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67화 (67/88)

67.

“응.”

“말이나 못 하면. 말이 되는 망상을 해라, 어?”

“안 찍으면 안 돼? 찍지 마.”

최수호의 표정은 이보다 심각할 수가 없다.

최수호만 보면 내가 전 세계 동시 개봉 영화라도 찍나 싶을 지경이다. 실상은 기껏해야 화면에 10초나 비칠까. 10초 이상 나오면 또 어떤가. 관객들은 최수호하고 양용배 구경하느라 내가 나오는지, 아닌지도 모를 텐데 말이다.

“넌 양용배하고 뽀뽀도 할 건데 난 촬영장에서 아르바이트도 못 하냐.”

“나 양용배랑 뽀뽀해?”

“영화에서 한다며.”

아무래도 황 감독님 시나리오를 다시 꼼꼼하게 읽어 봐야 할 것 같다. 시나리오는 뼈대일 뿐 투자에 따라, 또 제작사에 따라, 그리고 촬영 상황에 따라 얼마든지 바뀔 수 있다지만 내 직감상 키스신은 더해지면 더해졌지 빠지진 않을 거다.

어떻게 아냐면, 그냥 안다. 명색이 자기 짝사랑 얘기를 담은 영화인데, 더불어 커밍아웃 겸 개봉하는 퀴어 영화인데 얌전히 손만 잡고 끝날 것 같지는 않았다.

최수호가 그간 찍은 작품도 스킨십이 나오는 장면이 없었던 건 아니다. 그동안은 미성년자라 대단한 수위는 아니었다고 해도, 최수호가 다른 사람하고 키스하는 것 정도는 열댓 번도 넘게 봤다. 것도 공중파 채널에서 온 국민한테 방영되는 걸로.

상대가 양용배로 바뀌었다고 해서 특별히 달라질 것도 없긴 하다.

없다고 말하고 싶지만.

“하고 싶으시다며. 최수호, 네가. 양용배하고.”

드라마에서 쪽쪽거리는 걸 볼 때하고 지금은, 일단 최수호하고 내 관계부터 다르지 않나.

면전에서 최수호가 양용배 너하고 하면 좋겠다고 콕 집어 말하는 걸 듣는 심경이 아주 편하지만은 않았다.

우리 엄마가 들으면 손뼉을 칠 거다. 엄마 말대로 난 질투가 득실득실한 인간인 게 확실하다.

“난 그냥 차라리 양용배가 나을 것 같길래…….”

“아, 그러셔.”

“열아, 질투했어?”

최수호의 물음에 익숙한 열기가 실렸다.

눈 뒤집힐 때면 내는, 딱 그 목소리다.

나를 가두듯 벽을 지탱하고 있는 최수호의 팔을 하나씩 치워 냈다. 욕실에서 계속 이러고 있는 건 사양이다.

“했겠냐.”

매몰차게 말하고 욕실을 벗어나자 최수호의 눈동자에서 이글거리던 기세가 주춤했다. 요즘 애 기를 너무 죽여 놨나. 옛날 같았으면 꿈쩍도 안 했을 말에도 얌전해진다.

재빨리 나를 따라오면서 최수호는 주절주절 열심히 말을 붙였다. 표정은 여전히 시무룩했다. 귀나 꼬리가 있었다면 축 늘어져 있지 않았을까.

“그래도 난 너 말고는 누구하고 하든, 일이라는 생각밖에 안 해. 너 아닌 사람하고 하는 건 강아지한테 하는 거하고 비슷한…….”

“했다.”

열심히 말을 늘어놓던 최수호가 입을 닫았다.

“했다고.”

“…….”

“질투.”

“그럼…….”

“네가 뭐라고 하건 엑스트라 알바는 할 예정이니까 조용히 하고.”

“그래도, 열아.”

“애초에 내가 할지 안 할지를, 왜 네가 정하냐.”

딱 잘라 말하고 소파에 앉자 최수호는 다시 기가 죽은 얼굴이다.

황 감독님의 아르바이트 제안에 선뜻 고개를 끄덕인 이유로는 질투 외에도 괘씸함이 있다. 자기는 방금까지 양용배 꼬셔서 끌어들여 놓고 나한테는 엑스트라고 뭐고 절대 안 된다니 얄밉지 않나.

“그리고 알바라는 핑계 아니면 놀러 갈 구실도 없을 거 아니야.”

단역에 일급제로나마 같이 일하면 최수호 보러 가기 쉬워지지 않을까 싶었다. 아무리 친한 사람들이라도 남이 일하는 곳에 내 편한 대로 드나들기는 그렇다.

“근데 너, 다른 영화 하기로 한 거 아니었냐. 어머니가 뭐라고 안 하셔?”

최수호가 여전히 불만스러운 기색이길래 재빨리 말을 돌렸다. 집요하기론 둘째가라면 서러운 최수호가 아닌가. 지금 떨쳐 내야지, 본격적으로 물고 늘어지면 한도 끝도 없다.

“안 좋아하시는데 어쩔 수 없지.”

“웬일이냐. 어머니 일에.”

본래 찍으려던 영화를 관뒀다는 얘기를 들었을 때 가장 걱정된 게 그 부분이었다.

내가 알기로 최수호가 어머니가 싫어할 만한 일을 한 건 이번이 처음이다. 그걸 ‘어쩔 수 없다’ 정도로 넘어간 것도.

“나 어머니한테 너 소개하기로 했어.”

새삼스러운 눈으로 쳐다보고 있는데 최수호가 갑자기 고백했다.

“뭔데, 그 급전개는?”

아무리 최수호네 어머니가 최수호한테 관심이 없었다고 해도 최수호의 유일한 친구였던 나를 모를 정도는 아니다. 그러니 여기서 말하는 소개란 친구로서의 소개는 아닐 거다.

“뭐, 사귈 거라고 말한 거야?”

“응. 말하려고.”

사귀기도 전에 사귄다고 예고부터 하고 다니네. 최수호 하는 짓만 보면 벌써 결혼 1주년이다.

명색이 커밍아웃인데 결정이 시원시원하다. 최수호네 어머니라면 워낙 방임주의인지, 무관심인지 모를 걸로 일관하시던 분이라 더욱 반응이 걱정스러웠다.

“너 괜찮겠어?”

최수호가 어머니한테 인정받으려고 얼마나 애를 썼는지 아는 사람으로서 하는 말이기도 했지만, 선뜻 나하고 사귄다는 걸 남들한테 말해도 되는 건지 고민스러워서 묻는 말이기도 했다.

“네가 괜찮으면 누구한테 말하든 난 상관없어.”

최수호네 어머니가 아니라, 전 국민한테 대고 나랑 사귄다고 떠들어도 된다는 뜻이다.

물론 최수호가 괜찮다면.

한국에서 최수호 모르는 사람 찾는 게 더 빠를 지경인데, 그 최수호가 사귀는 게 동년배 남자라니, 대한민국이 뒤집힐 일이다.

최수호한테 고백했을 때부터 그쯤은 받아들이겠다고 결심했다.

그러나 그건 내 결심이고, 나보다 훨씬 유명인인 최수호는 입장이 다를 수도 있잖은가.

“열이 너하고 사귀는 거 화성까지 방송하고 싶어.”

“아직 사귀는 거 아니거든. 화성은 무슨. 진짜 오버 적당히 해라.”

“진심이야. 근데 네가 힘든 건 싫어.”

최수호는 진지했다. 화성 운운했던 주제에 웃음기 하나 없이 진중하게 나를 응시한다.

최수호도 나를 걱정하는 거다.

“그래도 가족들한테는 얘기하고 싶어서.”

가족, 이라고 말하면서 최수호가 잠깐 머뭇거렸다.

“다친 데는? 진이 형하고 얘기 다 끝난 거야?”

나 얻어터진 상처가 어지간히 신경 쓰이나 보다. 형하고 싸웠다는 것 자체가 신경 쓰이는 거든지. 눈을 찡그릴 때마다 멍이 든 데가 욱신거렸다.

“맞기만 했어. 나 내일 짐 빼야 해서 오늘 여기서 잔다.”

“짐 빼?”

“집에서 쫓겨났어.”

본격적으로 쫓아내기 전부터 대피해 있는 도중이니 자진 퇴거라고 해야 하나. 내 고민에 응답이라도 하듯 주머니에서 핸드폰이 울렸다.

때마침 아빠한테 온 전화다.

“여보세요.”

- 아들.

“박 여사처럼 부르지 마. 간드러지게 안 불러도 나 아빠 아들인 거 알아. 아빠 딴 아들이 뭐래.”

- 진이야 노발대발했지. 너 집에 못 들어오게 하라고 엄마랑 아빠한테 다짐도 받았다. 참 똑 부러져.

“똑 부러져? 저는 갈비뼈가 똑, 부러질 뻔했는데요. 나 내일 언제 집에 가? 짐 가져가게.”

천 관장님 댁에서 숙식하기로 했다지만 옷이나 칫솔 정도는 가져가야겠는데, 문제는 우리 형하고 집 근처에서 마주치기라도 하면 내가 똑, 부러질 수도 있다는 거다.

- 지금은 수호네 집이야?

“어, 내일 형 몇 시에 나간대.”

- 수호네면 금방 오겠네. 봐서 내일 전화할게. 수호한테 잘 자라고 전해 주고.

“엄마는.”

- 응?

“엄마는 뭐래.”

- 엄마야 진이가 맞다고 하지.

“…….”

- 너 다칠까 봐 걱정이지, 네 엄마야.

“알았어. 박 여사 위로는 정 사장이 해. 내일 전화해요.”

전화기 더 붙들고 있어 봤자 정 사장님이 구구절절 위로 안 되는 위로만 할 것 같길래 전화를 끊었다.

형이나 부모님과 싸우는 게 언제까지 이어질까. 우리 형도 고집이라면 쇠심줄 저리 가라다. 어쩌면 형은 내가 복싱을 계속하는 한 절대로 나를 용서하지 않을지도 모른다.

내 선택이 잘못된 건 아니었나, 돌이켜 보게 된다. 아니라고 이미 확신했으면서도. 여러 번 망설이고 고민했으면서.

내가 사랑하는 사람들로부터 밀려나는 기분이란 이런 거였다. 가슴을 베이는 것 같다. 자꾸만.

“나는 네가 복싱 다시 시작해서 좋아.”

최수호의 팔이 내 어깨에 단단히 감겼다. 인대나 뼈가 무리하지 않도록 잡아 주는 압박 붕대 같았다.

“그러냐. 너라도 좋다니까 다행이다.”

진심이다. 아무리 내가 복싱을 계속하고 싶었더라도, 최수호까지 말렸다면 다시 시작하기 어려웠을 거다.

“네 손이나 내놔 봐. 안 아파? 덧나진 않았고?”

“멀쩡해. 금방 나을 거야.”

붕대가 감긴 최수호의 손을 만져 보았다. 그런다고 낫게 할 수 있는 건 아니었지만.

“열아.”

최수호는 언제나 그렇듯 나직하고 분명하게 내 이름을 불렀다.

“괜찮을 거야.”

최수호의 말속에 들어 있는 확신이 나마저 설득시켰다. 최수호의 손을 만지면서, 나는 안심했다.

“어, 괜찮을 거야.”

진심으로 그렇게 생각한다. 방금까지의 흔들림이 거짓말인 것처럼.

화성에 대고 말하라고 해도 흔들림 없이 말할 수 있다.

최수호가 있으니까, 난 괜찮을 거라고.

* * *

우리 집에 가는데 이렇게 긴장해야 하나.

혹시라도 정진하고 마주칠지도 몰라 최수호를 앞에 두고 걸었다. 이 자식 등짝은 언제 이렇게 넓어졌는지 숨어서 가기 어렵지 않다.

“남들 눈에 너 숨겨 주는 건 나였는데, 내 신세가 어쩌다가.”

“그러게. 진이 형 마주치면 절대 안 되는 거야?”

“어, 안 돼. 절대.”

따지고 보면야 절대 안 될 것까지는 없다.

마주쳐 봤자 형이 진짜 나를 죽이겠냐, 길바닥에서 또 패겠냐. 집 들어올 생각 말라고 날 선 말이나 주고받는 정도로 그칠 테지만, 그게 싫다.

형한테 그런 말 듣기도 싫고, 형이 나한테 그런 말 하게 하고 싶지도 않다.

안 마주치는 게 제일 낫다. 가끔은 도망치거나 피할 필요도 있는 거다.

“최수호, 너 평소에 되게 고생하는구나. 남의 눈 피하는 게 쉬운 일이 아니네.”

최수호의 등에 숨어 집까지 가는 길이 이역만리로 느껴진다. 집 떠나면 고생이라던데, 왜 나는 집에 가는 길이 고생이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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