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76화 (76/88)

76. 

내가 깨웠나.

일단 입을 다물고 기다리는데, 열이는 나를 타박하는 대신에 비척거리며 상체를 세웠다.

“물.”

중얼대는 열이의 어깨에서 이불이 흘러내린다. 군살 없이 근육으로 촘촘한 등이 무방비하게 드러났다.

“내가 떠다 줄게.”

“아, 됐어. 너 안 잤냐?”

“방금 깼어.”

“잠도 없다. 울 엄마가 챙겨 준 보약이 약효가 좋은가, 넌 어떻게 선수하고 체력이 비슷하냐…….”

중얼거리며 바닥에 떨어진 가운을 주워 입은 열이가 침대에서 내려갔다.

“윽.”

바닥을 디디는 것과 동시에 열이가 그대로 주저앉았다.

“괜찮아, 열아?”

“……물어보지 마.”

이를 악물고 대답하는 것부터가 안 괜찮게 들린다. 서둘러 열이 앞으로 갔더니 열이가 분한 듯 주먹을 쥐었다.

“야, 넌 왜 멀쩡해.”

“아마 네가 더 무리해서? 일으켜 줄까?”

“그러니까 왜 나만 무리했냐고.”

“그건…….”

“됐다. 말하지 마.”

열이가 낑낑대면서 일어섰다. 여전히 허리는 엉거주춤 굽어진 채다.

“안 되겠다. 오늘 운동하려면 뻗어 있어야 돼.”

포기를 선언한 열이가 도로 침대에 드러누웠다. 냉장고에서 꺼내 온 생수를 잔에 따르는 동안에도 침대에서 쏘아져 오는 눈총이 따갑다. 지은 죄가 있는 처지라 묵묵히 물 잔만 채웠다.

잔을 건네자 열이가 부스스하게 일어나 앉았다. 막 깨어났을 때보다 더 지친 낯빛이다.

“물 너무 차갑지는 않아?”

“내가 물고기냐. 수온 맞춰 주려고 들게.”

투덜거리면서도 열이는 금세 잔을 비웠다. 머리가 까치집이라 그런가, 아직도 졸려 보였다.

“넌 왜.”

“응, 나 왜.”

“대체 왜 막 일어나도 커피 CF 찍는 놈 같은데?”

“내가 그래?”

“왜 너만 산뜻하냐고. 난 예고 없이 링에 끌려 올라가서 두들겨 맞은 놈 같은데, 넌 왜 얼굴도 하나 안 붓냐? 왜 혼자 장르가 청춘 로맨스야. 짜증 나게.”

“열아, 부끄러워?”

정곡을 찔렸는지 열이가 갑자기 입을 다물었다.

막 일어나서 정신도 제대로 못 차리면서 꾸역꾸역 자꾸 말하는 걸 보면 할 말이 있는 게 아니라 조용히 있을 수가 없는 거다. 부끄러워서.

째려보다가도 눈이 마주칠라 치면 슬쩍 시선을 돌려 버리는 것도 그렇고. 이런 면에서 열이는 알기 쉽다.

“부끄러워할 필요 없는데.”

“…….”

“예전에도 우리 자주 같이 잤잖아.”

“그거랑 이거랑 같냐.”

“달라?”

“…….”

“그때나 지금이나 친군데? 아직 사귀는 사이도 아닌데, 우리.”

“너 지금 복수하는 거지.”

“아니. 내가 어떻게 너한테 복수 같은 걸 해.”

열이가 귀엽게 입술을 앙다물었다. 벌써 귀가 빨갛다.

다시 잔을 채워 주자 열이는 말없이 물을 마셨다. 꼴깍꼴깍, 물을 삼키는 소리만 조용한 호텔 방을 울렸다. 귀엽다.

“여기 또 우리 둘밖에 없는 것 같아.”

사방이 고요한 이른 새벽, 아직 잠든 이들이 더 많은 시간이다. 너와 나만이 세계의 주민 같다.

잔을 만지던 열이가 내 쪽을 보았다.

“최수호, 너 우리 부모님하고도 밥 먹을래?”

“결혼 허락받으러 가는 거야?”

“우리 엄마, 아빠 앞에서 결혼 얘기 꺼내기만 해.”

“하면 혼나?”

“우리 아직 사귀지도 않거든? 나이를 생각해라. 고등학교 졸업한 지 얼마 되지도 않았다.”

“졸업하자마자 결혼하는 커플도 있잖아.”

“그걸 말이라고. 양용배가 너랑 뽀뽀하겠다고 떠든 것만으로 실검 올랐는데, 결혼?”

“언젠가 너랑 할 거야.”

내 말에 열이가 이마를 짚더니 입술을 우물거렸다. 귓불 밑으로 목덜미까지 붉어지고 있는 게 보였다.

“그래, 하자.”

그러나 다음 순간 나를 쳐다보는 열이의 시선은, 무척 곧다.

이런 순간마다 네게 반하는 것 같다.

네가 그렇게 정확한 시선으로 나를 바라볼 때.

“한 10년 정도 연애부터 하고. 질릴 때까지 연애한 다음에 결혼하자. 그 정도 되면, 그때쯤엔…… 최수호 수천만 팬들이 몰려와도 어떻게 할 방법이 나한테 있겠지.”

“10년 후에도 연애가 안 질리면?”

“……몰라. 그때 가서 생각해.”

“안 질리면, 연애도 하고 결혼도 하자.”

“넌 진짜 그런 소리 아무렇지도 않게 잘한다.”

“아닌데. 항상 떨려. 너한테 이런 얘기 할 때.”

“말은 잘해요.”

“나 그것만 잘하는 거 아니잖아.”

“……최수호.”

베개가 얼굴을 향해 날아왔다. 기꺼이 얻어맞자 열이가 “미치겠다” 하고 중얼거렸다. 약간 쉬어서 섹시한 목소리로.

열이가 저렇게 말할 때가 좋다. 나 때문에 미칠 것 같은 열이라니.

“최수호.”

“응?”

“야한 생각 그만해.”

“어떻게 알았어?”

베개가 하나 더 날아왔다. 갓 날아온 베개가 내 머리를 치고 바닥으로 떨어지자마자 바로 하나 더.

호텔 침대에 쌓여 있던 베개가 차례로 내 머리에 적중하고 굴러떨어졌다. 침대 주변에 베개만 수북하다.

“열이 너는, 야한 생각 안 해?”

열이가 베개를 주우려 침대 아래로 팔을 뻗었다.

“또 만지고 싶지 않아, 나?”

막 베개를 집으려는 팔을 막으면서 나는 열이 위로 슬그머니 몸을 겹쳤다. 벌써 눈총이 따갑다.

“……안 비키지.”

“미치겠어?”

“아휴.”

열이가 장대한 한숨을 내쉬었다. 위로 불쑥 뻗어진 열이의 팔이 내 목덜미를 감아 당긴다.

“진짜 싫다, 최수호.”

“나는 너무 좋아.”

열이가 끌어당기는 대로 끌려가자 금세 입술이 닿았다.

입술이 막 서로 진하게 겹치는 순간에 충전기에 꽂아 둔 핸드폰이 윙윙, 소리를 냈다.

내 전화다. 듣자마자 알았지만 물론 무시했다. 열이는 바로 내 이마를 밀어냈다.

“받아라.”

“싫어.”

“무슨 전화일 줄 알고. 가서 받아.”

“이 시간에 무슨 전화야.”

“네가 언제부터 밤낮 규칙적으로 일했는데. 너한테 오는 전화면 어차피 내 전화 아닌 이상 다 일 얘기잖아. 빨리 받아.”

“이럴 때는 전화 받지 말고 나한테 집중해 달라고 하면 좋겠어.”

“나한테 집중하지 말고 빨리 전화 받아.”

열이가 나한테 매일 어리광만 부려 준다면 얼마나 좋을까. 언젠가 했던 말처럼 열이가 정말 둘이라면. 하나는 바르고 성실한 열이, 하나는 날 마구 휘두르는 열이.

“여보세요.”

그나마 행복한 상상 덕에 부드럽게 전화를 받을 수 있었다. 이 전화의 발신인은 열이 덕분에 꼭두새벽부터 욕 듣는 일을 피한 거다. 열이한테 고마워해야 하는데.

- 수호 씨, 봤어?

잔뜩 흥분한 물음이 앞뒤 가리지 않고 튀어나왔다. 황 감독님이었다.

“뭘 봐요?”

- 윤서화 선생님…… 제작자님이 큰일 치셨거든.

어머니가 직접 선언하고 떠나셨으니 제작자님이라는 호칭은 놀랍지 않았지만, ‘큰일’이라는 황 감독님의 호들갑은 신경 쓰였다.

- 내가 링크 보냈는데.

“잠시만요. 다시 전화할게요.”

전화를 끊고 메시지를 확인했다. 대표님하고 양용배한테서 온 것들을 지나쳐, 황 감독님 메시지를 클릭하자 바로 뜬 건 어떤 검색 결과 창이었다.

“와.”

화면을 보니 반사적으로 그런 소리가 나왔다.

“뭔데?”

어느새 뒤로 다가온 열이가 내 어깨에 머리를 얹었다. 잘 보이도록 핸드폰을 들어 올리자 곧 열이의 입이 벌어졌다.

“와.”

액정 안은 기사로 뒤범벅이었다.

양용배가 개인 방송에서 추태를 부린 기사가 관심 밖으로 밀려나기도 전에 새로운 소식이 그 위를 덮었다.

“이거 너희 어머니가 한 거야?”

“응. 분명히.”

최수호, 장혁준 주연 내정. <악과> 황춘식 감독 신작. 방황하는 청춘과 사랑을 그려 낼 문제작, 등등의 뻔한 미사여구가 기사 내용을 채웠다.

보도 내용 준비했다가 돌려도 시간이 빠듯했을 텐데, 양용배가 라이브 방송을 켤 걸 어머니가 미리 알고 있었을 리는 없으니 이 보도들도 거의 생방송으로 뿌려진 거나 마찬가지다.

“작정하셨네.”

혹시 어제 대표실로 오기 전부터 준비하신 건가, 이거?

기사를 접한 표 대표님이 울분을 토하고 있을 걸 생각하면 괜히 내가 죄송해진다. 어제 대표실에 있을 때는 하나도 안 죄송했는데. 저도 개작두 앞에 서야 할 것 같기도 하고요.

황 감독님에게 다시 전화를 걸자 신호음이 채 다 가기도 전에 통화가 연결됐다. 왜 새벽 댓바람부터 전화했는지 알겠다. 엄청 흥분했네, 이 사람.

- 봤어?

“봤어요. 감독님은 알고 계셨어요?”

- 내 영환데 나도 모르는 기사를 냈겠어. 연락은 받았지. 거의 통보긴 했지만.

“통보를 받으셨다는 말이네요.”

- 통보? 통보가 아니라 계시다, 수호 씨. 아직 찍지도 않은 내 영화가 포털 검색어에 올라갈 줄이야.

황 감독님은 곧 간증이라도 시작할 기세였다. 얼마 전까지 집 팔아서 독립 영화 찍을 각오셨던 걸 생각하면 심정이 충분히 이해 가긴 한다.

- 어쩌면 나 수호 씨한테 4억 줄 수도 있겠는데.

힘을 잔뜩 주고 말하며 황 감독님이 콧김을 뿜었다. 소리가 휴대폰 스피커에 아주 생생히 전달될 정도다.

- 우리 영화, 생각보다 사이즈 커질지도 모르겠다.

* * *

“얼마나 못 만나?”

“당분간 밥 먹고 운동만 한다고 생각해야지.”

버스 정류장은 아직 한산했다. 조식 먹을 때까지 누워 있던 보람이 있는지 열이는 이제 평소와 비슷한 속도로 걸었다.

그게 다행이기보다 아쉬웠던 걸 보니 난 좀 못된 게 맞나 보다. 열이를 괴롭히는 걸 좋아하는 것도 맞는 것 같다.

열이가 느리게 걸으면 더 오래 같이 있었을 텐데. 정류장 전광판에 버스가 언제 도착할 지 시간이 떠 있는데도 버스가 가능한 한 늦게 도착했으면, 바랐다.

“너랑 연애질하면서 금메달을 어떻게 따냐.”

“금메달 딸 거야?”

“이왕 목표로 하려면 금메달 정도는 돼야지.”

열이라면 딸 거라고 생각한다. 나랑 연애질하면서도 충분히 딸 수 있을 것 같은데, 이렇게 말하면 혼나겠지.

얘기하는 사이 체육관으로 가는 버스가 정류장에 도착했다. 전광판에 있던 시간보다 오히려 빨랐다. 현대 기술은 짜증 난다.

열이는 버스 번호를 뻔히 보고 있으면서도 움직이지 않고 앉아 있었다. 버스가 출발해 버릴 때까지 그랬다.

“열아.”

“왜.”

“버스…….”

“알아.”

“괜찮아?”

“몰라. 어차피 다음 거 10분 후면 오네.”

정정. 나랑 연애질하면서는 메달 못 딸 수도 있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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