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8.
“열아, 뒤에서 웅크리고 있으니까 너무 귀엽긴 한데…… 더 눈에 띄는 것 같아.”
“……그러냐?”
“근데 귀여우니까 계속해 줘.”
“됐거든.”
역시 오버인가. 머쓱하게 최수호 등 뒤에서 빠져나오긴 했지만, 엘리베이터를 타는 동안에도 긴장은 가시지 않았다.
우리 집 현관을 보면서 이렇게나 심장이 날뛰다니, 처음 있는 일이다. 평생 내 보금자리라고만 여겼던 곳인데. 안정적으로 이어져 온 생활이 변하는 건 생각보다 쉽다.
“정열이, 왔네.”
현관문이 열리자 아빠가 나를 맞이했다. 딱딱하게 굳어 있던 어깨가 어느새 느슨해졌다.
“얼굴 봐라, 더 험악해졌네. 약 발랐어?”
“내가 누구 닮아서 이 얼굴인 건데, 정 사장이 그런 말을 해. 약 발랐지. 집 오기 전에도 최수호가 발라 줬어.”
“수호도 왔어?”
내 뒤에 있는 최수호를 본 아빠의 표정이 훨씬 더 밝아졌다. 엄마나 아빠나 최수호한테 꿀이라도 발라 놨나.
“아버님, 안녕하세요.”
아버님? 이상하게 바뀐 호칭이 귀에 걸렸다.
싱글거리는 최수호를 노려보다 곧 체념했다. 장인어른이라고 안 부르는 게 어디냐.
최수호네 어머니한테 인사하고 나면 우리 엄마, 아빠한테도 말은 해야겠는데. 그보다 정진이 문제긴 하지.
나 복싱 다시 한다는 얘기에도 길길이 날뛰었던 양반인데, 최수호 치는 거 아닌가.
상상하자 주먹에 힘이 들어갔다. 형이 최수호를 때리겠다고 하면 역시 내가 싸우는 수밖에 없나. 무슨 최수호 두고 형제끼리 싸우는 것 같네.
“엄마는.”
긴장하고 들어와서 그런가, 집에 아빠 말고 아무도 없다는 걸 아는데도 살금살금 걷게 된다.
“아빠 회사에. 넌 계속 수호네 있는 거냐?”
“천 관장님네 가기로 했어. 훈련도 해야 되고, 돈도 없는데 여기서 관장님네 체육관으로 어떻게 출퇴근하냐.”
“천 관장님이 괜찮으시대?”
아빠가 조심스럽게 말했다. 천 관장님하고의 관계는 여전히 우리 가족들한테 어려운 문제다.
“진짜로 호적 파이면 입양해 주시겠다는데.”
“다 키워 놓은 아들 남 주게 생겼네.”
“명절에 용돈 정돈 부쳐 드릴게.”
들으란 듯한 한탄을 뒤로하고 최수호와 함께 내 방으로 들어섰다. 방 안은 나갔을 때하고 큰 변화가 없다.
“짐은 수호랑 둘이서 들고 가게? 아빠 차로 도와줘?”
“거창하게 챙길 것도 없는데 옷만 대충 싸서 가지, 뭐. 나랑 수호랑 할 테니까 아부지는 일 보세요.”
옷도 비슷비슷한 바지에 티셔츠, 트레이닝복 일색이라 많이 싸갈 것도 없다. 최수호하고 같이 가방에 옷을 담고 있자니 수학여행 짐 싸는 기분이 들었다.
“이 정도면 되지 않나?”
“옷 말고 다른 건 더 안 챙겨?”
“글러브는 어차피 새로 사야 하고, 복싱화 정도?”
나름대로 가출 짐인데 참 단출하다. 마지막으로 정말 챙길 게 없나 방을 훑어보는 차에 눈에 걸리는 게 있었다.
“아, 이것도 챙겨 가야겠다.”
창문가에 올려 뒀던 화분을 들어 올리자 최수호가 가방을 놓고 덩달아 일어섰다.
“수호?”
“뭐래. 아프냐? 수호는 너고, 선인장. 옷 싸는 동안 잠깐 들고 있어.”
화분 들고 보육원 가는 영화 속 주인공도 아닌데 선인장 들고 관장님 댁으로 가게 생겼다. 뭐가 좋은지 최수호는 선인장을 들고 함박웃음이다. 눈이 반달 같다. 사람이 어떻게 저렇게 웃냐.
하긴, 저거 최수호가 선물로 준 거였지.
고등학생 때 사 줬는데 왜 받았는지는 잊어버렸다. 선물받은 날 교장 선생님이 선인장 하나를 기르는 것도 애정이 필요하고 어려운 일이다 어쩌고 하는 얘기를 하셨던 것 같기도 하고.
“열아, 이거 봐. 여기 하트.”
최수호가 하트랍시고 가리킨 건 선인장 옆에 조그맣게 자라는 중인 새끼 선인장이었다. 위가 찌그러지긴 했지만 하트 같냐고 묻는다면, 글쎄다.
“그게 어딜 봐서 하트야.”
“여기. 자세히 봐.”
“뭘, 어떻게 더 자세히 봐.”
쪽.
최수호가 시키는 대로 고개 숙이는데 볼에 따뜻한 게 붙었다가 떨어졌다.
정체는 두말할 것도 없이 최수호의 입술이다. 이 자식이, 진짜.
황당해서 쳐다봤더니 이번에는 입술에 똑같은 감촉이 와 닿았다.
쪽, 쪽.
그것도 두 번 연달아서.
“죽고 싶지.”
최수호 멱살을 움켜쥐면서 묻자 최수호가 약하게 고개를 흔들었다.
“울 아빠가 보면 뭐라고 할 건데.”
“아드님을 천 관장님 말고 저한테 주세요.”
“야.”
연애 발표를 화성 송출 방송으로 해도 괜찮겠다는 생각은 취소다. 특히 최수호한테 마이크 맡겼다간 무슨 소리를 떠들지 모른다.
“가족들한테 말하는 건 좋은데, 갑자기 입술부터 붙이고 있는 거 보이라고는 안 했…….”
“열아!”
벌컥 방문이 열리더니 아빠가 들어섰다.
“뭐야, 왜?”
일단 최수호를 최대한 멀리 밀어냈다. 침착하게 대답한다고 했는데, 목이 자꾸 갈라졌다. 비밀이 있는 삶이라는 게 이렇게 살 떨리는 거였나.
아빠는 답지 않게 다급한 기색이었다.
“진이 올라온다는데.”
이건 또 무슨 청천벽력 같은 소린가. 최수호와의 장난 같은 뽀뽀가 어느덧 머릿속에서 멀어졌다.
“당분간 안 온다며. 짐 챙겨도 된다며.”
“두고 간 게 있어서 잠깐 온대.”
“미치겠다. 나 갑니다. 최수호, 나와.”
“아니야, 아니야. 지금 나가면 마주쳐. 엘리베이터 이미 탔대.”
미리 찍은 듯 익숙한 장면이 펼쳐진다. 현관문을 열고 나서자마자 열리는 엘리베이터 문. 나를 바라보는 형의 독수리처럼 매서운 눈동자. 오도 가도 못하다 계단으로 냅다 뛰는 나. 따라오는 최수호와 우리 형.
현관문과 계단을 이용한 빠른 탈출은 포기하기로 했다.
“그럼 어떡하라고.”
답답해하는 내게 아빠가 엄숙히 제안했다.
“숨어.”
* ♟ *
살다살다 내가 내 방 옷장에 숨는 일이 생길 줄이야.
옷장에 숨은 채 바깥에서 들리는 소리에 촉각을 곤두세우면서 긴장하는 건 공포 영화에서나 나오는 일인 줄 알았건만. 오늘의 테마는 공포인가 보다.
집에 오는 동안에도 숨었는데 집에 와서도 숨어야 한다니. 이게 정면 돌파 대신 피하기를 택한 사람의 숙명인가.
“최수호.”
침묵 속에서 나지막하게 최수호를 불렀다. 더는 말 안 하고 있기가 힘들어서였다.
“숨넘어가겠다.”
최수호의 가쁜 숨소리가 하도 잘 들려서 민망하다.
내 방에 딸린 빌트인 옷장은, 건장한 성인 남자 둘이 들어가 있기에는 턱없이 좁았다.
최수호하고 나는 어정쩡하게 몸을 웅크린 채 거의 부둥켜안고 있었다. 최수호의 고개가 내 어깨를 괴었고, 귓가에는 최수호의 입술이 닿을락 말락 했다.
옷장에 들어와서 밀착한 순간부터 최수호의 숨결은 점점 거칠어졌다. 그게 귀에 직통으로 꽂히는 바람에 죽을 맛이다. 사람 숨소리라는 건 왜 이렇게 에로틱한 건지.
“그럴지도 몰라.”
최수호의 나지막한 목소리가 귓가에 스며들었다. 밭아진 숨소리와 밀착한 몸에서 전해지는 체온이 한층 강렬하게 느껴진다.
미친 새끼. 이 와중에 왜 섹시하고 난리야.
이걸 섹시하다고 느끼고 있는 내가 미친 건가.
아니, 아무리 생각해도 최수호의 흥분한 얼굴은 반칙이다.
어둑한 옷장 안에서 나를 응시하는 최수호의 눈빛은 끈적하고 습했다. 졸려서 멍하니 있기만 해도 분위기 있다는 소리를 듣는 이목구비가 진득거리는 욕망에 젖어 들자 가히 압도될 지경이었다.
갓 갈아 둔 원두가 코앞에 있으면 의식하려 들지 않아도 바뀐 공기를 느낄 수밖에 없는 것하고 비슷하달까. 온갖 감정이 읽히는 얼굴을 보고 있노라면 심장이 두근두근 뛴다.
심지어 맞닿아 있는 가슴에서 뒤섞이는 심장 박동과 귓가를 간지럽히는 숨결까지 더해지자 환장할 지경이었다. 목이 막히고, 배가 자꾸 간지러웠다.
“열이 방 치우셨어요? 열려 있네.”
물론 지금 나를 제일 미칠 지경으로 몰아가는 건 옷장 바깥에서 들려오는 우리 형 목소리였지만.
“어어, 조금.”
“열이한테는 연락 없고요?”
“음, 금방 전화하겠지.”
우리 아빠지만 거짓말 참 못한다. 목소리가 뻣뻣해지는 게 척 들어도 느껴졌다.
형이 효자라 다행이다. 아빠가 자기를 속일 거라고는 의심도 안 할 테니까.
제발 빨리 나가라. 두고 간 거 가지러 왔다며 왜 미적거려. 최수호하고 언제까지 이러고 있으라고.
내 마음의 소리를 듣기라도 한 양 형이 내 방으로 들어오는 소리가 들렸다. 누가 나가랬지, 들어오랬냐.
“이건 왜 여기 뒀어요?”
보이는 게 없으니 뭘 말하는지 알 도리가 없다. 빛이 들어오는 조그만 틈으로 밖을 쳐다보기라도 하고 싶었지만 조금만 움직여도 문이 열릴 듯 아슬아슬했다.
“선인장 이거, 정열이 아끼는 거잖아.”
아, 미친. 옷장에 갖고 들어오기가 뭐 해서 책상에 대충 올려놓으라고 했는데 그걸 보냐. 형이 언제부터 내 방에 그렇게 관심이 많았다고.
“줘 봐. 창가에 다시 놓게.”
“아니야. 내 방에 둘게요.”
“네 방에?”
형 방에?
예상 못 한 대답에 당황스럽다 못해 황당했다.
“어, 정열 없는 동안 내가 물 주려고.”
형이 언제 선인장을 키워 봤다고.
차라리 물 안 주고 말리는 게 낫지, 매일 물 주다 썩으면 죽는단 말이야. 안절부절못하고 바깥에 귀 기울이다 체중이 옷장 문 쪽으로 쏠렸다.
순간적으로 균형을 잃고 옷장 문을 밀 뻔한 나를 최수호가 끌어안았다.
옆구리 곁에 느슨하게 닿아 있던 최수호의 팔이 단단히 허리를 감싸 온다. 안 그래도 가깝던 상체가 서로 눌렸다. 최수호의 입술이 목덜미에 닿는다.
심장이 폭죽놀이라도 하듯 요란한 소리를 냈다.
“응?”
먹먹하게 울리는 귓전에 다시 밖의 목소리가 꽂혔다. 형이었다.
“방금 무슨 소리 나지 않았나?”
“소, 소리? 바깥에서 났나? 진아, 두고 간 거 있다며.”
그래. 챙길 거 챙겨서 가라, 제발.
마음속으로 손을 모으고 빌었다. 제발 정진이 자기 방에 가서 짐이나 챙기게 해 주세요.
최수호 때문에 피가 이상한 데로 쏠리기 전에, 제발. 제가 체면을 좀 지키게 해 주세요.
“아니, 옷장이…….”
하지만 간절한 내 기도에도 불구하고 야속하게도 형은 옷장으로 다가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