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2.
화나진 않았다는 얘기에서 교묘하게 끊겼던 매니저 형의 문자처럼 함의를 생각하게 한다.
“소개받는 날, 오늘로 하면 되겠네.”
어머니가 나를 바라보며 선고하듯 말을 마쳤다.
ROUND. 정열
“에취.”
갑자기 웬 재채기지. 코 아래를 훔치고 있으려니 천 관장님이 슬쩍 옆으로 다가왔다.
“갑자기 재채기하면 좋아하는 사람이 내 얘기하는 거라던데.”
“그런 건 아니었으면 좋겠네요.”
최수호가 어디 가서 내 얘기 떠드는 건 이제 그만 겪고 싶다. 일단 쪽팔리니까.
씻은 지 얼마 안 돼서 추웠나. 머리카락이 다 말랐는지 손가락으로 헤집어 보고 나서 여분의 트레이닝복에 팔을 꿰었다. 운동 후에 샤워를 마친 참이다.
천 관장님 댁에 짐을 놓고 난 뒤, 나는 당장 훈련에 돌입했다. 미적거릴 거 없다는 게 천 관장님과 나의 공통된 의견이었다.
“오늘 훈련양 어땠어? 좀 늘려도 괜찮을 것 같지?”
“네. 그리고, 관장님.”
“응?”
“저 올림픽 나갈래요.”
갑작스러운 내 선언에 천 관장님의 입이 살짝 벌어졌다.
예전보다 가벼운 훈련이었지만 느끼셨을 거다. 내 기량은 아직 현역 시절과 비교할 수준이 못 됐다.
올림픽은 당장 내년이다. 1년 만에 세계적인 수준으로 기량을 끌어올린다는 건 쉽게 장담할 목표가 아니었다.
“좋지. 해 보자.”
천 관장님은 흔쾌히 고개를 끄덕였다.
천 관장님은 내가 뭘 하자고 하건 안 된다고 하는 법이 없었다. 어릴 때 천 관장님처럼 헤비급으로 월장하고 싶다는 나한테도 ‘좋지, 열이가 얼마나 크는지 한번 보자!’라고 호탕하게 외치던 분이다.
할 수 있다, 해 보자고 말해 주는 사람이 있는 건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그것들이 나를 링 위에서 몇 번이고 다시 일어날 수 있게 해 주었다.
지금 복싱을 다시 시작할 수 있었던 것도 어쩌면 그런 응원들 덕분인지도 모른다.
나 혼자만의 다짐보다도, 타인의 응원은 힘이 된다.
“진이가 메달 땄었는데.”
글러브를 정리하면서 천 관장님이 중얼거렸다.
형은 지난 올림픽에서 복싱으로 금메달을 땄다. 승승장구하던 호시절이다.
나도 함께 출전할 예정이었는데 갑자기 부상이 악화됐고, 형 혼자서 비행기를 탔다.
돌아와서 형은 내게 메달을 걸어 주었다.
‘가져. 다음에 따서 네 걸로 갚아라.’
무뚝뚝하게 말하고 돌아서는 정진을 보면서 우리 형이지만 멋있다고 생각했다. 그런 때도 있었지. 생각하니, 형한테 두들겨 맞은 옆구리가 괜히 욱신댔다.
“요즘도 다달이 연금 나와요. 덕분에 군대도 안 가고.”
어차피 사고 때문에 메달 없었어도 공익 정도로 빠졌겠지만. 생각하면 우울해지는 문제라서 더는 언급을 피했다.
“가족들한테 보여 주려고?”
천 관장님이 넌지시 묻는 말에 고개를 저었다. 메달이라도 따는 걸 보면 마음을 돌릴까, 그런 계산이 있었나 하는 얘기였다.
“아뇨. 내가 얼마나 할 수 있나 확인하려고요.”
“만약에 성적 안 나오면, 어쩔 생각이야?”
천 관장님이 조심스럽게 물었다. 1년여를 쉬었으니 기대하는 결과가 나오지 않을 수도 있다. 그럴 땐 어떻게 할 거냐는 물음이었다.
한 번 그만뒀던 사람이 두 번 그만두기는 쉽다. 천 관장님은 그게 걱정되시는 모양이었다.
“그래도 계속할 거예요. 더는 못 할 때까지.”
언젠가 복싱이 지겨워지는 순간이 올 수도 있다. 내가 더는 경기를 원하지 않을 수도 있을 거다.
“그만두고 싶을 때까지.”
그때는 그만두면 된다.
하지만 그러기 전까지는 그만두지 않겠다.
“이제 오후 타임 시작이죠?”
“응, 그래야지.”
천 관장님 체육관은 형 체육관하고 달리 중간에 휴식을 두고 시간대를 나눠서 운영했다. 이제 그 휴식 시간은 온전히 나를 코칭하는 시간이 될 예정이다.
관장님을 닮아서 회원들도 성실한지 벌써 입구가 소란스러웠다.
“그냥 들어가도 되나? 괜찮을까요?”
당연히 회원이라고 생각했는데, 문가에서 들리는 소리는 회원이 할 얘기는 아니었다.
게다가, 어째 익숙한 목소리였다.
의아함에 천 관장님을 두고 체육관 입구로 걸어 나갔다. 문을 열자 역시나 익숙한 얼굴이 나를 반겼다.
“열아, 안녕.”
지원 누나가 나를 향해서 손을 흔들었다.
“누나가 여기 웬일이에요?”
진짜 뜬금없는 방문이다. 여기서 볼 거라고는 상상도 안 했던 사람이라 놀라웠다.
“너 복싱 다시 시작한다며. 응원해 주러 왔지.”
“맞긴 한데, 누가 말해 줬어요?”
우리 형은 절대 밖에서 내 얘기 떠들고 다닐 리가 없고, 부모님이나 최수호가 지원 누나하고 얘기했을 리도 없다.
내 의문은 지원 누나 뒤로 걸어온 사람을 보자 단박에 해결되었다.
“황 감독님.”
“안녕, 정열 씨.”
어째 평소보다는 차림새가 단정한 황 감독님이 내게 인사했다. 수염도 다듬으셨나?
“열아, 이분들은 누구셔?”
천 관장님이 내 옆으로 다가왔다.
그제야 왜 황 감독님이 말쑥하게 왔는지 깨달았다. 지원 누나 뒤에서 머뭇거리고 있었던 이유도.
황 감독님은 누가 봐도 천 관장님을 과하게 신경 쓰고 있었다.
“형 체육관에 다니는 누나랑 영화감독님이요.”
“영화감독?”
천 관장님이 되물었다. 왜 이런 뜬금없는 조합이 지금 찾아왔느냐, 하는 의미일 거다.
“이 감독님도 형 체육관 다녀요. 관장님하고 옛날에 같은 체육관 다녔다던데. 저번에 제가 얘기한 적 있잖아요.”
천 관장님은 기억 안 난다고 하셨지만. 내 말이 끝나자마자 황 감독님이 천 관장님에게로 손을 내밀었다.
“천수관 선수, 오랜 팬입니다. 제가 원래 잘 떠는 사람이 아닌데 손이 다 떨리네요.”
황 감독님 하는 양을 보고 놀랐다. 진짜 떨고 있어서. 평상시같이 능청 떠는 게 아니라, 악수를 위해 뻗은 팔이 다 부들거리고 뺨은 소년처럼 상기된 채다.
나더러 내 팬이라더니, 그건 그냥 한 말이었네. 진짜 팬심은 이런 거 아닌가.
“저 보러 온 게 아니라 천 관장님 보러 오신 거 아니에요?”
“에이, 무슨. 그것도 있긴 있고.”
솔직하다, 솔직해. 악수를 마치고 멋쩍게 뒷머리를 긁적이던 천 관장님이 지원 누나와 황 감독님에게 차례로 묵례했다.
“아침 훈련도 마무리했겠다, 열이도 이제 쉬는 시간입니다. 1층에 휴게실도 있는데 앉아서 천천히 얘기 나누시죠.”
“혹시 천 선수님은…….”
황 감독님이 수업할 준비를 하러 가려는 천 관장님을 잡았다. 선수님이란다. 현역 관둔 지 이미 오래라는 거 뻔히 알 텐데.
“저는 이제 애들 올 시간이라, 체육관 운영 때문에.”
낯선 사람들이라 그런가, 천 관장님도 ‘스타 선수’ 모드에 접어든 것 같다. 단정한 미소를 지어 보이고 미련 없이 걸음을 옮기는 모습이 좀 멋있다.
“뭐 하세요. 애들 올 거라 우리 내려가야 해요.”
황 감독님은 물론이고 지원 누나까지 천 관장님 등판만 보고 있는 바람에 내가 손을 내저으며 둘의 주의를 환기해야 했다.
“실제로 보니까 진짜 크다.”
“무슨 곰 같죠. 야생 곰. 저번에 저희 체육관에도 오셨을 때 보니까 엄청 크더라고요.”
“크으, 역시 멋있어. 목소리도 멋져. 정열 씨는 좋겠다. 천수관 선수한테 배울 수 있다니.”
“둘 다 저 보러 온 게 아니라 천 관장님 구경하러 온 거 아니에요?”
계단을 내려가면서도 화제는 천 관장님이었다. 분위기가 팬클럽 회동이다.
“사실 좀 그런 것도 있었는데.”
1층 체육관과 연결된 휴게실로 들어가면서도 황 감독님이 여전히 어딘가 넋이 빠져 있는 말투로 말했다.
“특별 출연 부탁드리고 싶어서 왔거든.”
“아니, 뭔 온 동네 사람을 다 출연시키시려고.”
“무슨 그런 말을. 천수관 선수가 어떻게 그냥 동네 사람이야. CF만 몇 개를 찍은 레전드 선수인데.”
“그건 그렇긴 한데요. 하여간 관장님 그런 거 안 찍으세요.”
“우리에겐 정열 씨가 있잖아. 혹시 될까, 했지.”
양용배는 최수호로 엮어 먹고, 나로는 천 관장님을 끌어들이시겠다? 다단계가 따로 없다.
“열아, 황 감독님 영화 수호 씨가 찍는다며.”
휴게실 한쪽에 자리를 잡으며 지원 누나가 눈을 빛냈다.
그러고 보니 이 누나도 팬이었지. 최수호 팬.
“이런 거 막 말하고 다녀도 돼요?”
촬영 전인데 아무한테나 막 얘기해도 되나. 나야 영화 일은 잘 모르지만.
그래도 이렇게 떠들어도 되나 싶어 황 감독님을 봤더니 황 감독님은 아무 문제없다는 태도다.
“뭐 어때. 이제 지원 씨도 한 식구인데.”
“웬 식구요.”
“나도 출연하기로 했다!”
지원 누나가 손가락으로 브이 자를 그렸다. 이건 또 무슨 소식이람.
“단역 알바요?”
“단역 겸 스턴트.”
“아, 누나 스턴트 연기 배운댔죠.”
뭐 이렇게 아는 사람 다 모여서 하는 느낌이냐. 최수호하고 양용배는 내로라하는 배우 분들이라 쳐도, 지금 쏟아지고 있는 캐스팅이 다 내가 아는 이름들이라 그냥 동네 모임 같다.
“장혁준도 같이 나온다며.”
지원 누나가 손을 모아 쥐었다. 기대감이 뿜어져 나온다. 황 감독님이 단역 얘기하면서 뭐라고 꼬셨는지 알겠네.
“진짜 미주알고주알 다 말씀하셨네요.”
“숨길 일도 아니잖아.”
황 감독님이 어깨를 으쓱거렸다. 하긴 영화 라인업이 무슨 극비겠냐마는. 지원 누나나 황 감독님이나 서로 만난 지 얼마나 됐다고 벌써 무슨 절친 뺨친다.
“누나. 양용, 장혁준도 좋아해요?”
“잘생겼잖아.”
“…….”
“왜 그런 표정이야?”
“갑자기 얼굴이 다가 아니라는 생각이 들어서요.”
뭐, 확실히 잘생기긴 했지만. 최수호처럼 온 국민이 잘생겼다는 얼굴인데도 어째 양용배는 인정하기가 떨떠름하다.
“왜. 열이 너는 장혁준 별로야?”
“아니요. 걔도 친구예요.”
“진짜? 수호 씨랑 장혁준이랑 둘이서도 친해?”
“걔네는, 음.”
어렵다. 그걸 친하다고 해야 하나. 그렇다고 안 친한 건 아닌데. 아마 걔들보다 황 감독님하고 지원 누나가 서로 더 친하지 않을까.
“이거 봤어?”
지원 누나가 내 쪽으로 자기 핸드폰을 내밀었다. 화제의 검색어 1위, 어쩌고 하는 제목의 영상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