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43화 (43/88)

43.

- 안 싫어. 가고 싶어.

“근데 왜 없는 촬영 지어내면서 안 오려고 하냐고.”

- …….

“너 지금 집이냐.”

- 어……니.

“지금 너희 집 간다.”

- 진짜 오게?

“너 없어도 집에 잡채 두고 갈 거니까 막을 생각 하지 마.”

최수호가 더 뭐라고 할까 봐 잽싸게 전화를 끊었다. 전화통에 대고 하도 왁왁거렸더니 배가 다 고프다. 최수호가 날 피하다니. 아무리 짐작 가는 이유가 있다 해도 충격이었다.

자기 입으로 계속 친구 맞냐고 하더니 갑자기 마주치지도 않으려고 드는 건 뭔데? 누구는 엄청 아무렇지도 않은 줄 아나. 씩씩거리면서 문을 여는데 문 앞에서 누군가 화들짝 비켜섰다.

“형은 왜 남의 방 앞에 서 있어. 엿들었냐?”

“……들리길래. 수호네 가냐.”

이 양반은 또 왜 답지 않은 짓이야. 도둑놈처럼 남의 방문 앞에 붙어서 통화 내용 엿듣는 건 평소 형이 절대 안 할 것 같은 짓이다.

“잡채 갖다 주러. 나 걔랑 먹고 올 테니까 먼저 먹어.”

“수호는 여자 친구 안 사귀냐?”

부엌으로 직행하려다 하도 뜬금없어서 멈췄다. 정진, 왜 이러지?

“친구도 안 사귀는데 웬 여자 친구. 걔 맨날 일하는 데 시간이 어디 있다고.”

“그래도 연예인들 보면 서로 사귀고 그러잖아.”

“형이 언제부터 그렇게 연예인에 관심이 많았어? 남의 연애에 갑자기 참견이야. 형이나 사귀어.”

“수호가 요즘 너 속상하게 하냐?”

밀폐 용기에 잡채를 더는 도중에도 형은 내 뒤에까지 어기적대며 따라와서 말을 붙였다. 왜 저래? 지는 내 호적 파겠다고 해 놓고 최수호를 걸고넘어지냐.

“너네 요즘 자꾸 싸우는 것 같아서. 정열, 혹시 남들한테 말 못 하는 일 있으면…… 아니다.”

혼자 뭐라고 중얼거리던 정진은 왔을 때만큼이나 머뭇거리며 자기 방으로 돌아갔다. 복싱 관두라고 나 족친 것 때문에 미안해서 저러나. 도무지 속내를 알 수가 없다.

최수호고 정진이고, 오늘 다 이상하다.

잡채를 담은 밀폐 용기 뚜껑을 닫으면서 한숨을 삼켰다. 남의 마음은 어쩔 수가 없다더니. 알 수도 없다.

* * *

최수호 진짜 개자식.

“야, 문 열어.”

벨을 눌러도, 문을 두드려도 안은 묵묵부답이다. 최수호가 집에 없는 거면 진작 비밀번호 누르고 들어갔겠지만 분명히 내가 벨을 누르기 무섭게 현관으로 뛰어오는 소리가 들렸단 말이다.

안에 있으면서 일부러 안 열어 주는 거다.

“있는 거 다 알아. 빨리 열어.”

여전히 침묵. 문을 두드리던 걸 멈추고 도어 스코프와 눈싸움을 했다.

얘는 도대체 왜 이러냐.

들고 온 잡채 통이 갑자기 천근만근이다. 최수호는 나를 거부하고 있다.

앞에 가로막힌 현관문이 거대한 장벽처럼 느껴진다. 저 너머에서 최수호가 어떤 얼굴을 하고 있을지 상상이 가지 않았다.

나한테 거절당할 때 최수호도 이런 기분이었을까. 잡채 통이 든 봉투를 현관문 앞에 내려놓았다.

“잡채 문 앞에 두고 갈 테니까 먹어. 간다.”

돌아서려는데 뒤에서 문이 열렸다.

한 뼘 정도 열린 현관문 안의 어둠 속에서 최수호가 빼꼼하게 고개를 내밀었다. 최수호는 여전히 잘생긴…….

“너 눈이 왜 그래?”

붕어였다.

* * *

그 큰 눈이 다 없어질 수도 있구나. 눈두덩이 어찌나 부었는지 옆에서 보면 아래위로 동그란 3자 같다. 잘빠진 눈은 탱탱 부푼 살에 파묻혀 선으로만 겨우 보인다.

“뭔 만화같이 붓냐.”

얼음 팩을 대주고 있는데도 부기가 가실 생각을 안 한다. 오늘 촬영 있었으면 방송 사고였겠다.

“일어났더니 부었어.”

하긴 최수호 옛날부터 울면 눈 잘 부었지. 이번에 된통 울린 사람으로서 양심에 찔린다. 나 병원에서 자는 열여섯 시간 동안 얘는 울기만 했나. 사람 눈이 어떻게 이렇게 붓지.

“냅뒀어? 찜질이라도 하고 있지.”

“귀찮아서.”

“네 팬들이 보면 운다. 얼굴 막 다룬다고.”

“눈 아파.”

“별로 세게 안 눌렀는데. 이제 안 아파?”

“거기 말고 오른쪽 눈이 아파.”

“속눈썹 들어갔나 보다. 잠깐만.”

오른쪽 눈꺼풀을 손가락으로 벌리자 커다란 갈색 눈동자가 모습을 드러냈다. 분홍색으로 물든 눈자위에 긴 속눈썹이 잘 보이게 올라가 있다.

“속눈썹 있다. 깜빡여 봐.”

내 말을 듣기는 한 건지 최수호는 나를 빤히 보고만 있었다. 눈을 봐 준다고 가까이 붙는 바람에 최수호가 마른침을 삼키는 것까지 보였다. 목울대가 크게 오르내린다.

“열아, 좋…….”

동그랗게 모인 입술이 금방이라도 고백할 것 같아서, 속이 조이는 기분이 들었다. 살갗을 간지럽히는 거실의 공기가 느껴진다. 소곤거리던 최수호가 입을 다물었다.

“……아 하는 사람 생겼어.”

“……뭐?”

“나 좋아하는 사람 생겼어.”

차인 지 이틀 만에?

어이가 없어서 봐 주던 것도 놓고 뒤로 물러나 앉았다. 최수호는 고양이 세수를 하듯 오른 눈을 비비며 깜빡이다 눈을 바로 떴다.

“누군데.”

“…….”

최수호의 입이 다시 다물렸다. 이 자식, 나오는 대로 말한 거 아니야?

“황춘……식 감독님.”

어이가 없다.

“열아홉 살 차이 나는 사람하고? 언제 봤다고.”

“어쩌다 보니까…….”

“네가 언제부터 어쩌다 사람 좋아하게 되는 놈이었는데.”

“…….”

“눈 피하지 마. 너 아까 전화했을 때도 그렇고 왜 이래? 왜 되는대로 지어내서 말하고 있어.”

“네가 다른 사람 좋아해 보라길래…….”

“야, 이. 그런 뜻으로 말한 게 아니잖아.”

누가 아무나 딴 사람 좋아하라고 시켰냐고. 나 말고 다른 사람하고도 가까이 어울려 봤으면 좋겠다고 한 거지.

다시 설명해 주려다가 무슨 의미가 있겠나 싶어서 관뒀다. 뭐라고 말하든 최수호한테 제대로 전달되지는 못할 것 같았다. 최수호가 귀 기울여 들어 줄 것 같지도 않다.

솔직하지 못하다는 건 안심을 못 하고 있다는 거다. 최수호와 내 사이에는 벽이 생겼다.

어제 아팠어. 복싱 완전히 그만두기로 했어. 말하고 싶은데, 최수호가 이러면 얘기할 수가 없다.

“황춘식 감독님이랑 영화 찍기로 했어?”

화제를 바꾸기로 했다. 최수호는 내 질문에 놀란 기색이 역력했다. 방금 자기 입으로 뜬금없이 황 감독님 얘기 꺼내 놓고서 놀라긴.

“갑자기 이름 나오길래. 만났어?”

“만났는데 영화는 다른 거 찍어.”

다른 영화. 떠오르는 건 하나뿐이다.

“너희 어머니가 추천하신 거?”

“응, 그거.”

“찍기 싫다며.”

“아냐. 마음에 들어. 시나리오 봤더니 재밌겠더라.”

최수호는 참 거짓말을 못한다. 남들한테는 몰라도 나한테는 못한다.

나는 진짜 최수호를 알고 있다. 최수호가 아무리 태연하게 말을 지어낸다고 하더라도 원래대로라면 여기서 무슨 얘기가 나왔을지 짐작한다는 소리다. 물론 이번 영화가 갑자기 마음에 들 수도 있는 거지만, 정말 시나리오가 마음에 들어 생각이 바뀌었다면 다르게 얘기했을 거다.

최수호는 지금 자기가 뭘 하는지 모르는 모양이지만 나는 안다.

최수호는 나를 밀어내고 있었다.

“최수호, 내가 너 찬 것 때문에 나 불편하냐.”

큰마음 먹고 던진 말에 최수호의 눈이 동그래졌다. 그것도 잠깐일 뿐 최수호는 나를 똑바로 보면서 고개를 저었다.

“아니. 나 괜찮아.”

아주 편안하기 짝이 없는 얼굴로 괜찮단다. 듣는 사람 속 터지게.

“저녁 먹는다고 한 건 약속이 있어서 그래. 오후에는 어머니랑 같이 인터뷰 촬영하려다가 취소됐어. 근데 혹시 다시 부를지도 몰라서, 그냥.”

반짝반짝 웃으면서 잘도 말한다. 오늘 최수호는 나한테 개자식이기로 작정했나 보다.

“오늘 오지 말걸 그랬다.”

최수호가 먼저 피할 때 오지 말걸. 자리에서 일어서자 최수호가 허둥지둥 내 소매를 붙잡았다.

“열아, 나 정말 괜찮아.”

끝까지 거짓말이다.

화가 난다. 최수호한테 나는 건지, 최수호를 이 지경까지 몰아간 나한테 나는 건지는 확실하지 않았다.

최수호를 뿌리치고 걸어 나가는 걸음마다 속이 꼬였다. 열이 다시 오를 듯 이마가 뜨듯했다.

“당분간 보지 말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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