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6.
“얘기해 보니까 최수호 씨, 자기 일 좋아하는구나 싶어서.”
작품 얘기일 줄 알았는데 내 얘기였다.
“수호 씨 옛날 인터뷰에서 단 한 번도 연기를 좋아서 한다는 말이 없더라고. 인터뷰를 그렇게 많이 했는데도. 신경 쓰였어요.”
“제 인터뷰 보셨어요?”
“주연으로 추천받은 후에. 전에 한 작품도 쭉 봤고. 내가 쓸 배우가 어떤 사람인가 고민 정도는 해요. 나도, 어? 투자자 추천 때문만이 아니라 배우 최수호가 마음에 들어서 쓰기로 한 거라고.”
어머니 때문에 날 고른 거 아니냐는 내 말이 걸렸는지 홍 감독님의 말은 뒤로 갈수록 강세가 실렸다. 자기 작품에 까탈스럽다는 말은 소문만이 아니었나 보다.
“데뷔 루트가 특이해서 그런가. 이상하게 최수호 씨는 해야 해서 지금 일을 하는 것처럼 말을 하더라고. 먹고살려고, 이런 거 말고 왜 있잖아요. 사명감? 아니다.”
“…….”
“부채감?”
떠들던 홍 감독님의 머리가 아래로 처졌다. 팔을 괴어 이마를 받친 채 홍 감독님이 연거푸 길게 숨을 골랐다.
“난 그게 마음에 걸렸어요.”
“…….”
“좋아하는 게 없는 사람은, 좀 쓸쓸하잖아.”
“…….”
“사람이든, 일이든, 뭐든. 마음 붙일 데가 없는 인간은…….”
혼잣말인 듯 중얼거리던 홍 감독님의 눈꺼풀이 무겁게 떨어지는 게 보인다.
“황춘식이 영화 관둘 것 같을 때도 그래서…… 좀 걱정했는데……. 그 인간은 영화 말고는 아무것도…….”
취기에 젖어 든 육성이 웅얼웅얼 뭉개진다. 이 얘기 때문에 친하지도 않은 나를 앞에 두고 취하도록 술을 마신 건가 싶었다.
가까운 사이가 아니기에 더 편하게 할 수 있는 얘기가 있다는 걸 안다. 나한테 열이는 가장 편한 사람이면서 누구보다 어려운 사람이었다.
“아역 때는 연기 별로 안 좋아했어요.”
촬영 현장은 낯설고 분주했다. 어린애한테 세심하게 신경 써 주는 현장은 드물었고, 대개가 예산과 시간 부족에 쫓기는 강행군이었다.
혼자 촬영장까지 대중교통으로 찾아가거나 야외 촬영 중에 추위에 떨며 쪽잠을 잤던 날들도 있었다. 다친 적도 있고, 폭력적인 스태프 때문에 불안했던 때도 있다. 그런데도 그 일에 매달렸던 건, 인정받고 싶었으니까.
“그 애가 옆에 있어 주지 않았으면 지금처럼 배우 생활을 할 수는 없었을 거예요.”
“황춘식, 개애애새꺄…….”
중얼거리던 홍 감독님이 테이블에 푹 엎드렸다. 병에 남은 술을 어림해 보다 잔을 채웠다. 어렴풋이 향긋한 냄새가 났다.
쌉쌀한 알코올이 목구멍을 데우면서 내려갔다. 위장에 화끈한 기운이 퍼졌다.
“감독님은 황춘식 감독님하고 왜 멀어지셨어요?”
물어봐도 취해서 엎어진 사람이 대답할 리 없다. 뒤통수에서 도롱도롱 숨소리만 들렸다.
“열이도 저하고 멀어지게 될까요?”
그 애가 바라는 건 뭐든 해 주고 싶은데도, 그 애를 덜 좋아하거나 그만 좋아하는 건 불가능한데.
“어떻게 해야 좋을지 모르겠어요.”
테이블에 늘어져 있던 홍 감독님이 갑자기 고개를 올렸다. 잘 정돈되어 있던 머리카락이 헝클어져 이마에 구불거리는 곡선을 그렸다.
“춘식 선배…….”
“저 황춘식 감독님 아닌데요.”
볼을 잡으려고 하는 통에 고개를 뒤로 젖혔다. 갈 데가 없어진 홍 감독님의 손은 허공을 더듬다 미끄러져 내렸다.
“선배 너…… 나 좋아하지 마, 이 개새끼야.”
홍 감독님의 팔이 건드린 내 술잔이 테이블 아래로 굴러떨어졌다. 잔이 깨지는 소리가 났다.
“그게 얼마나 기분 더러운 줄 알기나 해……. 씨팔, 내가. 진짜……. 친구라고 죽이지도 못하고…….”
“…….”
“내 입장은 좆도 생각 안 하는 새끼…….”
“…….”
“씨이발.”
욕설이 길게 울렸다. 귀를 막을 수는 없었으므로 손바닥에 얼굴을 묻었다. 새벽까지 울었을 때처럼 눈두덩이 홧홧했다. 위장이 녹을 듯 끓는다.
열아, 어떻게 해야 하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