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0.
“그리고 수호는 연예인이잖아요.”
“으음.”
“전 남자고요.”
“으음…….”
“최수호는 저만 있으면 아무것도 상관없대요. 하지만 감독님이라면 좋아하는 사람이 나 말고는 아무것도 없는 세상에서 살았으면 좋겠다고 생각하시겠어요?”
알록달록한 터널이 잔뜩 연결된 햄스터 집에는 층마다 별별 게 다 들어 있다. 간식, 장난감, 나무 조형물, 장식된 쳇바퀴.
“저하고 수호는 이 정도가 좋아요. 지금도 수호는 제 가족이에요.”
“으음.”
황 감독님이 추임새처럼 넣던 목 울림을 한 번 더 이어 나갔다.
“희백인 내가 커밍아웃하는 게 천하의 멍청한 짓이라고 생각했어.”
다시 홍 감독님 이야기로 돌아간다. 홍희백이라는 이름을 꺼낼 때면 황 감독님의 목소리는 평소보다 깊어졌다.
“세상에서 매장당할 거라면서 그 꼴을 보느니 날 안 보겠다더라고. 연결해 줬던 계약도 자기는 다 손 끊을 거라나.”
“홍 감독님 때문에 영화 못 찍게 됐다고 하셨었잖아요. 홍 감독님이 더 못 찍게 한 거예요?”
“아니, 아니. 물론 훼방이라고 볼 만한 일도 있긴 했는데 그래도 걔가 남의 영화에 장난질 칠 놈은 아냐. 그냥, 음.”
황 감독님이 잠시 말을 멈추고 입가를 만지작댔다.
“당시에는 걔한테 너무 의지하고 있어서, 내가 무너졌다고 할까.”
미소가 걷혀 나간 황 감독님의 얼굴은 앙상하게 남은 건물의 골조 같았다. 황 감독님의 시선은 버려져 호젓한 폐허를 헤매고 있었다.
“희백이가 반대한 것뿐인데 아무 말도 못 하겠더라고. 남들한테 게이라고 고백하면 홍희백도 날 안 본다는데. 갑자기 용기가 티끌만큼도 안 남더라는 거지. 이상하게, 홍희백이가 나하고 안 본다고 해서 커밍아웃을 포기했는데, 그러고 나니 되레 내가 희백이를 볼 수가 없는 거야.”
5년 전 얘기인데 황 감독님은 지금 다시 그 순간에 있는 사람처럼 목을 떤다. 왜 어떤 순간들은 지나간 후에도 떠나보낼 수가 없을까. 왜 그 순간과 항상 함께 살아야만 하는 걸까.
뭔가 좋아했던 게 힘이 된다는 말처럼, 싫었던 것들도 현재에 영향을 미친다. 당시의 링에서는 버텨 냈더라도 펀치가 뇌에 남긴 상처가 예상치 않은 날 폭발해 버리기도 한다.
“집만 급하게 세놓은 다음 한 2년 아무것도 못 하고 번 돈만 까먹으면서 떠돌았는데 고향 집에도 갈 수가 없더라니까.”
“…….”
“울 엄니도 내가 여자 안 사귀는 거 되게 싫어했거든.”
황 감독님이 크게 웃었다. 감독님이 왜 자주 웃는지 조금 알 것 같다. 웃어넘기기라도 해야 하는 게 아닐까. 일종의 가드인 거다. 공격을 막아 내는 스타일은 선수마다 조금씩 다르다.
“내가 나 자신이 아니려고 노력하길 바라는 사람이 있다는 건 고통스러운 일이었어. 내가 중요하게 생각하는 사람이 그런다면 더.”
“…….”
“어쩌면 희백이도 다 날 위해서 한 말들이겠지.”
중얼거림이 쓸쓸하게 들렸다.
형도 날 위해 내가 복싱을 그만두게 하고 싶어 한다. 형이 나를 위한다는 걸 의심해 본 적은 없었다.
“아니다! 아무리 그래도 그 자식은 나한테 못 할 짓 한 거 맞아. 음, 확실해. 옛말에 그런 말도 있잖아? 지옥으로 가는 길은 선의로 포장되어 있다.”
목소리를 높여 외치며 황 감독님이 고개를 저었다. 아무 대꾸도 안 해 줘도 혼자서 묻고 대답하고 바쁜 사람이라 얘기하긴 편하다.
“연애는 두 사람 일이니까 정열 씨 마음이 안 내킨다면 어쩔 수 없는 거지만. 수호 씨가 다른 사람을 좋아하길 바라는 건 또 다른 문제라고 생각을 하거든, 나는.”
하지만 최수호한테 소중한 게 더 생겼으면 좋겠다는 바람을 어떻게 전해야 할지 몰랐다. 수호를 좋아하고, 그래서 수호를 지키고 싶은데, 언젠가부터 최수호하고 나는 엇갈리기만 한다.
“사람 마음이란 게 참……. 5년을 피해 다니다 만났는데도 난 왜 걔 얼굴만 보면 심장이 터지려고 그러냐.”
뒤로 벌러덩 드러누운 황 감독님이 심장 언저리에 손을 얹었다. 나도, 가만히 내 심장 박동을 세 보았다.
수호를 생각하면 심장이 있는 곳에서 평소와는 다른 것들이 느껴진다.
최수호네 집은 어떻게 됐을까. 홍 감독님은 대강 정신 차리고 집에 가고, 양용배는 최수호 물이나 챙겨 주다 최수호한테 재수 없는 얘기 몇 마디 듣고 분통을 터뜨리며 돌아가는 게 제일 먼저 상상된다.
내 핸드폰에는 이미 양용배가 보낸 메시지가 도착해 있었다. 두 건이나 연달아.
[야야, 대박이다.]
[지금 최수호네 어머니 오심.]
이건 또 도대체 무슨 일인지. 메시지 내용을 확인하고 바로 통화 버튼을 눌렀다.
양용배는 전화를 걸어도 묵묵부답이다. 전화를 받을 수 없다는 안내 음만 듣다 똑같이 메시지로 남기기로 했다.
[수호네 어머니가? 왜? 지금도 계셔?]
[분위기 쩐다.]
답장은 얼마 지나지 않아 왔지만 영문 모를 내용이었다. 자판을 치는 손가락이 절로 빨라졌다.
[뭔 소리야.]
[아니, 사실 분위기는 없고 위기만 있음.]
이번에도 의미 불명인 메시지를 남기고 양용배는 그대로 연락이 두절됐다. 답장이 없는 건 물론 내 메시지를 읽지도 않았다.
무슨 공포물의 실종 장면도 아니고. 온갖 상상이 드는 중이다. 물론 나쁜 쪽으로만.
“갑자기 왜 표정이 심각해?”
“최수호네 집에 최수호 어머니 오셨대요.”
“윤서화 선생님이?”
물론 아들 집에 부모님 왔다는 게 놀랄 일은 아니다. 하지만 최수호와 최수호네 어머니라면 얘기가 좀 달라진다.
양용배가 보낸 메시지도 그렇다. 뭔데 전화도 안 받고 심각한 상황이라도 있는 것처럼 상상력을 부풀리는 소리만 해 놨는지.
“수호 씨한테 안 가 봐?”
내 얼굴을 살피던 황 감독님이 슬쩍 물었다.
“감독님네 온 지 얼마나 됐다고, 뭘 왔다 갔다 해요. 큰일 난 것도 아니고 어머니 오셨다는 건데.”
오늘 숙취에 자빠진 애 돌보러 뛰어간 것만으로도 충분하다. 내가 무슨 일만 생기면 달려가니까 최수호도 지금껏 나만 있으면 되는 줄 알고 산 거다.
결정은 내렸지만 계속 생각이 최수호에게로 향하는 건 별수 없었다. 반평생도 넘게 들었던 습관이 어떻게 한순간에 변하겠나.
손이 자꾸만 핸드폰으로 간다. 양용배로부터는 아까 위기 운운 이후로 아무 연락이 없었다. 뭔데, 대체.
“저 팔 굽혀 펴기 좀 해도 돼요?”
운동이라도 하면 잡생각이 사라질까. 황 감독님은 처음엔 무슨 소린가 싶은 듯 멍하게 쳐다보다 점차 이해심 어린 눈빛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사람 머쓱하게.
“정열 씨.”
“네.”
“꼭 햄스터 같다.”
칭찬인지, 욕인지. 뒤에서 다시 열렬하게 쳇바퀴 굴리는 소리가 나는 걸 보니 왜 저런 말을 하는지는 알겠다만.
“이런 사람이 운동 안 하고 썩기만 하는 거, 대한민국의 손실인데. 천직이야, 천직.”
“…….”
“정열 씨한테 맞았을 때 선수 주먹은 다르구나 싶었다니까. 타고난 거지?”
“네.”
기술적으로 가다듬어지기에 앞서 원래 펀치력이 좋은 사람들도 있다. 나하고 형이 그랬다.
타고난 복서.
천 관장님이 했던 그 말이 어찌나 기분 좋게 들렸는지. 같이하고 있던 유도도 때려치우고 복싱에 매진하게 될 정도였다.
1년 전까지만 해도 나는 그 말을 굳게 믿었다. 1년 전까지, 내게 나는 복싱을 하기 위해 태어난 인간이었다.
“아깝다. 정말.”
“…….”
“어깨는 이제 괜찮아?”
“네.”
“정열 씨도 주먹 엄청나네.”
펀치를 하도 치다 보니 손 모양이 변하는 걸 얘기하고 있는 거다. 프로 지망이었는데 이 정도도 변형이 안 오는 게 이상한 거 아니냐고 말하고 싶었지만, 대꾸하면 끝도 없을 것 같다.
“복근 있어? 당연히 있겠지? 봐도 돼?”
“…….”
“이야, 자세히 보면 팔도 근육이 아주.”
“…….”
“왜 그만해? 힘들어?”
“감독님이 하도 말 거셔서 못 하겠어요.”
“에이, 내가 말을 걸면 얼마나 걸었다고 그래.”
쉬지도 않고 거셨거든요. 사실 말 거는 것 자체보다는 내용이 문제였지만.
드라마 촬영장에서 최수호네 집안 얘기 꺼낼 때도 느꼈지만, 화제가 아주 거침없다. 운동 그만둔 거 다 알면서 집요하게 운동 얘기를 꺼낼 건 뭐냐고.
“나도 옆에서 같이할까 했더니.”
“진심으로요?”
“응?”
“하시죠. 지금 운동하실 거면 옷 갈아입고 로드워크부터 하죠. 인터벌로 달리고 들어와서 근력으로 마무리하면 좋을 것 같은데요.”
“……정열 씨, 지금 진심인 거지?”
“할 거면 확실하게 하는 게 좋잖아요. 한 시간만 해요.”
“아니, 나도 운동 좋아하긴 하는데 이렇게 갑자기는 좀?”
갑작스러울 게 뭐가 있지. 운동복 다 들어 있는 가방도 마침 가져왔겠다, 들어오는 길에 보니 달리기 좋은 산책로도 있던데. 반론하고 싶은 마음은 굴뚝같았으나 쳐다보기만 했다.
“맞다. 조금 있으면 수호 씨 영화 방송하는데 그거라도 볼래?”
시선을 피하던 황 감독님이 급히 리모컨을 붙잡았다.
“영화를 방송해요? 지금요?”
“극장에서 보고 나서 언제 다시 봐야지 생각하던 영화인데 오늘 케이블에서 틀어 준다더라고. 예약 걸어놨지. 새 드라마 방영 직전이라 편성한 것 같더라.”
최수호 팬이라더니 꾸며낸 얘기는 아니었나 보다. 심란한 제안이었다. 최수호 생각으로 안절부절못하는 중인데 최수호가 나오는 영화를 보자니.
하지만 거절하고 싶지도 않았다. 웬만하면 최수호 작품은 챙겨 보는 편이기도 하다.
내가 고개를 끄덕이자 황 감독님이 TV를 틀고 채널을 넘겼다.
“잠시만요.”
넘어가던 화면에서 최수호의 이름을 본 순간 바로 황 감독님 손에서 리모컨을 빼앗아 들었다. 브라운관에서 나오는 방송은 연예계 소식을 보도하는 프로그램이었다.
최수호가 연예 프로그램에 나오는 건 당연한 일이고, 평소였다면 굳이 보려고 들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이번에는 멈출 수밖에 없었다.
두 MC가 진행하는 화면 아래로 흑백의 남자 사진이 떴다. 먼 곳을 응시하고 있는 사진 속 남자는 최수호와 언뜻 닮았다.
<윤서화는 아직도 내 내면의 여인, 멀리서도 수호 군의 활약 잘 지켜보고 있어…….>
사진과 함께 졸렬하기 짝이 없는 문구가 자막으로 지나갔다.
최수호네 어머니가 입국할 때의 영상과 지금 나온 감독이 현재는 프랑스에서 영화를 찍고 있다는 소식도 함께 나온다. 누가 궁금하다고 했나.
“남의 아버지한테 이런 말 하면 안 되는데, 참.”
“개새끼.”
내 입에서 튀어나온 욕설에 황 감독님이 눈을 휘둥그레 떴다. 저 인간은 최수호 아버지도 뭣도 아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