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8.
“와씨.”
양용배가 탄식한 이유가 뭔지 바로 이해가 갔다.
꼬락서니만 보면 방금 현관으로 튀어나왔던 수수께끼의 중년과 크게 다를 바도 없건만, 고개를 든 최수호는, 잘생겼다.
부스스 흐트러진 머리카락은 자유분방하게 뛰놀았고 잠기운이 가득한 면상에는 부기도 다 빠지지 않았다. 티셔츠는 한쪽으로 쏠려서 칠칠치 못하게 쇄골을 한껏 드러내는 중이었다.
근데도 잘생겼다. 새삼 충격받을 정도로.
“열아?”
충격적인 미남은 비몽사몽 중에 나를 찾고 있었다. 내 옆에서 양용배가 혀를 찼다.
내가 뭐라고 반응하기도 전에 욕실에서 수수께끼의 중년이 돌아왔다. 우리는 본체만체 최수호에게로 직진한 중년이 앓는 소리를 냈다.
“수호 씨, 야. 우리 어제 산 헛개수 대체 어디 있냐.”
“열아.”
내 이름을 되뇌며 최수호가 헛개수를 찾는 중년을 꼬옥 끌어안았다. 소중하게 끌어안긴 중년이 허우적거려도 놓아줄 기미라곤 손톱만큼도 안 보인다. 중년이 최수호의 품에서 빠져나오려 몸부림을 치다 팔을 늘어뜨렸다. 저 기분 뭔지 알지.
“아오오, 열이 좀 그만 찾어. 어제부터 미치겠어. 열인지 누군지, 하여간 만나기만 해.”
“전데요.”
내 대답에 헛개수 중년의 눈이 황급하게 나를 찾았다.
“누구세요. 그쪽이야말로.”
* * *
정작 집주인인 최수호는 엎어져 있고, 최수호가 목 놓아 찾는 열이하고 영문도 모르고 열이가 됐던 중년만 식탁에서 삼자대면 중이다.
“헉, 나 저 사람 누군지 생각났다.”
사이에 낀 양용배는 덤.
“홍백청 감독님!”
이름이 뭐 그러냐. 차가운 눈으로 양용배를 바라본 이름이 이상한 중년이 내게 손을 내밀었다.
“홍희백입니다.”
“아, 홍희백 감독님.”
멀쩡한 남의 이름을 순식간에 삼색이로 바꿔 놓았던 양용배가 머쓱하게 홍희백을 되뇌었다.
홍희백 감독, 까지 들으니 누군지 알겠다. 영화관에 썩 자주 가는 편이 아닌 나한테도 익숙한 이름이다. 영화 말고도 TV며 기사에 하도 나와서 알고 있다. 지금은 몰골이 엉망이라 TV에서 보던 모습하고는 한참 거리가 있어 보이지만.
알던 얼굴인데도 못 알아봤다. 과연 차림새는 중요하다. 근데도 잘생겨 보이던 최수호는 희귀한 논외라고 치자.
“장혁준 씨죠. 오랜만에 보네. 옆에는…….”
홍 감독님의 손끝이 정확히 나를 향했다.
“정열 씨. 아마추어 복싱 선수였고, 위로 형 하나 있고, 좋아하는 음식은 찹쌀떡인데 체중 조절하느라 잘 못 먹고요. 형 이름은 정진이고. 어머님, 아버님 성함은 박…….”
“그만하면 됐어요.”
안 말리면 끝이 안 날 것 같아 손까지 들어 올렸다. 얼굴로 피가 쏠렸다. 최수호 미쳤냐. 난 알지도 못하는 사람한테 대고 아주 내 신상 명세를 읊었다.
“수호랑 일하는 감독님이세요?”
“아마 그렇게 될 것 같습니다.”
최수호 어머니가 얽힌 영화를 맡은 감독인가 보다. 얼핏 유명한 감독이 맡았다는 얘기는 들었지만 홍희백 감독일 줄은 몰랐다.
“어제 수호 씨하고 마셨는데 오랜만에 마시다 보니까 주체를 못 해서.”
최수호하고 아는 사이인가? 처음 만난 사람하고 부어라 마셔라 할 놈은 아닌데 의아했다.
“수호 씨도 엄청나게 마시더라고요. 여기 어떻게 왔는지도 기억 다 안 나네.”
“최수호가 그랬어요? 쟤 원래는 술 안 마시는데.”
나야 미성년자였던데다 운동하느라 입에 안 댔고, 관장님하고 사범님을 비롯해 우리 식구들까지 합쳐 술 좋아하는 건 엄마 정도다. 주변 영향인지 몰라도 최수호도 술 마시는 건 본 적 없는데 이렇게 화려한 신고식을 치러 줄 줄은.
“완전 들이붓던데?”
홍 감독님이 반박했다. 하긴. 그러니까 해가 중천에 걸릴 때까지 저러고 있는 거겠지.
거실에 쓰러져서 다시 꼼짝도 안 하는 최수호를 돌아보려니 한숨이 나왔다. 마시려면 곱게 마실 일이지. 다음 날 쓰러지도록 마시면 그게 술이냐, 독이지. 깨워서 잔소리해 주고 싶은 걸 참고 있다.
“수호 씨 혼자 두고 가기 그랬는데 친구들이 와서 다행이네.”
“가시게요?”
“남의 집에 죽치고 있을 순 없으니까? 가긴 가야지.”
참으로 편안하게 말하던 홍 감독님이 갑자기 새하얘진 안색으로 일어서더니 다급히 욕실로 향했다. 익숙한 물소리가 부엌과 욕실 사이를 가로질렀다.
“좀, 이따가.”
잠시 후 한결 나아져 돌아온 홍 감독님이 부연했다. 저럴 줄 알았다.
“안 되겠다. 미안한데 좀 누워 있을게요.”
일방적으로 선언하고는 다시 거실로 향한 홍 감독님이 소파에 몸을 뉘였다. 나나 양용배하고 내외할 기력도 없는지 유명 감독으로서의 체통은 내려놓은 모습이다.
술은 입에도 대 본 적 없는 사람으로서 당최 이해가 안 가는 광경이었다. 심지어 최수호는 언제 일어날 건 지 기약이 없다.
“가서 최수호 좀 깨워.”
팔꿈치로 양용배를 건드리자 양용배가 검지로 자기를 가리켰다.
“내가?”
“거실에서 계속 저러고 있게 내버려 둘 순 없잖냐.”
“그렇다고 쟤 처리를 왜 나한테 시켜. 내가 미쳤냐? 잘 때 건드리기만 해도 성질 드럽게 부리는 놈을 내가 왜.”
최수호가 잘 때 그러나? 잠자는 숲 속의 왕자님이라거나 잘 때만은 천사 같다는 생각밖에 안 해 봐서 대답이 색다르다.
“최수호 담당은 너잖아.”
양용배가 자기 쪽을 향해 있던 검지를 내게로 돌렸다. 무슨 사육사 할당하듯 얘기한다.
“나는…….”
“넌 뭐, 싸워서?”
단순히 싸운 게 아니라 더 복잡한 사연이 있다고 우겨 보기에는, 사연이란 게 쉽게 말하기 영 뭐 한 내용이다.
선뜻 대답을 안 하는 나를 손끝으로 찌를 듯 가리키다 말고, 양용배가 최수호 쪽으로 걸어갔다. 하여간 은근히 착한 놈. 양용배는 건들건들한 자세로 최수호 옆에 쪼그려 앉아 팔뚝을 잡아당기기 시작했다.
“최수호, 일어나.”
“응…….”
“야, 자식아. 일어나. 안 일어나?”
“열…… 양용배?”
“그래. 내가 손수 깨워 주는 중이니까 감사한 줄 알고 벌떡 일어나서 침대로 걸어가든, 세수를 하든 해.”
“건드리지 마.”
최수호의 웅얼거림이 순식간에 짜증이 한가득 담긴 음성으로 돌변했다. 매몰차게 뿌리쳐 버리기까지 하는 바람에 팔을 얻어맞은 양용배가 허공에 분노의 숨을 불어 올렸다.
봤냐? 양용배가 이글거리는 눈빛으로 말하고 있다.
보이는 광경에 나오는 건 한숨뿐이다. 어쩌겠냐. 이렇게 됐다면 담당이 책임지는 수밖에.
선수 교체의 타이밍이었다. 양용배를 지나쳐 최수호 옆에 앉으니 새삼 드넓은 등짝이 나를 반겼다.
“일어나.”
어깨를 잡으니 최수호가 꿈틀거린다. 몹시 심기가 불편한 움직임이다. 들썩거리는 뒤통수에까지 짜증이 고여 있다.
“건드리지 말라고…… 어? 열아?”
오만상을 쓰고 돌아보던 최수호가 부지불식간에 표정을 무너뜨렸다.
“찬 데서 이러고 자다 근육 놀란다. 자려면 들어가서 자.”
타이르는 것만으로 충분했다. 최수호의 입술이 우물우물하더니 고개가 끄덕여진다. 아까까지의 야멸찬 태도는 어디 가고 최수호는 순한 양이 되어 내게 몸을 맡겼다.
빡침을 온몸으로 표현하는 양용배를 못 본 척하며 침실 문을 열었다. 침대에서 한바탕하다가 거실로 기어 나왔던 건지, 침대도 어째 엉망이다.
“술 냄새.”
최수호를 침대에 내려놓으며 중얼거렸다. 가까이 있는 것뿐인데 술 냄새가 풀풀 난다. 옷은 잘 갈아입었나 봤더니 티셔츠 앞뒤가 돌아가 있다. 이러고 있는데 아까 후광이 비쳤다니. 머리 뻗친 거 하며, 하나씩 뜯어보면 영락없이 동네 바본데.
“미안.”
풀이 죽은 티를 내며 최수호가 베개에 머리를 기댔다. 요즘 최수호 입에서 미안하다는 말만 듣는 것 같다.
“술은 갑자기 왜 마셨어.”
“술이 있길래.”
산이 있기에 거기 올랐다는 어느 등산가의 선문답도 아니고 이건 무슨 말이냐. 보아하니 말을 나오는 대로 하고 있다. 숙취 때문인 건지.
상대가 나라서 그럴지도 모른다고 생각하면 답답해진다. 최수호가 내 앞에서 거짓말을 연발하던 걸 듣던 때 같다.
“아픈 줄 알고 왔더니만. 술병이었냐.”
“나 안 본다고 했으면서.”
“그거 때문에 마셨단 소리는 하지도 마라.”
“아니야.”
최수호가 힘주어 부정했다. 말한 내가 겸연쩍어질 지경이다.
“아니면 말고. 앞으로는 적당히 마셔.”
“열아.”
최수호가 내 이름을 부르면 아주 단단하고 뜨거운 손아귀에 붙잡히는 느낌이 든다. 절대로 뿌리쳐지지도 않는, 순식간에 나를 속수무책으로 만드는 덫에 걸리는 것만 같다.
“나 너 안 좋아해.”
최수호는 나직하게 이야기했다.
최수호한테 한 번도 들은 적 없는 말이었다.
“그래.”
속이 쓰리다 못해 배가 다 욱신거렸다. 보호구도 없이 보디 샷을 연속으로 얻어맞는 감각이다. 가드를 올려야 하는 건 알겠는데 뜻대로 안 된다.
지금, 최수호를 원망하지 않으려 안간힘을 쓰고 있다.
이걸 바란 건 나다. 나는 최수호가 나를 좋아하는 게 무섭다고 생각했다. 수호가 나만을 좋아하는 건 나쁜 일이라고.
그러니 지금 다칠 수 있는 자격은 나한테 없다.
거실에서 익숙한 벨 소리가 울렸다. 오랜만에 듣는 음악이었다. 중학교 때 내가 재미 삼아 설정했던 최수호 벨 소린데, 기종을 아무리 바꿔도 최수호 벨 소리는 저걸로 고정이었다.
“네 전화 소리 아니야?”
“응. 그럴걸.”
대답해 놓고도 받으러 갈 생각은 없는 표정이다. 아주 넋이 나갔다.
“받아야지. 갖다 줄게.”
자리를 뜨기 좋은 핑계였다. 침대를 떠나고자 움직이는데 손이 잡혔다. 이번에는 정말로 붙잡혔다.
그리 강한 힘도 아니었다. 허술하게 쥔 최수호의 손은 살짝만 움직여도 풀어질 것 같았다. 그래서 움직일 수가 없었다.
“왜.”
“…….”
“뭐.”
내 손만 조심히 잡은 채 최수호는 말이 없다. 한참을 조용하던 최수호가 내 손에서 자기 손을 떼어 냈다. 한 손가락씩. 아주 천천히.
미지근한 손가락이 내게서 떨어져 나간다.
그게 왜 그렇게 가슴 철렁했는지 모르겠다.
잡았던 손이 완전히 풀리기 전 최수호의 손을 움켜잡았다. 아주, 꽉. 나도 모르게 힘껏.
최수호가 눈을 크게 뜨고 나를 보았다. 꽉 잡았던 손을 풀고 침실을 나가면서 심장이 등에서 뛰는 것처럼 쿵쿵, 요란하게 박동했다. 문턱을 나서면서도 내 심장은 최수호의 손아귀에 잡혀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