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1.
“최수호, 표정 풀어.”
“제가 왜요.”
“너도 잘못했으니까.”
“제가 뭘요.”
“사람들이야 그냥 해프닝으로 장난스럽게 넘어갈 수 있을지 몰라도 나는 못 속여. 저게 농담이라도 쟤 입에서 나올 말이야?”
영상만 봐도 사람들 반응은 심각하지 않았다. 그냥 생각한 것보다 장혁준이 나하고 친하구나, 싶어서 호응하는 게 대부분이었다.
다만 회사 관계자들은 나하고 양용배가 장난삼아 키스니 사귀니 하는 야릇한 소리가 나올 관계가 아니라는 걸 알고도 남으니, 소속 연예인 관리에 늘 철저히 힘쓰시는 대표님이 무려 직접 우리 둘을 소환하셨다는 얘기다.
아무리 생각해도 양용배는 사형이다.
“만약 둘이 사정 있으면 당장 말해. 너희 개인적인 일을 떠나서 회사랑 직결된 일이야.”
“정말 둘이 사귀냐고요?”
같은 소속사의 간판급 배우 둘의 스캔들. 검색어 1위를 점령하면서 남들 입에 일회성 화젯거리로 오르내릴 때야 웃고 넘길 수 있지만, 그게 진짜라면 문제의 심각도가 달라진다.
바닥에서 시작한 표천희를 여기까지 끌고 온 건 8할이 감이었다고 대표님은 말씀하셨었다. 위기에 적절히 대처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그 위기가 수면에 떠오르기 전에 미리미리 감지, 차단하는 것은 아무리 강조해도 모자라지 않다나. 성공보다 더욱더 어려운 게 실패하지 않는 것이고, 위험을 감지하는 감각이 사업의 열쇠였다면서.
그 날카로운 감이 이번엔 장렬히 빗나간 모양이지만.
아니. 모로 가도 서울만 가면 된다고, 위험을 감지하기는 한 것 같기도 하고.
“저랑 진짜 키스한다는 게 아니고 영화 때문에 그래요.”
자기 입으로 대표님한테 비밀을 지키고 말고 나불대던 양용배가 온 국민이 다 보라고 카메라 앞에서 헛소리를 해 댔으니, 나한테 남은 선택지는 많지 않다.
“무슨 영화.”
“야! 최수호! 미쳤어?”
양용배가 온몸으로 말하지 말라는 사인을 날리거나 말거나, 이미 내 입은 열렸다. 누가 먼저 시작했는데.
“저 홍희백 감독님 영화에서 빠지고 들어가기로 한 영화요. 양용배도 캐스팅 합류하겠다던데요.”
“뭐?”
표 대표님의 말끝이 신경질적으로 뒤집혔다.
“저희 둘이 황춘식 감독님 복귀작 들어가기로 했어요.”
“야, 최수호. 난 그냥 구두로만.”
“이제 와서 발 빼시겠다. 계약서 안 썼으니 그만이다?”
“그렇게까지 말하진 않았거든? 하긴 할 건데. 대표님, 제가 왜 하기로 했냐면요. 이게, 작품이 괜찮거든요?”
“혁준이, 조용히 해.”
“넵.”
지퍼라도 채운 것처럼 바로 조용해지는 게 감탄스럽다. 대표님한테 뭐 하나만 배울 수 있다면 양용배를 순식간에 입 다물게 할 수 있는 방법을 배우고 싶다.
관자놀이를 지그시 누르며 침묵하던 표 대표님이 대뜸 핸드폰을 꺼냈다.
혹시 혈압 올라서 119라도 부르시나 했다. 본인 관 뚜껑도 스스로 디자인한 다음 알아서 닫고 들어가실 것 같은 분이라 알아서 구급차를 불러도 이상하지 않다.
“윤서화.”
하지만 핸드폰을 귀에 댄 표 대표님에게서 익숙한 이름이 들리자 지금까지의 감상은 멀리 사라졌다. 바짝 긴장한 양용배하고 별다를 것 없이 몸이 표 대표님한테로 한없이 기울어졌다.
“니 아들 지금 뭐라는 거니. 와서 들어 보고 해석해 줘 봐.”
“치사하게 부모님 소환은 뭡니까. 저도 이제 성인인데.”
“부모님 소환? 책임자 소환이지. 그나마 우리 최수호 배우님을 말귀 알아듣게 만들어 줄 사람으로 부른 거고.”
“이럴 때마다 대표님 싫어요.”
“누군 네가 예뻐서 데리고 있어?”
“잘 벌어서 데리고 있죠.”
“이게 한마디도 안 져.”
표 대표님이 핸드폰에서 눈을 떼고 나를 매섭게 노려봤다.
“그래, 최수호. 대표님이 말씀하시는데, 건방진 자식아.”
“혁준이 넌 뭘 잘했다고 떠들어.”
“죄송합니다.”
“양용배, 죄를 지었으면 조용히나 있어.”
“이씨, 내가 그러려고 그랬냐.”
양용배의 하소연 따위는 들어 주고 싶지 않다. 항소 기각. 무조건 사형이다.
양용배를 노려보고 있는데 테이블에 둔 핸드폰에 메시지가 떴다.
[사고 쳤어?]
이 사태를 순식간에 다 알아내고 나한테 이렇게 물을 수 있는 사람은 매니저 형 정도다.
딱 네 글자인데 매니저 형의 표정이 보이는 것만 같다. 미안하지는 않았지만 어쩐지 켕겨 착실하게 답장을 보내 주었다.
[내가 안 쳤어.]
[그럼?ㅠㅠ]
[양용배.]
[근데 왜 윤 선생님이 회사로 가셔?]
[대표님이 치사해서.]
매니저 형은 대답이 없었다. 아까 시무룩한 표정이 보인 것처럼 이번에는 핸드폰을 내려다보면서 가슴을 치고 얼굴을 감싸 쥐는 매니저 형이 보였다.
어머니가 국내에 있는 동안 전담 매니저는 기영이 형이니까, 지금 형도 오는 중인 건가.
[화난 것 같아?]
주어는 빠졌지만 매니저 형도 보면 누구 얘기인지 곧장 알아차릴 거다.
문자를 치면서도 어색했다. 꼭 학원 빠져서 엄마 눈치 보는 어린애가 된 기분이다. 정작 어릴 때는 한 번도 그런 적 없는데.
[그렇지는 않은데]
이어지는 말이 있어야 할 것 같은데 문장은 거기서 끊겼다. 다음 메시지가 곧 오려나 싶어 액정을 노려봐도 그게 끝이었다.
화가 나지는 않았는데, 그럼?
상상의 여지를 남기는 말에 아무 얘기도 못 봤을 때보다 도리어 초조해졌다.
“혼날 걱정해?”
표 대표님이 내게 물었다. 열 살도 안 먹은 애한테 말 걸 때하고 똑같은 말투라 대꾸하기도 싫어졌다.
“아직 애야, 최수호.”
“아닌데요.”
“어른들한테는 엇나가는 애들 바로잡아 주고 도와줄 의무가 있어.”
표 대표님은 어머니만 도착하면 이 모든 상황이 정리되리라 믿는 기색이었다.
[서둘러 가는 중이야. 금방 도착.]
매니저 형한테서 다시 문자가 도착했다. 어디서 출발한 건지 빠르다.
어머니가 대표실에 도착한 건 문자가 수신된 후 10분도 채 지나지 않은 때였다.
“나 왔어.”
어머니는 소리도 없이 문을 열고 등장해, 당연하다는 듯 표 대표님의 맞은편에 앉았다.
표 대표님의 시선도 온전히 어머니에게로 향했다. 나하고 양용배는 순식간에 조연으로 밀려난 분위기다.
“윤서화 씨, 최수호 배우님이 영화 이탈하고 무단 행동 중인 거 알고 계셨어?”
“응. 그러겠다고 하더라.”
어머니의 선선한 대꾸에 표 대표님이 미간을 구겼다.
“그런데 나한테 아무 말도 안 했어? 알고 있었는데?”
“꼭 들은 걸 다 말해 줘야 할 필요는 없잖아.”
“너희 모자 판박이다, 정말.”
“그러니.”
“제가요?”
어머니와 내가 거의 동시에 말하자 표 대표님이 크게 한숨을 내쉬었다.
“아무튼 나는 허락 못 해. 최수호, 괜한 고집으로 섣부른 판단 하지 마. 너 그거 판단 미스야.”
“네. 대표님 말씀이 맞을 수도 있고요. 아무튼 하고 싶으니까 전 할 거예요.”
표 대표님이 뭐라고 말 좀 해 보라는 듯 노려봐도 어머니는 침묵을 지켰다. 그게 말 얹기가 성가셔 그런 건지, 침묵으로 내 편을 들어주는 건지는 알기 힘들었다.
“윤서화, 얘 계속 이러게 놔둘 거야?”
“본인이 싫다잖아.”
어머니의 단순한 대답에 표 대표님은 배신감을 감추지 않았다. 모자가 쌍으로 이럴 줄은 꿈에도 몰랐다는 식이다.
“이대로 첫 성인 필모 말아먹게 두겠다고?”
“어쩌겠어. 본인 인생인데.”
“보호자로서 뭐라고 해 줘야지.”
“천희야.”
별로 크게 말한 것도 아닌데 목소리가 공기를 가라앉혔다. 저 사람의 말에는 주변 사람들을 집중하게 만드는 힘이 있다.
“부모 노릇이라는 게 참 어려운 거더라.”
나긋하게 말을 마친 어머니가 앞에 놓인 찻잔을 들었다. 더 말하지 않겠다는 어머니 식 표현이었다.
표 대표님이 이를 갈며 관자놀이를 지압했다. 다시 눈길을 나한테로 돌렸다가, 어머니 쪽을 힐긋 보고 한숨을 삼킨다.
침묵이 불편하게 흘렀다. 여기서 제일 안절부절못하고 있는 건 당연히 양용배다.
“대표님, 최수호가 혼나는 시간이면 저는 이만 나가 봐도 될까요?”
“어딜 나가. 혁준이, 앉아.”
“네.”
말 진짜 잘 듣는다. 표 대표님이 손수 데려와서 애지중지 기른 케이스라서 더 그런 것 같기도 하고, 표 대표님의 양용배 다루는 솜씨 덕분인 것 같기도 하고.
“일단 수호 출연작 논의는 미뤄 두고. 너희 둘, 스캔들은 어떻게 할래.”
“스캔들?”
표 대표님의 말에 어머니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어머니가 이어서 심상치 않은 눈으로 양용배를 바라보는 바람에 마음이 급해졌다.
“아니에요.”
쟤는 절대, 아니에요.
강한 부정을 담아 고개를 젓자 어머니가 조그맣게 고개를 끄덕였다. 양용배만 어리둥절한 반응이다.
“뭐가 아닌데?”
“너랑 안 사귄다고.”
“아아, 제가요? 얘랑요? 제가 눈이 삔 것도 아니고 절대 아니죠.”
“그럼 누구야.”
표 대표님이 나와 양용배의 대화를 자르며 눈을 빛냈다.
“너 지금 그것도 문제야. 누구하고 만나는 중이라는 거야? 이번에 혁준이하고 떠도는 얘기야 어차피 사실도 아니니 몇몇 기사만 제재한다고 치더라도, 혹시라도 진짜가 터지면 미리 준비할 수 있게 회사에 얘기를 해 줘야지.”
사생활이 매스컴을 타면 어떻게 되는지 지겹게 겪어 봤다. 그렇다고 아티스트 보호가 우선이라는 면전에 열이 이름을 고해바치고 싶지도 않다.
“말 안 해요.”
“해야 한다니까.”
“괴롭히실 거잖아요.”
“괴롭히긴 뭘, 어떻게 괴롭혀. 알아 둬야 한다는 거지.”
“알아 두는 것도 싫어요. 저는 무슨 일이 생기든 저보다 제가 좋아하는 사람이 더 중요해요. 대표님은 안 그러실 거잖아요.”
“일반인이야?”
떠보는 물음에 미간이 찌그러졌다. 대표님이 쉽게 물러설 리가 없다.
“최수호, 네가 사귀는 사람이 다 있었냐?”
눈치를 보느라 조용하던 양용배가 기어이 못 참고 물음을 던졌다. 나랑 열이더러 사귀라는 말을 달고 살 땐 언제고. 저 눈치로 이 험악한 연예계에서 어떻게 살아남는지 항상 놀랍다.
“내가 알아서 할게.”
오가던 신경전을 한마디로 끊어 낸 건 어머니였다.
“안 그래도 조만간 만날 예정이었으니까.”
찻잔이 어머니의 손에서 받침대로 내려앉았다.
나는 어머니의 ‘알아서 한다’가 어떤 의미인지 고민하느라 바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