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4.
“아까 병원에서 답장 왔는데 저녁 먹고 들어온다네. 친구 집이래. 오늘 정열 방에서 수호 재우려고.”
“그래, 수호야. 자고 가. 아 참, 드라마 재밌더라.”
“감사합니다.”
“우리 수호가 연기를 잘하더라고. 너만큼 잘생긴 애가 없어.”
열이네 집은 항상 시끌벅적한 분위기였다. 어머니 빼고는 다들 말이 그리 많지 않았는데도 한두 마디씩 모이다 보면 생기는 소란이 기분 좋았다.
떠밀리는 대로 손까지 씻고 엉겁결에 식탁에 앉고 나자 이미 내 자리에 식사가 준비되어 있었다. 내 앞에 놓인 국그릇에서 모락모락 김이 피어올랐다. 새하얀 밥과 소고기가 듬뿍 들어간 미역국이 고소한 냄새를 풍긴다.
“……잘 먹겠습니다.”
“그거 다 먹고 약 먹어.”
진이 형이 들고 있던 약 봉투에서 1회 분량을 뜯어서 내 앞에 밀어 놓았다. 당연한 것처럼 내 왼편에는 물이 채워진 잔이 놓였다.
“나하고 이 사람이 이제 나갈 시간이라, 수호 왔는데 인사밖에 못 하고 가네. 수호야, 밥 더 있으니까 배고프면 더 먹어. 진이 네가 수호 잘 챙겨. 잠자리 살펴 주고, 수호가 뭐 먹고 싶다고 하면 시켜 주고.”
“예, 내가 데려왔으니까 내가 챙길게요. 알았으니까 다녀오기나 하세요.”
“수호야, 요즘 열이가 너 속 썩이진 않지?”
“애 밥 좀 먹자. 국 다 식겠다. 빨리 가세요.”
진이 형이 만류하자 열이네 부모님은 아쉬운 듯 내게 손을 흔들며 자리를 떴다. 현관까지 따라가 인사드리려는 나를 진이 형이 도로 붙잡아 식탁에 앉혔다.
“밥이나 먹어.”
“형, 이러니까 열이 같아요.”
보통 나 말리는 건 열이가 하는 일이었는데.
내 말에 진이 형이 콧잔등을 찡그리며 수저를 잡았다.
“정열이 너 진짜 속 썩이냐.”
“아뇨.”
내가 바로 대답하자 진이 형은 뜸을 들이면서 밥을 헤집었다. 형답지 않았다.
“너한테 무슨 말 안 해?”
“무슨 말이요?”
“그냥 자기감정…… 그런.”
“감정이요?”
“아니…… 아, 아후. 야, 왜 너 저번에 찍은 드라마에서 남자랑 키스신, 비슷한 거 찍었었잖아.”
“키스는 안 했지만…… 네.”
“아무튼 그런 거 찍었잖아. 기분 나빴냐?”
“아뇨. 기분 나쁠 게 뭐가 있어요. 연긴데요.”
“그래? 남자끼리, 그런 거, 별로 거부감이 없어?”
“요즘 그런 대본 많아요. 일인데 해야죠.”
“일 아니면.”
“네?”
“일 아니라 진짜면. 동성애에 편견 있냐?”
“…….”
“있어?”
“없는데, 형이 갑자기 물어보시니까 놀라서…….”
“편견 갖지 마. 다 똑같은 사람이다.”
“네? 네.”
“주변에 어디든 있을 수 있어. 네 형제거나 친구일 수도 있어.”
“……형.”
“그래. 말해. 무슨 얘기든 들어 줄 준비, 됐으니까 다 말해라.”
“저는 괜찮아요. 응원할게요.”
“그래, 응원…… 뭘 응원해.”
“형이 남자 좋아하셔도요. 저는 사람 좋아하는 데 성별 같은 건 상관없다고 생각해요.”
“야, 내 얘기 아니야.”
진이 형이 젓가락을 쥔 손으로 식탁을 내리쳤다. 쿵, 식탁에 얹힌 유리가 진동했다.
“그럼 왜 심각하게 얘기하셨어요?”
“그건…… 심각한 얘기니까. 찾아봤는데 지금도 자살하는 동성애자들 많다더라. 주위 지지가 중요해. 솔직히 누굴 좋아하든 무슨 상관이겠냐. 수호 너도, 너 좋아하는 남자도 있을 수 있어. 찾아봤는데 네 팬 중에 남자도 많다며. 인터넷에 진지하게 너 좋다고 올라온 글도 있더라. 그런 사람들한테 상처 주지 말고 열린 마음으로 살면 좋겠다는 거지.”
뭘 그렇게 많이 찾아보셨지. 진이 형이 한 번에 이렇게 말 많이 하는 거 처음 보는 것 같다.
“네, 그럴게요.”
“그래. 밥 먹어.”
다시 수저질하다가도 진이 형은 가끔 멈추고 나를 뚫어져라 보았다. 그래도 식사를 마칠 때까지 다시 별다른 말을 꺼내지는 않았다.
“내 방에 있을 거니까 필요한 거 있으면 말해라.”
진이 형은 열이 방으로 나를 데려다주고 한동안 문틀에 기대어 있다 돌아갔다. 너무 진이 형답지 않아서 신기할 정도다.
진이 형이 문을 닫고 간 지 얼마 되지 않아 도로 벌컥 문이 열렸다. 빠르게 걸어 온 진이 형이 내 손에 약봉지를 건넸다.
“아침에도 약 챙겨 먹는 거 잊지 말고. 방심하다 덧나면 큰일 난다.”
단단히 이른 진이 형이 다시 방을 나섰다. 나는 바스락거리는 약봉지를 만지다 침대 맡에 내려놓았다.
침대에 앉았다. 붕대가 감긴 손은 이제 신경 쓰이지 않았다.
따뜻하고, 배부르고, 편안하다.
열이네 집에 오면 늘 이런 느낌이었지. 어릴 때부터 열이하고 함께 있는 건 바로 이런 느낌을 뜻했다.
안심, 안락함, 애쓰지 않아도 느껴지는 애정과 인정.
열이 방에서는 온통 열이 냄새가 난다.
원래 벽을 장식했던 상패나 대회 포스터는 사라졌지만, 나하고 같이 찍은 사진은 여전히 걸려 있다.
책장에는 열이가 보는 각종 스포츠 서적들이 꽂혀 있고, 책상에는 내가 선물했던 선인장이 아직도 자라고 있다. 열이는 모르겠지만 내가 몰래 지은 이름은 수호다.
선물할 때는 조그마했는데 이제는 옆에 새끼 선인장도 같이 자라고 있다. 키우기 쉽다는 얘기와 달리 선인장은 금세 물러서 죽어 버리기 일쑤라는데, 열이는 몇 년째 잘 기르고 있었다.
‘그냥 잘 보고 있으면 언제 물 줘야 하는지 알겠던데. 물하고 햇빛이랑 바람 정도만 맞춰 주면 돼서 별로 안 어려워.’
비결을 묻자 열이는 그렇게 말했었다.
열이는 나한테도 그랬다. 지켜보는 것만으로도 내게 필요한 게 뭔지 알아차리는 것만 같았다.
열이의 선인장.
열이의 가족들.
열이의 방.
열이가 쓰는 침대. 열이가 덮는 이불. 열이가 베는 베개.
모든 게 안정적이다. 열이가 여기에 없는데도 열이의 존재감만으로 나는 편안하다.
이 모든 걸 떠나게 된다면, 과연 내가 살 수 있을까. 무르고 썩어서 죽어 버리진 않을까.
베개에 머리를 대자 솜이 천천히 꺼졌다. 아주 부드러운 것에 잠기는 느낌이다.
열이 냄새가 나는 이불을 덮으며 생각했다.
떠나고 싶지 않다. 떠날 수 없다.
함께 있고 싶었다. 언제나 그랬듯 남은 생을 전부. 여기에 고여 있는 이 빛과 바람, 물과 함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