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4.
“정열 씨가 그러라고 해서?”
장난스러운 황 감독님의 말에 나는 고개를 저었다.
“제가 행복해야 열이도 행복하니까.”
그 말이 어떤 뜻인지, 이제는 좀 알 것 같다.
“열심히 살고 싶어요. 잘 살 거예요, 꼭. 열이랑.”
아침에 눈을 뜨고, 혼자 집에 남은 후부터 계속 다짐했다. 열이가 소중하게 생각하는 건 나도 지키고 싶다.
열이가 내가 소중하다고 말한다면 나도 그렇게 믿고 싶다. 열이를 믿으니까.
시선이 느껴졌다. 황 감독님이 나를 물끄러미 보고 있었다.
“왜요?”
“부러워서.”
대답과 함께 번져 나간 쓴웃음이 곧 흐려진다. 나는 거기에 담긴 온갖 말들이 소리가 되지 않고 사그라지는 것을 보았다.
“감독님 영화에 출연하는 대신에, 조건이 하나 있는데요.”
* * *
“수호 씨, 진짜 가게?”
황 감독님이 물었다. 오는 동안 거의 스무 번 정도 반복된 질문이다.
“네.”
“나도? 진짜로?”
“감독님이 안 가시면 배우인 저 혼자 가요? 제작 팀 역할은 본인이 다 하시게요? 아직 제작사도 못 찾으셨잖아요.”
“그래도 이건 별개 문제잖아. 나야 팔릴 쪽도 없다지만 수호 씨 입장 난처해지지 않을까 싶어서 다시 물어보는 거야.”
“네. 괜찮아요. 그만 물어보세요. 대답하기 귀찮으니까.”
수호 씨는 참 한결같이 왕자님 같은 게 보기 좋다느니, 하는 소리가 들려왔지만 무시하고 안으로 들어섰다.
여기로 오기 전 매니저 형하고 통화를 마쳤다. 처음에는 내 부탁에 난감해하던 매니저 형은 중간부터 마음이 바뀐 듯했다.
- 수호 네가 이렇게 얘기하는 거 처음 들어.
스태프 라인업을 앞두고 홍희백 감독님과 어머니가 어디에서 미팅할지, 언제쯤 일정이 끝나는지, 어디서 기다리면 되는지.
내가 물은 건 그런 것들이었다.
매니저 형은 이 식당 주소를 알려 주었다. 어머니와 홍 감독님이 예비 스태프와 미팅을 마쳤을 식당이다.
예약자 이름을 확인하고 방으로 들어서자 어머니와 홍희백 감독님이 차례로 나를 돌아보았다. 시간을 잘 맞췄나. 다행히 안에는 둘뿐이다.
“안녕하세요.”
들이닥친 인물이 적잖이 의외였는지 두 사람 얼굴이 확연히 굳어졌다. 어머니는 내게서 눈을 떼지 않았지만 홍희백 감독님의 눈길은 금세 내 뒤쪽에 있는 황 감독님에게로 옮겨 갔다.
“연락도 없이 여기까지 수호 네가 무슨 일로…….”
“저 감독님 영화 못 찍는다고 말씀드리려고요.”
두 사람 맞은편에 자리를 잡으며 말하자 홍희백 감독님의 시선이 비로소 내게로 돌아왔다.
“허.”
홍희백 감독님은 황망함을 노골적으로 드러냈다. 어머니도 상황은 별반 다르지 않다. 홍희백 감독님만큼 적나라하지는 않더라도 눈빛은 이미 나를 추궁 중이다.
“그 말 하려고 회의 중인 사람들 앞에 나타났니?”
입으로도 물론.
“아뇨. 다른 용건도 있어요.”
내 대답이 그리 흡족하지는 않았는지 어머니의 미간에 균열이 일었다. 아마 이제부터 내가 하는 얘기도 어머니께 그리 듣기 좋은 얘기는 아닐 거다.
“황춘식 감독님 영화, 프로듀스해 주세요.”
어머니가 제작자로 나선 건 이번 영화가 처음이 아니다. 기획이나 라인 프로듀서를 맡았던 작품도 있다.
예상대로 어머니의 표정이 흔들렸다.
“다른 영화 제작 논의 중인 테이블에서, 그것도 갑자기 찾아와서 꺼낼 말은 아닌 것 같네.”
“두 분 차례로 따로 찾아뵙거나 제가 자리 만들어 봤자 그때까지 그러지 말라는 설득만 듣게 될 것 같아서요. 어차피 전 의견 꺾을 생각 없으니까 한 번에 말씀드리려고 했죠.”
얘기를 듣고 있던 홍희백 감독님이 다시 헛숨을 내쉬며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욕이라도 한바탕 퍼붓고 싶어 하는 기색이다. 어머니는 생각에 잠긴 듯 눈을 가늘게 접었다.
“복귀작이라고 들었는데. 규모 크게 잡는 작품도 아니라고 들었고. 그런데 내가 합류해야 할 이유라도 있니?”
“제가 출연하니까요.”
제대로 앉지도 못하고 내 뒤에서 안절부절못하던 황 감독님까지 나를 뚫어져라 응시했다. 안으로 들어오면서 뭐라고 설득할 거냐고 묻는 황 감독님에게 그냥 내 마음 가는 대로 말할 거라고 했는데, 실제로 지금 그러고 있다.
“우리 엄마니까. 내가 엄마가 필요하니까요.”
어떻게 들으면 어린애 생떼처럼 들릴 말을 뱉고 났더니 오히려 속이 가벼워졌다. 여기까지 오는 내내 실은 초조했다. 아마 황 감독님보다 내가 훨씬 긴장했을 거다.
꼭 받아들여질 거라 생각하고 청한 건 아니다.
거절당해도 어쩔 수 없다. 그렇지만, 말해 보고 싶었다.
한 번 정도는 무서워하지 않고 말해 보고 싶었다.
어머니는 묘한 표정으로 입술을 달싹였다. 그래도 늘 짓는 그림 같은 미소보다는 훨씬 살아 있는 것처럼 보인다.
“당장 답 줄 수 있는 요청 아니야.”
어쩌면 조금, 겁먹은 것처럼 보이기까지 했다.
“생각해 보자. 연락할게.”
“제가 연락할게요.”
바로 대꾸하자 어머니는 아까보다도 오묘한 얼굴이 되었다.
“제가 좋아하는 사람, 어머니한테 소개하고 싶어요.”
어머니도 열이의 존재 정도는 알지만, 애인이 될 사람이라고 하면 어떻게 반응할지는 미지수다. 그래도 내가 누굴 좋아하는지 알아줬으면 좋겠다. 나는 여전히 어머니를 버리는 게 불가능하니까.
어머니는 끄덕이는 대신 고개를 갸웃하게 빼고 나를 바라보았다.
마치 아주 낯선 것을 보는 사람같이. 처음으로 발견한 것을 보듯이.
* * *
“나 심장 두근거려서 못 살겠다. 수호 씨, 원래 그렇게 과격해?”
황 감독님은 건물을 빠져나오고 나서야 입을 열었다. 내내 숨이라도 참은 듯 숨까지 거칠게 몰아쉰다.
“가서 식탁 엎은 것도 아닌데, 그게 과격한가요.”
“충분히 과격했어. 아무리 그래도 거기다 대고 본인들 영화 안 하겠다는 소리에, 다른 영화 제작해 달라는 말까지 하면 어떡해.”
아까부터 황 감독님은 가슴에서 손을 떼지 못하고 있었다. 치우면 심장이 튀어나올 거라고 믿는 사람 같다. 대범한 건지, 아닌지 알 수가 없는 분이다.
“뭐 어때요. 거절할 거면 듣는 쪽이 고려해 보고 알아서 거절하겠지.”
“그래도 그게.”
“야, 황춘식.”
나와 황 감독님의 뒤에서 거친 부름이 귀를 때렸다.
돌아보니 아니나 다를까, 홍희백 감독님이 우리를 노려보고 있었다. 정확히는 황 감독님을.
홍희백 감독님이 나와 황 감독님 쪽으로 성큼성큼 다가섰다.
“남의 배우 뺏어 가니까 좋아?”
바로 앞까지 다가와 숫제 윽박이다. 눈총이 칼날이었다.
“뺏은 게 아니라 제가 간 건데요.”
“최수호 씨는 빠져 있어.”
제 얘긴 줄 알고 끼어든 건데. 반론하지 않은 건 정말 내가 나설 상황이 아닌 것 같아서다.
“희백아…….”
황 감독님의 변화는 보는 쪽이 혀를 차게 될 정도였다. 홍희백 감독이 자리를 박차고 나와 이름을 부르고 난 후 황 감독님의 여유는 완전히 사라졌다.
덩치가 꽤 있다고 생각했는데, 볼썽사납게 목소리를 떨며 주춤거리니 평소보다 작아 보인다. 반면에 황 감독님에게로 다가서는 홍희백 감독님의 기세는 흉흉했다.
“또 도망가기만 해.”
으름장이 마치 촉발제라도 된 것 같았다.
황 감독님은 홍희백 감독님의 위협이 끝나자 바로 내 손을 움켜잡고, 달려 나갔다.
“황춘식! 야, 새끼야! 안 서?!”
뒤에서 고래고래 소리를 지르건 말건, 나 몰라라 줄행랑이다. 대낮의 추격전이라니. 이런 장면은 예상에 없었는데.
“헉, 헉…… 허억…….”
“감독님, 멈추시죠. 숨넘어가겠는데요.”
“아, 헉, 커윽, 아, 안 돼.”
“계속 달리시게요?”
“잡혀…….”
전력 질주로 얼마나 뛰었을까. 숨을 꼴딱대면서 겨우 말을 내뱉는 게 애처로울 정도다. 이제는 내가 끌려가는 게 아니라 앞에서 끌어 주는 중이었다.
“안 잡혀요. 아무도 안 따라오니까 안심하고 멈추세요.”
“진, 흐어억…….”
“네. 진짜요.”
확인해 주고 나서야 황 감독님이 자리에 멈춰 섰다. 무너지듯 주저앉아 헐떡대는 이마가 땀으로 촉촉하다.
“물 사다 드려요?”
“우읍, 아니. 수호 씨는, 안 힘들어?”
“전 별로.”
“정열 씨 말이 진짜였네……. 대체 그 체력은 어디서 와. 젊음인가.”
“열이가 제 얘기했어요?”
“어어어, 최근에 정열 씨랑 뛰었거든.”
“열이랑 뛰셨어요? 열이 엄청 잘 뛰는데. 열이는 절대 안 지쳐요.”
“그때도 나만 나가떨어지더라고. 일어나게 손 좀 빌려줄래?”
“…….”
“수호 씨?”
“땀난 손, 잡기 싫은데요.”
“미치겠다. 만약에 정열 씨 손이었으면?”
“열이 손은 종일도 잡고 다닐 수 있어요.”
황 감독님이 고개를 절레절레 저으며 몸을 일으켰다. 휘청대긴 했지만 그래도 바로 서는 데 문제는 없어 보인다.
한참을 전력 질주로 뛰어온 지금보다 아까 홍희백 감독님 앞에 있을 때가 훨씬 힘겨워 보였다.
“그때도 도망치려고 뛰셨어요?”
“정열 씨랑 달렸을 때?”
“좋아하는데 왜 도망가세요?”
“……어떻게 알았어?”
어디까지 왔는지 가늠하듯 주변을 두리번대던 황 감독님이 문득 눈을 휘둥그레 떴다.
“내가 수호 씨한테도 희백이한테 고백한 얘기 했던가?”
“티 나서요. 저도 비슷했으니까 알아요.”
“어째 내가 한 말이랑 똑같다. 이게 돌려받는다는 건가 봐.”
“차이셨죠?”
“한 세 번 정도. 마지막엔 아주 끔찍하게. 내 인생 최악의 방법으로.”
“전 두 번이요. 방법이 엄청 끔찍하진 않았는데. 차이는 건 끔찍했지만.”
“와, 내가 이겼네.”
황 감독님이 무성의하게 손을 흔들며 승리의 세리머니를 했다. 하여간 이상한 사람이다.
주차한 곳으로 돌아가야 하니 달려온 길을 되짚어 가야 했다. 황 감독님은 자주 멈춰서 숨을 골랐다. 아직도 숨이 차서 그런지, 돌아가다가 도망쳐 온 사람과 만날까 그랬는지는 알 수 없다.
“<악과> 다음 영화, 홍희백 감독님이 제작자로 참여할 예정이셨다면서요. 그런데 중간에 손 떼셨다고.”
“으음. 커밍아웃한다고 했다가 절교당했거든.”
“아직도 좋아하세요?”
건널목 앞이었다. 빨간 불이 들어왔다.
“수호 씨는 사랑이 고를 수 있는 거라고 생각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