마지막까지 겁먹지 않았다.
형은 무슨 경기든 나가기만 하면 이길 정도로 강했고, 공부든 뭐든 해야 할 일도 알아서 척척 다 잘했다.
정진이 우리 형이라는 말에 나보다 한참 형이나 누나들도 내게 한 수 접어주었으며, 어른들도 좋겠다고 내 어깨를 두드려 주곤 했다.
어린 내 눈에 형은 영웅이나 다름없었다.
속된 말로 존나 멋있었다.
거기다 우리 형은 늘 나를 챙겼다. 의리와 우애를 아는 존나 멋있는 형 아래에서, 나는 형처럼 되겠다는 다짐과 함께 무럭무럭 자라 왔다.
“형이 호모포비아 맞구나.”
“몰라요, 아직.”
“수호 씨한테 축하 못 해 준다고 뭐라고 그랬다며.”
황 감독님의 지적에 입이 텁텁해졌다.
그렇다. 존나 멋진 우리 형이 조만간 나한테 너 남자랑 사귀고 그런 놈이냐고 멱살잡이할 참이다.
복싱 다시 시작한다고 쥐어 터진 것도 모자라서 최수호랑 사귄다고 한 판 붙게 생겼다. 이번에는 져 줄 수도 없는 싸움이다.
다 떠나서, 그런 걸로 싸우는 것 자체가 하나도 안 멋있다.
형이 나한테 상처 줄까 봐 무섭다. 내가 다치는 게 무서운 게 아니라 혹시라도 형한테 실망하게 될까 봐 무섭다.
형은 나한테 계속 멋있는 사람이었으면 좋겠는데.
“그건 그거고, 왜 황 감독님이 여기 계세요.”
여기란 예 사범님과 천 관장님의 체육관, 2층 매트 위. 천 관장님은 잠시 1층에 출타 중. 나는 아침 훈련에 쓴 운동 도구 정리 중. 황 감독님은 따라다니면서 그런 나를 구경하는 중이다.
“정열 씨가 불렀잖아.”
“제가 언제요.”
“전화했잖아. 커밍아웃 상담하길래 나는 당장 쏜살같이 와서 한잔 사 달라는 줄.”
최수호한테 얘기 듣고 놀라서 멍청히 있다가 황 감독님부터 찾고 말았다. 횡설수설하는 내 얘기를 황 감독님은 인내심 있게 들어 주었다. 나 보러 오겠다고 체육관까지 오실 줄은 몰랐지만.
거기다 복장도 지난번보다 훨씬 힘이 들어간 세미 정장인 걸로 봐서 영화 때문에 어디 돌아다니다 시간 내신 모양이다.
“어디 물어볼 데가 감독님밖에 없더라고요.”
“잘 생각했어. 큰 도움이야 못 줄지 몰라도 경험자가 옆에 있으면 안심이 되잖아. 동지가 있다는 안도감?”
그렇긴 하다. 당장 전화해서 물어볼 사람도 없었으면 막막했을 거다.
사실 지금도 막막하긴 하지만.
내가 먼저 찾아가서 선빵을 날려야 하나. 형이 연락할 때까지 기다려야 하는 건가.
연락되면 또 뭐라고 하지?
나랑 최수호랑 사귀는 데 불만 있냐고? 불만 있으면 한 판 붙자?
붙어서 이기면 어쩌고, 지면 또 어쩌나.
“어떻게 해야 해요?”
“음, 내 커밍아웃은 망하기만 했던 거 알지?”
“…….”
“그것도 홀딱, 쫄딱 망했어.”
웃으면서 말하니까 뭐라고도 못 하겠다.
“저도 망할까요?”
“윤서화 선생님이랑은 잘 얘기됐다며.”
“아무 얘기도 안 했는데요. 그냥 밥 몇 분 먹다가 알겠다고 하고 가시던데. 우리끼리 알아서 잘해 보라고.”
“완전 대성공이네.”
황 감독님이 목을 젖히며 껄껄거렸다.
“최수호랑 저는 한 게 없는데 무슨 대성공이에요.”
“원래 고백이란 건 들어주는 쪽 마음에 달렸어.”
“하는 사람은 뭔데요, 그럼.”
“자기 자신한테 아주 건전하게 정직해지기? 고백이란 게 그런 거지, 뭐.”
황 감독님 얘기는 이상하게도 듣다 보면 뭔가 그럴싸해서 설득당하는 기분이다.
“결론은, 망해도 그냥 해라?”
“결론은, 결과를 두려워하지 마라.”
황 감독님이 멋지게 손가락을 까딱거렸다. 우리 형처럼은 아니지만, 황 감독님도 가끔 멋있어 보일 때가 있긴 하다. 가끔. 잠깐. 되게 찰나의 순간만.
“근데 사실 그게 말처럼 되겠어.”
“홍희백 감독님하고는 연락하세요?”
얘기하다 보니 생각나서 물었는데 황 감독님은 의표를 찔린 듯 입을 다물었다.
“안 하시는구나. 꼭 연락할 필요는 없죠.”
“하하…….”
“보고 싶어 하시는 것 같길래 물어봤어요.”
황 감독님은 그저 침묵했다. 어째 표정이 시무룩해 보인다.
“촬영은 언제 시작해요?”
화제를 바꾸자 황 감독님이 잽싸게 입을 열었다.
“지금 제작사랑 계약 체결하고 스태프랑 배우 캐스팅 중이야. 제작자가 장소 협의 빠르게 진행하고 있어서 촬영 자체는 금방 들어갈 것 같은데. 주연 배우 금방 확정돼서 살았지.”
“엄청 바쁘시단 소리네요. 근데 이런 데서 시간 낭비하셔도 돼요?”
“시간 낭비라니. 정열 씨 일인데.”
“…….”
“감동했어?”
“뭐, 조금?”
바쁜 와중에 내 얘기에 달려와 줬다는 데 놀라움과 감동 정도는 느끼고 있다.
“그런 의미에서 천수관 선수한테 카메오 출연, 부탁할 수 없을까.”
황 감독님이 은근하게 속삭였다. 방금까지 느껴지던 감격이 급속히 흐려지는 중이다. 도대체 어디서 의미가 연결되는 건지 도통 모르겠네요.
“이게 본 목적이셨죠?”
“무슨 소리. 온 김에 얘기한 거지, 사심으로 여기까지 온 건 아니야. 진짜.”
이걸 믿어야 하나. 눈을 흘기는 내게 황 감독님은 온 얼굴 근육을 다 써서 결백을 주장했다.
“팬이면 아실 거 아니에요. 이제 미디어 출연 일절 안 하신다니까요.”
“팬이라 아는 게 또 있지. 정진 선수 밀어 줄 때 한창 방송이며 뭐며 가리지 않고 나왔었잖아.”
우리 형이 스타 선수로 갓 주목받을 때의 얘기다. 훈련 비용 충당과 지원을 받기 위해 천 관장님이 대중들 앞에 발 벗고 나섰었다는 훈훈한 미담인데, 형이나 관장님이나 방송 체질은 아닌 사람들이라 골머리도 많이 썩었다.
시도 때도 없이 연락하면서 나중엔 시비를 걸고, 허락 안 한 내용까지 내보낸 방송 관계자나 황색 언론에 우리 형은 넌더리를 냈다. 천 관장님은 익숙해 보였던 걸로 미루어 전성기에 천 관장님이 얼마나 시달렸는지 알 만했다.
고작 1~2년 남짓 고생한 것만으로 우리 형은 지금도 인터뷰라면 이를 가는데 그런 걸 직업으로 삼고 있다니 최수호도 대단하다.
생각이 자연스레 최수호로 빠진다. 요즘 자꾸 기승전, 최수호다.
“최수호 나오면 됐지, 뭘 자꾸 욕심을 부리세요. 온 동네 사람들 끌어모아서 사심으로 출연시키지 마시고 하던 캐스팅이나 마저 하세요.”
“캐스팅 중이니까 하는 말이지. 나한테 그 시절의 천수관 선수는 또 빼놓을 수 없는 청춘의 상징 같은 거라고. 그리고 수호 씨하고 하는 작품이니까 더! 잘해 보고 싶은 마음, 정열 씨도 이해하지?”
“잘 이해 안 되는데요.”
“이럴 때 보면 수호 씨랑 둘이 말하는 게 참 비슷해.”
“맨날 붙어 지냈는데 그럼 안 닮겠습니까. 감독님 말씀은 저더러 관장님 설득해 달라는 거예요?”
“내가 말하면 단칼에 거절당할 게 뻔하잖아.”
정면으로 붙으면 나가떨어질 걸 알면서도 주위를 맴돌며 파고들 틈을 노리는 저 끈질긴 자세는 확실히 본받아야겠다.
불굴의 의지라는 게 따로 있는 게 아니다. 본인 말대로 홀딱 망하고도 다시 일어서 본 사람이라 더 꿋꿋한가.
링에서의 패배가 다음 시합을 위한 경험으로 축적되듯 삶의 실패에도 비슷한 면이 있는 건지도.
“말씀은 드려 볼게요.”
황 감독님이 이래저래 도와줬으니만큼, 나도 돕고는 싶다. 빚을 갚겠다기보다는 황 감독님이 좋은 사람이라서.
“언제? 지금?”
“예, 지금.”
천 관장님도 바로 아래층에 계시겠다, 딱히 시간 끌 이유는 없다. 내가 성큼성큼 걸어 나가자 황 감독님이 뒤늦게 계단을 따라 내려왔다.
“진짜 지금?”
“가짜 지금이겠어요.”
“수호 씨도 그러더니, 정열 씨도 진짜 행동력 짱이네.”
“아무리 그래도 최수호만큼은 아니에요.”
이건 정정하고 싶다. 그 어려운 어머니랑 식사하다가 결혼하겠다고 선언하는 최수호처럼 막무가내로 들이박진 않는다고요.
1층으로 내려가자 예 사범님과 천 관장님이 나란히 서서 얘기를 나누고 있었다. 아직 애들 학교 끝날 시간이 아니라 그런지 도장은 조용하다.
“정열이! 오후 로드워크 코스 확인했어?”
다가가는 나를 발견하자 예 사범님이 활기차게 말을 붙였다.
“맨날 가던 산이잖아요.”
“코스가 달라, 코스가. 오후 훈련 들어가기 전에 점심 먹어야지. 옆에 계신 분은 누구야?”
“천 관장님 팬이요.”
구구절절 늘어놓기도 뭐 해서 간략하게 소개했더니 예 사범님이 휘파람과 함께 팔꿈치로 천 관장님을 쿡쿡, 찔러 댔다. 얼결에 지목당한 천 관장님이 쑥스럽다는 듯 한껏 고개를 저었다.
“아니야. 수호랑 일하는 영화감독님이시래. 열이 지인 분.”
“관장님더러 영화 출연해 달라고 하시는데요.”
대뜸 말하자 예 사범님과 천 관장님은 물론이고 내 옆에 서 있던 황 감독님까지 나를 쳐다봤다. 내 팔꿈치 언저리를 붙드는 황 감독님의 손길이 다급했다.
“정열 씨, 무슨 말을 그렇게 갑작스럽게.”
갑작스러웠던 건가. 뭐라고 서론이라도 깔았어야 했나.
멀뚱하게 쳐다봤더니 황 감독님이 뭐라고 중얼거렸다. 아마 최수호랑 내가 똑같단 얘기였던 것 같다.
“저도 단역으로 나오거든요. 관장님도 출연해 주세요.”
“나, 내가?”
천 관장님이 더듬거리다 도움이라도 청하려는 듯 예 사범님에게로 고개를 돌렸다.
예 사범님은 전혀 다른 곳을 보고 있었다. 천 관장님도, 나도 아니라, 체육관 바깥을.
“진이네?”
“아뇨, 형은 안 나오는데.”
핀트가 안 맞는 말에 나도 모르게 대답하면서 예 사범님의 시선을 따라가자, 체육관 바깥에 야구 모자를 푹 눌러쓴 남자가 보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