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65화 (65/88)

65.

그 질문에는 바로 대답할 수가 없었다.

태어나는 건 고를 수 없다. 그렇다면 살아가는 건 어땠나.

침묵하며 생각에 잠긴 내 모습을 가만히 응시하던 황 감독님이 앞으로 걸어갔다. 벌써 보행 신호가 바뀌었다.

“나한테 희백이는 불가피한 사람이야.”

길을 건너 다른 골목으로 접어들면서도 황 감독님은 누군가를 찾고 있는 것만 같다. 막상 마주치면 도망칠 거면서.

“열심히 피하고 계시면서요.”

“몸으로라도 피하는 중인 거지.”

“저한테 열이도 그래요.”

어디에 있어도 찾게 되는 사람이 있다면 내게는 그게 열이다.

“피할 수 없어요.”

나를 더 예리하고 견고하게 만드는 사람.

열이가 내가 원하는 방식으로 나를 좋아해 주지 않을 때도 그랬다. 열이의 존재는 내 삶에 혜성처럼 등장해서 세상의 채도와 명도를 바꾸었다.

“이젠 다른 배우는 생각도 못 하겠네.”

황 감독님이 중얼거리더니 멈춰 섰다. 건널목 신호등 곁에 선 황 감독님은 갑자기 머리를 쥐어뜯었다.

“<악과>도 평하고 흥행이 투자 대비 좋았던 거지, 순 제작비 3억 원도 안 됐는데, 수호 씨…… 이번 드라마 편당 출연료가……?”

“1억이요.”

황 감독님이 머리카락을 실컷 뜯고 내려온 양손에 얼굴을 묻었다. 어깨가 들썩이는 것도 같다.

“감독님한테 1억 달라고 한 거 아니니까 울지 마시고요.”

“영화 개런티는 그보다 훨씬 높잖아.”

“그렇죠. 감독님이 더 잘 아시겠지만.”

“한 4억 해?”

“한 4억 해요.”

“허어어어엉.”

“울지 마시라니까요. 설마 진짜 사비 털려고 하셨어요?”

“영화 진흥 기금으로 안 되면 내 돈이라도 털어야지, 어떡해. 그래도 집 한 채는 있으니까 그거라도 팔까 했지.”

아까 신장 팔지 말라고 했더니 이번에는 집을 파시겠다니. 꼭 팔아야 한다면 신장보다야 집이 낫긴 하다만. 크랭크 인까지 해결할 것들을 떠올리니 벌써 한숨이 나온다.

“제작사는요.”

“전에 나 써 줬던 데랑 독립 밀어 주는 데 위주로 시나리오 넣으면서 알아보고 있었지. 수호 씨가 한다고 할 줄 알았나. 큰 영화는 불려 갔다가 촬영 들어가기 전에 감독 바뀌었단 말이야.”

이미 알고 있던 내용이다. 전작이 전부 저예산에, 화제가 됐던 <악과>도 낮은 예산으로 이만한 액션 영화를 찍어 냈다는 찬사가 주요 평이었으니까.

일반적으로 영화 산업은 제작사가 감독을 고용하는 형태다. 영화판을 한참 떠나 있던 감독이, 아무리 좋게 봐도 상업성하고는 거리가 있는 시나리오를 들고 제작해 줄 곳을 찾는다는 건 어려울 수밖에 없다.

어머니한테 생떼를 부리다시피 한 것도 그런 사정을 짐작했던 탓이다. 이것도 성사될 가능성은 적지만.

“일단 제 개런티는 신경 쓰지 마세요. 감독님 집 팔아서 마련한 돈 받을 생각은 없으니까요.”

“아니야. 수호 씨가 이렇게까지 했는데 나도 뭐든 해야지.”

“그래도 집은 팔지 마세요. 또 언제 집을 사실 수 있을 줄 알고.”

집 팔아서 찍은 영화 말아먹으면 다음은 어쩌시려고요. 황 감독님도 비슷한 생각을 했는지 곧장 의기소침해졌다.

“으응. 일단 수호 씨 어머니가 계시는 제작사, 나도 이번에 찾아가 볼게.”

국내에 어머니가 공동 대표를 맡은 제작사가 있다. 아무래도 황 감독님 역시 그나마 그쪽이 가능성 있다는 데 동감하신 듯했다.

“아실지 모르겠는데 거기 홍 감독님하고 핫라인 연결된 직원들 천지예요.”

“그건…… 응……. 감수해야지…….”

전혀 감수되는 표정이 아니신데요.

제작사로 당장 뛰어가는 홍희백 감독님과 황 감독님의 추격전이 벌써부터 머릿속에 그려지는 듯했다. 이쯤 되니 언제까지 도망칠 건 지 물어보고 싶다.

하지만 자기를 거절한 사람, 언제든 다시 거절할 사람에게서 도망치는 심경은 지나치리만큼 잘 이해가 돼서.

좋아서 더 무서운 것도 있는 법이니까.

다시 고개를 든 황 감독님이 내 손을 잡았다. 땀이 식어 끈적거리는 뜨거운 손이다.

나는 손을 빼지 않았다.

“꼭 최수호 씨가 연기해 줬으면 좋겠어. 목숨 걸고 찍을 테니까 나만 믿고 따라와.”

“목숨은 걸지 마세요.”

“응…….”

맞잡은 손을 조금 흔들어 보았다. 남의 손을 굳게 잡은 느낌도, 그리 싫지만은 않다.

“안 거셔도 믿을게요.”

* * *

믿을 수가 없다.

“열아, 어떡해?”

눈물이 날 지경이다.

“뭘 어떡해. 약 발랐어. 네 손이나 어떻게 해라.”

“누가 이랬어? 내가 가서 죽…….”

“정진인데 죽이게?”

“…….”

“그래, 아서라. 네가 먼저 죽는다. 나 맞은 거 처음 보냐? 훈련 재개하고 나면 앞으로도 많이 볼꼴이니까 다시 익숙해져라.”

어깨를 으쓱한 열이가 퉁퉁 부어오른 눈가에 손수건으로 싼 아이스 팩을 눌렀다.

열이 얼굴은 엉망진창이었다.

“많이 아파? 여기는?”

오른쪽 눈만 아니라 옷 아래도 마찬가지다. 약을 바르고 붕대를 감은 옆구리는 빗장뼈 부근까지 멍이 번져 올라오고 있었다.

“네가 건드리지만 않으면 안 아파.”

“아파? 나 지금 아프게 만졌어?”

“내 옷 안으로 들어올 기세로 얼굴 들이박고 있으면 당연히 눌리지, 안 눌리겠냐. 뭐 하는 건데.”

혹시나 뒤로 환부가 보일까 봐 열이의 상의 자락을 쥐고 고개를 바짝 대고 있었더니 살이 눌린 모양이다. 상체를 바로 세우면서도 나는 누가 볼세라 재빨리 옷자락을 끌어내렸다.

“다른 사람들한테 네 맨살 보여 주기 싫단 말이야.”

고개를 돌린 곳에는 양용배와 황 감독님이 의자에 앉아 있다.

“아주 꼴값들을 떠세요.”

양용배가 콧방귀를 뀌었다. 팔짱을 끼고 다리까지 꼬고 있는 자세가 온몸으로 삐딱함을 표현하고 있는 듯하다.

“용배 씨는 왜 여기 있어?”

허허실실 웃기만 하던 황 감독님이 양용배에게 말을 걸었다. 나도 궁금하다. 왜 내 집에 양용배가 있는 건지.

황 감독님께 집 앞까지 태워 주셨으니 차라도 한 잔 하고 가시라 권해 집에 들어오자, 열이가 있는 건 좋았다. 그런데 왜 양용배까지 덤으로 있는지는 의문이었다.

“쟤 약 사 줬는데요.”

양용배가 열이의 멍 자국을 가리켰다.

“네가 왜 열이 약을 사 줘?”

“내가 사 달라고 했어.”

열이가 양용배를 찌를 듯 세워진 내 검지를 감싸서 아래로 내렸다.

“너희 집에 있는 연고는 다 떨어졌고 이 얼굴 하고 당장 천 관장님 댁 가기는 그렇고, 집도 못 가고.”

“친구는 나밖에 없고.”

“아니거든.”

“뭐가 아니야.”

연신 말꼬리를 잡고 늘어지는 양용배에게 열이가 주먹을 들어 보였다.

“복싱 다시 한다고 했다가 쫓겨났다는 거야? 무일푼으로?”

가만히 듣던 황 감독님이 엄지와 검지를 붙여 동그라미를 만들었다.

“네.”

열이가 덩달아 손으로 동그라미를 만들고는 확 주먹을 쥐어 없앴다. 집을 파니 마니 하던 입장으로 동병상련이 느껴지는지 황 감독님이 안타까운 표정을 지었다.

“열아, 내 카드 줄게.”

“됐어. 내가 네 돈을 왜 쓰냐. 아르바이트 찾을 거야.”

“무슨 아르바이트?”

“몰라. 찾아보고. 근데 감독님은 왜 최수호랑 같이 오셨어요?”

“나?”

유심히 대화를 듣는 듯하던 황 감독님이 열이의 질문에 눈을 끔뻑였다.

“난 수호 씨 집에 바래다줄 겸, 감독으로서 배우와 논의의 장을 가질 겸.”

“에엥? 얘, 홍희백 감독님 영화 찍잖아요.”

양용배가 끼어들었다. 검지로 나를 쿡쿡, 찌르기까지 하길래 기꺼이 손을 뿌리쳐 줬다.

“안 찍기로 했어.”

“진심? 홍희백 영화를 포기하고 이, 그, 감독님하고 한다고?”

양용배의 검지가 고스란히 황 감독님을 향했다. 황 감독님은 웃기만 했다. 양용배의 눈만 점점 커진다. 저러다 튀어나오겠다.

“뭔데. 뭔 영화길래.”

“말해 주면 알아?”

“하여간 이 새낀, 한마디를 해도 싸가지 없게 한다니까? 궁금하니까 그렇지.”

“용배 씨도 볼래? 안 그래도 수호 씨 상대역 절찬리에 캐스팅 중인데.”

“상대역이요?”

“퀴어물이거든.”

양용배가 크게 숨을 들이켰다.

“허어어. 대박. 최수호, 대표님이 너 믹서기에 던져서 갈아 버리려고 하겠다.”

“그러든가, 말든가.”

어머니가 배역에 날 추천한 건 당연히 소속사 대표님하고도 말이 오간 사항일 거다.

지금 내가 몸담은 회사는 어머니 권유로 옮겨 오기 전까지는 영세한 곳이었다. 대표님과 어머니 둘 다 그때와는 입지부터 달라졌지만, 지금까지 두 사람의 우정은 변함이 없다.

하지만 어머니한테도 면전에서 안 하겠다, 폭탄을 던지고 온 차에 어머니 친구 겸 대표님 서슬 정도에 움츠러들 리가. 가장 큰 산을 이미 넘었으니 이젠 거리낄 게 없다, 이거다.

“너 이거 진짜 하냐?”

“어.”

내 대답을 들은 양용배가 관자놀이를 문지르며 눈을 굴려 댔다. 턱까지 괴고 뭔가 고민하는 기색이 역력하다.

“제작, 투자, 배급은 결정됐어요?”

“아직, 그건.”

“아, 제작도 결정 안 된 거예요? 오, 최수호. 데뷔 최초 독립 영화?”

“그렇게 될 수도 있겠네.”

영화 형태야 별로 중요한 건 아니다. 별 투자 없이 촬영에 들어가야 할 경우 황 감독님이 본인 예산 내로 잘 찍을 수 있을지는 문제가 되지만.

“음, 흐음.”

혼자 고개를 주억거리던 양용배가 황 감독님에게로 슬쩍 몸을 기울였다.

“이거 언제 촬영 들어가시는데요?”

“일단 준비는 꽤 전부터 하던 거라서, 장소 섭외만 끝나면 촬영은 곧 들어갈 수 있지.”

“투자도 아직 안 받으셨다면서 촬영 곧 들어간다는 그짓말을 다.”

말은 그렇게 해 놓고도 양용배는 황 감독님을 힐긋거리며 뜸을 들였다.

“흐음……. 아니, 뭐. 나도 그거 찍을 때 즈음에는 한가할 수도 있어서.”

촬영 기간 확정되지도 않았는데 언제 찍는 줄 알고.

“양용배 너, 진심 최수호 좋아한다.”

“아니라고 했지. 정열, 당장 취소해. 최수호 때문에 한 말 아니야. 내 필모 내에서 장르가 도전적인 게 마음에 들어서 그러는 거라고. 최수호 때문 아니거든? 나도 한 번 정도는 색다른 배역도 맡고 싶고, 갓 성인이 된 영화인으로서 성장 영화에도 흥미가 있어서, 관객들한테 주고 싶은 메시지가 있어서 그러는 거거든? 최수호? 참 나, 최수호가 무슨 상관인데?!”

“용배야, 침 튀긴다. 진정 좀 해라. 숨 쉬면서 말해.”

“좋네.”

다시 속사포처럼 말을 쏟아 낼 듯 자세를 잡던 양용배가 입을 딱 다물었다. 대신 내 쪽을 보면서 한껏 멍청한 표정을 지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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