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3.
“지거나 다쳐서 그만두게 되더라도, 내가 그만둘게.”
피가 섞인 침을 삼키면서 나는 겨우 머리를 들어 형을 마주 보았다.
“형 때문이 아니라. 내가. 버려도 내 손으로 버려.”
어느덧 얼굴에 고여 있던 땀이 아래로 추락했다.
“언제, 어떻게 관둘 지 정도는 내가 결정하게 해 주라, 좀.”
통증이 들이닥친다. 맞은쪽 눈은 제대로 뜰 수도 없다. 실컷 얻어맞은 왼쪽 옆구리가 쑤셨다. 가슴에 피가 고인 것처럼 뜨겁다. 눈자위는 얼얼하고 코가 찡하다.
숨이 넘어갈 것처럼 가슴을 들썩이는 나를 형은 바라보기만 했다.
“형. 제발, 좀.”
그러지 않으려고 했는데 눈물이 날 것 같았다.
“나가.”
가쁜 숨 사이로 칼날처럼 날카로운 한마디가 섞였다.
“마음 바꿀 때까지 나 볼 생각 하지 마라.”
형이 링 줄을 잡고 링 바깥으로 걸어 나갔다.
돌아선 등이 체육관 안쪽의 사무실로 멀어져 간다.
“형. 나는 형 안 버려.”
나는 형의 등에다 대고 외쳤다.
정진, 자랑스러운 우리 집 맏이, 내 형이자 선배, 스승이자 동료인 사람에게.
“형이 나 버려도 나는 안 버린다고. 형이 내 형 관둬도 나는 형 동생 할 거라고!”
아무리 악을 써도 형은 돌아보지 않았다.
“형이 뭐라든 포기 안 한다고 했지. 꼭 이래야겠냐? 정진, 개새끼야…….”
글러브를 벗으면서 땀이 자꾸만 흘러 들어가는 눈을 비볐다.
따갑다. 아팠다.
그래도 나는 내가 할 수 있는 일을 해야 했다.
* * *
천 관장님이 복싱을 그만두겠다던 내게 해 준 얘기를 나는 아직 한 글자도 빠짐없이 기억하고 있다.
실은 잊고 싶어도 매번 기억나 괴롭곤 했었다.
잠이 들 수 없는 밤이면 누워서 관장님의 말을 밤새도록 곱씹었다.
열아. 너도 알고 있겠지만 경기를 운용할 때는 한 가지 자세를 고수하는 것만으로는 안 돼.
인파이팅만 하기에는 경기가 너무 길고, 아웃파이팅만 하기엔 링이 너무 넓어. 상대에 따라서 또 상황에 따라서, 치고 들어갈 때가 있는가 하면 빠져야 할 때도 있어.
상대가 강한 펀치를 날리면 쓰러질 수도 있어. 괜찮아. 녹다운된다고 해서 진 게 아니야.
물론 일어나는 건 힘들지. 링 위에서 다시 일어난다는 건 앞으로의 라운드, 거기서 맞을 펀치를 다 감수하겠다는 뜻이니까. 무겁지.
그래도 일어날 때는 일어나는 것만 생각해야 해. 링 밖의 네 팬들, 상금, 앞으로 이어질 라운드…… 다른 건 다 일어나고 생각해. 일어날 건지 아닐 건지, 그것만 생각하는 거야.
운동을 업으로 삼는 거, 위험한 일이지. 진이 일 항상 안타깝게 생각한다. 펀치드렁크나 후유증, 운 좋게 은퇴한 선수들한테까지 보이는 위험한 증상들도 많아. 그런 게 괜찮을 거라고 너한테 거짓말할 수는 없어. 나는 진이하고 네 부모님 결정 존중한다. 충분히 이해해.
힘들면 그만둬도 괜찮다. 복싱이 아니어도 살면서 어쩔 수 없이 올라가야 하는 링이 수도 없이 많아.
경기란 게 네가 노력한다고 다 이길 수 있는 건 아니듯이, 사는 게 그렇다. 진이 일만 봐도, 어쩌면 그런 건 다 운이야. 네가 스스로 결정할 수 있는 일보다 아닌 일이 훨씬 많아.
그러니까 더더욱 선택이 중요한 거야. 네가 고를 수 있는 일은 네가 골라야 해. 결과가 네 뜻대로 되는 게 아니니까 더.
복싱, 그까짓 거 별거 아니야. 안 해도 얼마든지 잘 살 수 있어.
하지만 네 인생에 앞으로 계속해서 올 선택들에서, 네가 뭘 해야 할지 지금 여기서 배워야 한다고 난 생각한다.
다른 사람의 선택을 우선하고 그게 네 선택이라고 믿어서는 안 돼.
소중한 사람들을 위해서 헌신하는 건 대단한 일이지. 난 남의 방식에 대해서 이래라저래라 할 생각은 없다. 다만 그것도 네 선택이어야 한다는 거야.
네가 납득할 수 있는 네 결정일 때만 의미가 있어. 남이 떠밀어서 링 위로 올라간 놈이 몇 라운드나 힘낼 수 있겠냐?
그러니까 복싱을 버릴 거면 꼭 네 손으로 버려라.
그러면 너는 진 게 아니야. 마지막 라운드까지 너는 네 시합을 다 마무리한 거야.
다른 사람이 네 시합을 좌지우지하게 하지 마.
ROUND. 최수호
열이가 나를 좋아한다.
열이는 나를 좋아한다.
다른 누구보다 나를, 열이는 제일 좋아한다.
아무리 되뇌어도 질리지 않는다. 좋아한다. 열이가. 나를. 아주 많이. 열이가 아는 사람 중에서 제일. 가장. 첫 번째로.
침대에서 열이 냄새가 나는 것 같다. 베갯잇에 머리를 깊이 묻고 있으면 세상에서 제일 행복한 개가 된 기분이다. 이대로 종일 열이의 귀가만 기다리고 있어도 좋을 것 같다.
그럴 수는 없겠지만.
열이는 나를 위해서, 최선을 다하겠다고 했다. 평생 내 옆에 있어 주겠다고 말했다.
그러니까 나도 열이 옆에 똑바로 설 수 있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
“열심히 해야겠지…….”
베개에서 겨우 얼굴을 뗐다. 침대에 바로 누워 팔을 똑바로 벌리자 등이 푹신한 매트리스에 기분 좋게 묻힌다.
창에서 햇빛이 들이치고 있었다. 폭포수처럼, 세찬 물결처럼. 나를 휩쓸어 버릴 폭우처럼 퍼붓고 있다.
잠시 눈을 감았다. 눈꺼풀 아래로 붉은색이 너울거렸다.
나의 사랑은 언제나 조난이었고 단 한 번도 나를 배불리 먹인 적 없는 가난이었으므로, 이상했다.
나는 바다 밑바닥에 사는 사람이었는데 지금은 뭍에서 물결이 두른 빛의 띠를 본다. 목을 적시는 물기를 느낀다.
열이는 내가 행복했으면 좋겠다고 했다.
나를 행복하게 해 주겠다고 말했다.
나를, 절대로 버리지 않겠다고.
눈을 뜬다. 밝은 빛이 플래시처럼 눈앞에서 여러 차례 하얗게 번졌다.
온통 표백되어 있던 시야가 서서히 윤곽을 되찾는다.
세상은 새로 쓰인다.
태어나서 처음, 그게 사랑의 일일지도 모르겠다고 생각했다.
* * *
“수호 씨, 무슨 일이야?”
황 감독님은 약속 장소에 내 예상보다도 더 일찍 도착했다.
갤러리 옆에 붙은 카페는 도심에서 다소 빗겨 있었다. 근처에는 한옥으로 된 유명한 요릿집이 자리해 있다. 우리 어머니 취향이다.
아침에 카페 위치와 함께 와 달라는 메시지를 황 감독님에게 전송했을 때는, 이유를 추궁하는 전화라도 올 거라고 예상했다.
하지만 황 감독님은 내게 연유를 묻기보다 빠듯한 약속 시각을 앞질러 도착하기를 선택한 모양이었다.
“혹시 정열 씨랑 또 무슨 일 있었어?”
맞은편에 앉으며 묻는 태도가 조심스러웠다. 어쩐지, 무슨 일인지 묻지도 않더라니 오늘 용건이 열이라고 생각하고 나오신 듯했다.
이번에 불러낸 장소는 뜬금없었을 텐데, 저번에 그랬듯 이번에도 연락 한 통에 여기까지 와 주었다. 환심을 사서 부탁을 들어주게 하고 싶었던 것도 아니라면 이러는 이유가 뭘까. 솔직히 모르겠다.
그렇지만 싫지는 않다.
“저 열이랑 사귈 거예요.”
“축, 축하해?”
그걸 나한테 왜. 황 감독님의 표정이 그렇게 말하고 있다.
“열이랑 무슨 일 있냐고 감독님이 물어보셨잖아요.”
“갑자기 이런 데로 불러내길래 심각한 일인 줄 알았지. 죽는단 소리 할까 봐 헐레벌떡 달려왔다고.”
“신경 쓰셨어요? 이제 그런 얘기 안 해요.”
“그래, 그래. 농담이라도 그런 험한 말, 함부로 하는 거 아냐. 아이고, 괜히 쫄아서 왔다.”
한시름 놨는지 황 감독님이 라탄 의자에 푹 기대앉았다.
“케이크라도 자를까? 축, 교제 기념.”
“영화 찍을게요.”
“무슨 영화를…….”
“감독님 영화요.”
황 감독님은 잠시 무슨 말을 들었나, 고민하는 듯하다 자리에서 벌떡 일어섰다. 가벼운 의자가 쓰러질 것같이 흔들린다.
“내 영화?”
“네, 그렇겠죠. 제 앞에 감독님은 감독님 한 분뿐이시니까요.”
“갑자기 이러면 나 놀라. 왜 마음이 바뀌었어?”
“열이랑 떨어져서 해외 촬영하기 싫어서요.”
“이야아.”
황 감독님이 엄지를 치켜들었다. 황당하게 벌어진 입이 인상적이다.
“그냥 국내 일이 하고 싶은 거면 다른 선택지도 많았을 텐데, 하필 나?”
“이렇게 못 믿으실 거면 애초에 시나리오는 왜 보내셨는데요. 같이 찍자고 보내신 줄 알았는데요.”
“같이 찍어 줄 줄 몰랐지. 손발이 떨린다. 이거 아직 투자도 안 받았는데 수호 씨 몸값 댈 수 있을까……?”
“투자는 제 이름 대고서라도 받으시면 되는 거고요. 출연료 사비로 대실 것처럼 말씀하시네요. 계약하지 마요? 저 그냥 다시 갈까요.”
“안 돼, 절대 안 돼. 실은 처음부터 수호 씨 이미지 생각하고 쓴 시나리오야. 제발 찍어 줘. 신장이라도 팔게.”
“찍을 거니까 신장 팔지 마세요.”
대낮의 카페라는 걸 잊었는지 황 감독님은 내 쪽으로 쏟아질 기세로 몸을 숙이고 있었다. 심하게 부담스럽다.
“잘 찍으실 거 알아요.”
거의 코앞까지 얼굴을 들이대던 황 감독님이 도로 고개를 뒤로 뺐다. 칭찬했는데 얻어맞은 것처럼 행동하는 건 어째서인지.
“저는 감독님 이번 영화에 가능성이 있다고 생각해요.”
“나도 부족한 자신감을 수호 씨가 보여 주니 고맙다고 해야 하나.”
“그리고 다른 것보다도 제가 찍고 싶어요.”
열이가 가고 난 후 황 감독님의 전작 영화를 보니 마음이 굳어졌다. 이 사람이 이번 시나리오로 어떤 영화를 찍을지 대강 그려지는 것 같았다.
찍고 싶다고 생각했다.
“처음이에요. 제가 찍고 싶어서 찍는 작품.”
일정이나 수익을 고려해서가 아니라, 남이 고르라고 밀어붙여서 하는 것도 아니라, 오로지 내가 하고 싶어서 하는 작품은 처음이다.
“이거 영광이라고 해야 하나.”
코끝을 긁적이던 황 감독님이 열없이 눈을 굴렸다.
“어머님하고는 괜찮겠어? 지금 결정, 수호 씨 회사에서도 분명 반대할 텐데.”
“얘기해야죠.”
유명 감독의 초대형 작품에서 이탈해 규모가 비교도 안 되는 잊혀진 감독의 복귀작에 출연하겠다는 데 잡음이 안 나올 리는 없다. 특히나 홍 감독님한테서 러브콜이 왔을 때부터 온 회사 사람들이 볶아 댄 걸 생각하면.
그래도, 그 사람들이 반대하는 게 중요한 건 아니니까.
“결심했나 봐.”
“저는 이제 제가 하고 싶은 걸 하면서, 잘 살 거예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