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9.
형의 기척이 가까워지면서 온갖 생각이 치밀었다. 지금이라도 최수호하고 떨어져 있기라도 해야 하나. 옷장 문 열었는데 최수호하고 얼싸안고 얼굴 빨개져 있으면 무슨 망신이냐.
아니면 형한테 전화라도 걸까.
그도 아니면 내가 먼저 문 박차고 나가 버릴까. 형이 붙잡기 전에 현관문으로 질주해서 계단으로 튀는 거다.
아니면, 아니면…… 어쩌지?
최수호는 나를 보호하기라도 하듯 내 뒤통수를 감쌌다.
웃기는 건 나도 최수호가 이끄는 대로 최수호의 어깨 맡에 머리를 푹 파묻어 버리고 말았다는 점이다. 포수 앞에서 덤불에 머리 처박으면 끝인 타조도 아닌데.
하지만 최수호한테서 나는 체취는 이 쓸데없이 긴박한 상황에 안정제가 되어 주기에 충분했다.
최수호한테서 나는 달콤하고 그윽한 향기 탓에 정신이 점점 멍해졌다. 배 속에서 자그마한 털실 뭉치가 굴러다니는 것처럼 속이 간질간질하다.
이런 상태라면 매번 겪는다. 3분의 폭발적인 집중. 긴장.
복싱은 고작 180초의 경기를 위해 모든 걸 거는 운동이다.
그게 오히려 독이 되는 느낌이었다.
온몸으로 집중하는 감각을 너무 잘 알아서, 최수호한테도 그러고 있나 보다. 경기를 치를 때 상대에게 온 신경을 다 쏟듯 최수호에게 집중하고 있는 거다.
그게 아니라면 이 급박한 상황에 온통 최수호뿐인 지금의 내 상태가 설명되지 않았다. 홀린 것처럼 오감이 다 최수호한테만 묶여 있을 수가 없다.
발소리가 바로 문 앞까지 다가왔는데도 신경은 최수호에게로 쏠려 있었다. 신경만이 아니라, 내가 스스로 최수호에게 바짝 붙고 있다는 걸 뒤늦게 알았다. 나도 최수호를 끌어안고 있었다.
“이 자식은 옷장 문도 제대로 안 닫고 다녀.”
형의 중얼거림이 바로 옆에서 들렸다.
옷장 문이 밀리더니 달칵, 소리와 함께 완전히 닫혔다. 더 어두워진 옷장 안에서 시끄러운 건 내 심장 소리뿐이었다.
그리고 그늘 속에서도 이상하리만치 잘 보이는 최수호.
최수호의 눈빛이, 나를 끌어안는 손길이, 체온이, 소란스러웠다.
“열아…….”
“야, 하지…….”
“쉿.”
하지 말라는 말을 마칠 틈도 없이 입술이 간지럽게 맞물렸다.
촉촉하고 말캉한 입술이 서로 포개진다. 닿은 곳이 그대로 녹아서 서로 섞일 것만 같았다.
이게 말이나 되는 짓인가. 옷장 문 바로 너머에 형하고 아빠가 있는데. 고개를 다시 뒤로 빼려는 내게 최수호가 더 다가왔다.
입술이 다시 겹쳤다. 숨이 끈끈하게 엉겨 붙는다. 최수호의 긴 손가락이 내 뒷덜미를 어루만지고, 귓바퀴를 건드리는 게 생생하게 느껴졌다.
귓가의 솜털이 오스스 일어났다. 혀가 입술을 조심히 가르면서 앞니를 건드린다. 겨우 그것뿐인데 목구멍까지 저렸다.
최수호와 닿아 있는 모든 감각이 예리하게 깨어난다.
축축한 소리가 귀를 울린다. 머리가 야릇하게 지끈댔다.
자꾸만 뜨거운 무언가가 뒷골에 고이는 느낌에 도망쳐 고개를 털어 내고 싶었지만 그러기엔 갇힌 곳이 너무 좁았고, 최수호는 지나치게 가까웠다.
크게 헐떡일 수조차 없었다. 숨죽여 키스하면서도 나는 내 심장 소리가 옷장 바깥까지 들리는 건 아닐까, 걱정했다.
“아…….”
신음 같은 숨이 절로 새어 나간다. 내가 고개를 피할 때마다 따라와 다시 입술을 삼키던 최수호가 혀끝으로 천천히 내 아랫입술을 핥았다.
나를 살피는 눈이 어둠 속에서 은밀히 빛나고 있다. 머리에서 내려와 내 목덜미를 살며시 주무르던 최수호의 손이 등을 쓸어내렸다.
달래는 것 같기도 하고 부추기는 것 같기도 한 손길이다.
배를 끄는 뱀처럼 기어 내려간 손은, 그러나 뱀에 비하기엔 지나치게 뜨거워서, 최수호가 지금 얼마나 흥분했는지 알려 주었다.
최수호가 다시 고개의 각도를 바꿨다. 금방이라도 다시 입맞춤이 시작될 것만 같았다.
이 이상은 정말 안 된다. 뒤통수에서 빨간 불이 돌아갔다. 바깥 상황이 어떻게 돌아가는지는 몰라도 언제 문이 열릴지 몰랐다.
아무리 최수호가 괜찮으면 얘랑 나랑 사귄다고 동네방네 떠들어도 좋다고 했어도, 우리 아빠가 벌컥 옷장을 열었다가 막내아들의 진한 스킨십 현장을 보게 하고 싶진 않다.
“그만.”
“…….”
“나가서……. 나가서 해. 지금, 말고…….”
생경한 목소리였다. 내가 듣기에도 내 목소리 같지 않았다. 갈라진 소리가 덜덜 떨린다.
최수호가 이를 악물었다. 어금니가 서로 갈리면서 내는 조그마한 소음이 생생히 들렸다.
입술이 다시 가까워졌지만, 아까처럼 맞닿지는 않았다. 스치기만 해 머릿속까지 간지러워지는 느낌이 들었다. 차라리 다 철회하고 아까처럼 호흡이 달릴 만큼 키스했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 정도로.
“…….”
“…….”
젖은 입술을 마주 댄 채 최수호가 나와 눈을 마주쳤다. 입술이 천천히 떨어지는 동안에도 계속 입 맞추고 있는 것만 같았다.
입술에 남아 있는 감각이 집요하게 느껴질 정도였다. 일부러 손등으로 입가를 비벼 댔는데도 혀뿌리까지 뻣뻣하게 만드는 저림이 지워지지 않았다.
최수호하고 있으면 어떻게 이렇게까지 쉽게 흥분하는 건지, 닿는 것만으로도 발끝까지 저려서 발가락이 곱아들곤 하는지 모르겠다.
“열이한테 혹시 전화 오면 어디냐고…….”
아까보다 멀어진 곳에서 형의 말소리가 들렸다.
“아니다. 수호네 있을 테니까 어디 있는지는 걱정 안 해도 되겠네.”
“그러려나?”
“수호네 아니면 천 관장님 댁일 텐데. 그래도 혹시 모르니까 수호한테 연락해 볼까 봐.”
정신이 번쩍 드는 기분이라, 허겁지겁 최수호의 주머니를 뒤적였다. 어렵지 않게 발견한 핸드폰 잠금은 내 생일을 입력하자마자 풀렸다.
당장 전화하진 않겠지만 그럴 때 벌어질 일은 상상하기도 싫었다. 갑자기 내 방 옷장에서 울리는 전화, 다가오는 우리 형, 벌게진 얼굴로 옷장 안에서 발견된 최수호와 나.
악몽이다. 본격적으로 복싱을 다시 시작하기도 전에 쪽팔려서 세상 하직할 지도 모른다.
서둘러 전원을 끄고 도로 넣어주겠다고 최수호의 바지 주머니에 손을 넣었다. 단단한 허벅지의 감촉에 불에 덴 듯 손을 다시 빼기 전, 최수호가 내 손등을 덮어 쥐었다.
마른침이 넘어갔다. 아무래도 최수호나 나나 옷장에서 태연하게 나가려면 시간이 더 필요할 것 같았다.
아빠가 형을 배웅하는 소리를 들으면서도 최수호와 나는 눅눅한 침묵 속에 앉아 있었다.
시선을 피할 곳도 없어 목이 아플 정도로 고개를 숙여야만 했다. 눈만 들어도 나를 뚫어지게 바라보는 최수호를 마주 봐야 하니 어쩔 수 없는 선택이다.
“……이제 나가도 되겠다.”
아빠가 손수 옷장 문을 열어 주게 두느니 우리가 먼저 빠져나가는 게 나았다. 열을 식히고 옷매무새를 가다듬을 시간도 필요했다.
내 말이 들리긴 했는지, 최수호는 섹시하고 좀 미친 것 같은 눈으로 나를 쳐다보느라 바빴다.
이대로 옷장 안에 있으면 일 나겠다. 무슨 일이 날지는 더 깊이 생각하고 싶지 않고, 아무튼 사고가 날 것 같으니 피해야겠다. 무릇 예방이 가장 중요한 거라고 했다.
옷장 문을 바깥으로 미는 손이 후들후들 떨렸다. 척 보기에도 티가 나 민망했다.
바깥의 공기는 서늘했다. 옷장 안이 얼마나 후텁지근했는지 적나라하게 느껴진다.
아빠하고 마주치기 전에 열을 식혀야겠다 싶어 괜히 가방을 들고 서성거렸다. 챙길 것도 없는 책상을 쓸었다가, 침대를 만졌다가, 나 혼자 부산하다.
“선인장은 안 챙겨?”
내 뒤를 따라 나온 최수호가 말을 걸었다. 이상한 소리 안 하고 장단 맞춰 줘서 그나마 다행이다.
“지금 챙기면 너무 티 나잖아. 짐도 뺐는데 자기 방으로 가져간 선인장까지 없어졌으면 내가 다녀간 거 바로 알 거 아니야. 형은 자기 방 물건 위치 되게 잘 알아.”
한 깔끔 하는 분답게 형은 내가 형 없는 방에 들렀을 때도 거기서 뭘 건드렸는지 귀신같이 알았다.
“조만간 선인장 가지러 와야겠네.”
인질이라도 잡힌 기분이다. 그것도 하필 내가 제일로 어려워하는 사람한테.
형 딴에는 선인장을 돌봐 주러 가져갔을 거라는 게 제일 아이러니한 지점이다. 자기가 언제 화분을 키워 봤다고.
“집 다시 오게?”
“언제 다시 집 들어올 수 있을지 모르는데 네가 준 선인장 놔두고 갈 순 없잖아.”
일부러 최수호하고 눈 안 마주치고 얘기하고 있는데도 최수호의 시선이 의식됐다. 아직도 내 신경은 최수호한테 꽁꽁 묶여 있었다.
“정 사장님, 저 갑니다.”
들어와서 쌌던 가방만 둘러메고 후다닥 현관으로 향했다. 거실에 있던 아빠가 내 쪽으로 목을 뺐다.
“밥도 안 먹고 가?”
“밥 먹다 형 또 오면. 이번엔 싱크대 밑에 숨어? 안 먹어.”
반은 핑계고, 반은 진심이었다. 뭐에 쫓기는 것처럼 쿵쿵거리는 심장 탓에 어서 집에서 벗어나고 싶었고, 이러다 진짜 형이 돌아오면 다시 숨을 자신도 없다.
뒤에서 최수호와 아빠가 인사를 나누는 소리가 들렸지만 돌아보지 않고 후다닥 빠져나왔다.
“웬일로 조용하냐.”
최수호는 정말 웬일로 조용했다. 아파트 밖으로 나올 때까지도 별말 없이 내 뒤에 서 있기만 했다.
“응, 공부 중이야.”
“뭔 공부.”
“열이는 이럴 때 껴안으면 도망가니까 더 조심히 다루자는 공부.”
“공부냐, 그게.”
“연애는 처음이라 너하고 연애하려고 공부하고 있어.”
최수호가 천연덕스럽게 대답하면서 내 옆에 붙어 섰다.
“친구일 때랑 좀 달라서 신기해.”
어쩌자고 사랑스러워 죽겠다는 눈으로 쳐다보고 난린지.
친구일 때하고 다르다는 말이 폐부를 지그시 누른다. 깊이 숨을 쉬기가 어려웠다.
책임질 수 있을 때까지는 친구라고 했지만, 역시 친구일 때하고는 다르다.
그 변화가 간지럽다. 낯설었다. 최수호가 혼자 무작정 치고 들어올 때하고는 또 달랐다.
“오늘 너네 집에서 안 자.”
“왜?!”
귀청 떨어지겠다. 재빠르게 따라오는 최수호를 무시하고 걸음을 재촉했다.
“일 칠까 봐 그런다.”
농담이었으면 좋겠는데 진심이다. 혈관을 한껏 데운 열기가 좀처럼 식지 않고 있었다. 최수호가 가까이 오기만 해도 단전에서부터 열이 끼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