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44화 (44/88)

44.

“수호 씨, 나한테는 거짓말하는 거 싫다며. 정열 씨한테 종일 거짓말만 했네. 그러니까 싫어하지.”

“다른 사람 좋아해야 하는데 열이 얼굴 보면 다 잊어버려요. 그래서 오늘만 안 보려고 한 것뿐인데. 계속 보고 싶었지만 참은 건데.”

포기하기로 해 놓고 계속 좋아하는 걸 들키면 미움받을 테니까 나도 참으려고 했던 건데 왜 이렇게 됐는지 모르겠다. 역시 만나지 말아야 했을까. 하지만 문밖에 열이가 서 있다고 생각하니 열지 않고는 견딜 수가 없었다.

“차라리 그대로 말하는 게 낫겠다.”

“안 돼요. 열이는 제가 열이 좋아하는 거 싫어해요.”

“이건 뭐, 거의 교리 따르는 신자네. 교리 해석이 일방적이라 그렇지.”

황 감독님이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차 핸들이 유하게 돌아갔다.

“내가 백번 말해도 수호 씨한테 통할 게 아니라서, 이게 참……. 찬 사람 앞에서 좋아하는 티 계속 내는 게 안 좋다는 말도 맞기는 해.”

“열이한테 미움받기 싫어요.”

“그 말 또 들으면 천 번째다.”

“열이한테 미움받으면 죽을래요.”

“안 되지, 이 친구야. 덜 극단적으로 사랑을 좀 해 봐.”

이제는 죽는다는 소리도 적응이 됐는지 황 감독님은 휘휘 손사래를 칠 따름이다. 그게 차라리 편했다.

“그런 말, 정열 씨한테 하는 건 아니지?”

“한 적 있는 것 같은데…….”

“앞으로 하지 마.”

“네. 안 해요.”

“수호 씨가 말 잘 들으니까 기분 되게 이상하다.”

“저 원래 말 잘 들어요.”

“하하하. 하하.”

뭐가 웃긴 거지. 다분히 작위적인 웃음소리를 낸 황 감독님이 아까처럼 손을 내저었다.

“그나저나 수호 씨, 지금 만나러 가는 감독이 이번에 찍는 그 영화감독 맞지?”

“네. 성함이, 홍…….”

“홍희백.”

황 감독님이 나보다 먼저 이름을 불렀다. 거침없는 발음에 힘이 실렸다.

“친하세요?”

“만나면 서로 1년 치 기분을 한 방에 잡칠 수 있는 정도?”

비릿한 미소에서 감정의 잔여물이 묻어 나왔다. 말보다도 표정이 더 많은 걸 설명하고 있다.

“저 태워다 주셔도 홍 감독님하고 작업 안 하진 않을 건데요.”

갑자기 왜 달려와서 차까지 태워 주나 했는데 오늘 만날 사람한테 용건이 있었을까, 싶었다. 얼마 보지도 않은 사이에 기사 노릇을 해 줄 이유는 사실 없다. 이 사람이 내게 시간을 베풀 당위성은 아무것도 없는 거다.

“와, 그런 말을 면전에서? 수호 씨, 진짜 왕자님이구나. 연예계에서 이용해 먹으려고 달려드는 인간들 사방 천지에 득실댔을 테니 이해는 가는데.”

황 감독님의 태도는 시종 경쾌했다. 아까 다른 감독 얘기를 할 때하고는 딴판이다.

“걱정하지 마. 그냥 힘들어하는데 택시 태워 보내기 신경 쓰여서 태워 준 거야. 어른이 돼서 자기 사정에 어린애를 이용하면 안 되지.”

“……어린애 아닌데요.”

“그래, 그래. 스물이었지? 어른이지, 어른. 아무튼 내가 수호 씨보다 오래 살기는 했잖아. 마침 차도 있고 시간도 있고.”

짜증이 날락 말락 묘한 대답이다. 고마운지, 언짢은 건지. 그간은 사람 대부분이 명백히 좋거나 싫었는데 이 사람은 혼란스럽다.

“홍희백 감독님하고 어떻게 아는 사이신데요?”

황 감독님은 입만 아, 벌린 채 눈을 굴렸다.

“대답하기 싫으시면 안 하셔도 돼요.”

“아냐. 수호 씨가 궁금해할 줄 몰랐거든.”

나도 물어보고 놀랐다. 열이 일도 아닌데 남의 일에 참견하게 될 줄이야.

“홍 감독은 날 구해 준 사람이야.”

구해 줬다.

쉽게 들을 표현은 아니었으므로 그 말은 집요히 귓가에 남았다. 내게도 그 표현을 쓸 수 있는 사람이 하나 있다.

황 감독님에게 홍 감독님은 내게 있어 열이 같은 사람인가. 그런 사람한테서 등을 돌리고 살아갈 수 있나?

“나도 수호 씨처럼 집에 어머니 한 분이셨는데 그거하고 정체성의 고민하고 맞물려서 이래저래, 청년 시절까지도 굉장히 어둡고 비관적인 인간이었단 말이지.”

지금 모습으로는 상상이 안 간다. 모르는 사람 사이에 앉혀 놔도 금세 웃고 떠들 사람처럼 보였다.

“처음으로 나한테 영화감독이 될 수 있다고 해 준 게 홍 감독이었어. 그리고 알다시피 걘 천재잖아. 젊을 때 찍던 것들도 어중이떠중이들이랑은 기본이 달랐다고. 내가 엄청나게 동경했었지.”

왜 원수가 됐는지 알려 줄 거라고 생각했는데 전혀 다른 방향의 얘기가 나오고 있다. 황 감독님이 뒤를 쳐다보면서 차를 후진했다. 어느새 주차장 근처다.

“수호 씨 보면 내 옛날 생각이 나.”

“왜요?”

“그러게. 막상 얼굴 보니까 하나도 안 닮아서 되게 뻔뻔한 얘기 한 기분이네.”

갑자기 뚫어져라 남의 얼굴을 쳐다보더니 하는 말이 맥없다. 뭐지. 인상을 쓰자 그제야 황 감독님이 씩 웃었다.

“나도 수호 씨처럼 겁이 많고 맹목적이었어. 세상이 좁으면 살기 더 편할 줄 알았지. 수호 씨는 예전의 나랑 닮았어. 걱정돼, 그래서.”

“…….”

“자, 다 왔다. 내려.”

차가 멈췄다. 인사를 하고 곧장 내리려 했지만 왠지 뒤를 돌아보게 됐다.

“홍 감독님은 나쁜 분이에요?”

내가 묻자 황 감독님이 웃는 건지, 우는 건지 모르게 콧잔등을 찡그렸다.

“글쎄. 난 모르지. 나한테는 좋다가도 나쁘고, 나쁘다가도 싫어할 수만은 없는 사람이었지만 수호 씨한테는 어떨지 모르겠네.”

애매한 대답이다. 고개만 끄덕이고 차에서 내렸다. 주차장에서 바로 빠져나가는가 싶던 황 감독님의 차가 움직이다 말고 내 앞에서 멈춰 섰다.

“수호 씨, 생각보다 세상엔 수호 씨한테 상처 주지 않으려고 하는 사람도 많아.”

차 유리창이 열리더니 황 감독님의 얼굴이 드러났다. 조수석 유리창까지 고개를 쭉 내밀고 황 감독님은 나를 보려 애썼다.

“미움받는 걸 기본으로 둘 필요는 없다고. 너무 각오하면서 살지 않아도 돼.”

황 감독님의 차가 길모퉁이로 사라질 때까지 쳐다보았다. 약속 장소를 향해 뒤돌자 자갈이 깔린 마당이 앞에 놓였다.

나는 유리 조각으로 가득한 세상을 맨발로 걷는 듯 걸었다. 발치에서 잘각잘각, 자갈이 서로 부딪치는 소리가 났다.

* * *

식당 종업원에게 안내받은 곳은 따로 마련돼 있는 별채의 방이었다.

방 안에는 커다란 테이블을 사이에 두고 세 사람이 앉아 있었다. 감독과, 매니저 형, 그리고 어머니다.

“최수호 씨, 드디어 보네요.”

안으로 들어서자 남자가 반갑게 인사를 건넸다. 홍희백 감독이다. 오는 차 안에서 들은 이야기 때문인지 이미 시상식 등지에서 여러 번 마주친 적 있는데 처음 보는 것처럼 관찰하게 된다.

위로 올라간 눈매에 올라가 있는 입꼬리 탓에 여우나 족제비를 연상하게 하는 인상이다. 호리호리한 체구, 키는 열이보다 조금 크다. 이미 해외 영화제에서 여러 차례 수상하면서 실력을 인정받고 국내에서도 명성을 공고히 한 천재 감독. 누군가를 구했다가 배반한 사람.

“안녕하세요.”

“앉아. 택시 타고 왔니?”

“아뇨. 누가 태워 주셔서…….”

어머니가 권하는 대로 옆에 앉자 맞은편에 홍 감독님이 자리하게 됐다. 고개만 들면 바로 눈이 마주친다.

“황춘식 감독님, 아세요?”

순간적으로 홍 감독님의 얇은 윗입술이 실룩거렸다. 내가 갑자기 말을 꺼낸 게 의아했는지 어머니가 내 쪽을 돌아보았다.

“알기야 알죠. <악과> 이후로 쉬신다고 들었는데.”

“영화 괜찮았는데 말이에요.”

“선생님도 보셨습니까? 한 번 반짝하고 사라지는 사람들이야 워낙 많잖아요. 성적 잘 나온 만큼 부담이 돼서 그런지, 거기가 자기 실력의 한계점인 건지 오히려 이후로 작품 못 내놓는 사람들이요.”

“새 작품 찍으실 거라던데요.”

내 말에 홍 감독님의 미간에 골이 생겼다.

“잘 아는 사이인가 봐요. 같이 작업한 적은 없지 않나?”

“오늘 태워다 주셨어요.”

이번에는 어머니가 고개를 비딱하게 기울인다. 어머니 옆에 앉아 있던 매니저 형은 아예 경악한 표정을 지었다.

“수호야, 너 남의 차 타고 다니는 거 싫어하잖아.”

“황 감독님은 괜찮아.”

“……친한가 보네요.”

홍 감독님이 못내 떨떠름한 기미를 내비치며 중얼거렸다.

“감독님, 영화 얘기나 하죠. 그게 가장 중요하니까요.”

어머니가 가볍게 잔을 내려놓으면서 주의를 환기했다. 내게 쏠려 있던 두 남자의 시선이 어머니에게로 돌아갔다.

“예. 이번 영화, 저도 기대가 큽니다. 선생님께서 해외 유통사하고 계약도 직접 나서신다니 오늘 식사는 제가 사야 하지 않나 싶은데…….”

얘기하던 홍 감독님이 말끝을 흐렸다. 짧은 간극 뒤에 홍 감독님의 주의가 다시 내게로 돌아왔다.

“뭘 찍는다고 하는데요?”

부드럽게 넘어가는 듯하던 주제가 다시 급브레이크를 밟는다. 여유가 넘치던 첫인상과 달리 지금 홍 감독님은 초조해 보였다.

“황 감독 새 영화 말이에요. 나는 그런 소문 못 들었는데, 누가 투자는 한대요?”

“저도 잘 몰라요. 시나리오만 읽어 봐서.”

“수호 씨한테 컨택을 했어요? 나 참, 용기 가상하네.”

“용기까지 운운할 일인가요. 쓰고 싶은 배우 있으면 물어보는 거죠.”

“몸값 댈 돈은 있대요?”

홍 감독님이 코웃음을 쳤다. 면전에서 몸값 소리를 하는 게 무례하다고 느꼈는지 어머니의 표정이 미묘해졌다. 홍 감독님은 모르는 눈치다.

“글쎄요. 황 감독님이 사비로 캐스팅비 대실 것도 아니고요.”

“모르지. 투자 하나도 안 들어오면 사비로 메꾸게 될지도.”

“시나리오 좋던데요. 전작 성적도 있는 분이고.”

“그래 봤자 그만두고 도망쳤던 사람이에요.”

“그래서 다시 하시잖아요.”

매니저 형이 나를 향해 슬며시 고개를 젓는 게 보인다. 손가락으로 조그맣게 엑스까지 그리는 게 제법 다급하다. 큰 프로젝트 앞둔 감독 긁는 건 그만하라는 거다.

사실 내가 황 감독님을 두둔할 이유는 없는데 왜 계속 받아치고 있는지 나도 의문이다.

“그래 봤자. 어떤 인간들이 도망치는 줄 알아요? 나약한 인간.”

홍 감독님의 입매가 비틀렸다. 매니저 형 얘기대로 슬슬 다시 영화 얘기나 해야겠다고 생각했는데 귓가에 매치 시작을 알리는 종이 울린 기분이다.

“전 그렇게 생각 안 하는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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