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40화 (40/88)

40.

내가 혼자 참으면 열이는 날 무겁다고 느끼지 않을 거다. 앞으로도 같이 있을 수 있다.

나는 연기는 잘하니까.

끊이지 않고 떨어지던 눈물이 멎었다. 열이가 원하는 대로 나를 만들어 내면 멀어지지 않을 거다.

결론을 내자 이상하게 차분해졌다. 꼭 둑을 쌓아 물길을 막은 것처럼 생각이 끊겼다.

“혼자 있어 보면, 의외로 수호 씨 혼자서도 괜찮을 거야.”

“…….”

“그, 다 울었어?”

“네.”

“휴지 줄까?”

“네.”

황 감독님이 주머니에서 휴대용 티슈를 꺼냈다. 보드라운 티슈였는데도 눈은 뭐가 닿든 따가웠다.

“목 안 말라? 차가운 거라도 사다 줄까?”

“아니요.”

“으음…….”

“…….”

“이런 타이밍에 물어보기 뭐 한데, 어디까지나 궁금해서 묻는 거니까 오해하지 말고 들어. 혹시 대본 읽어 봤어? 내가 줬던 거.”

열이가 가져온 대본 얘기라는 건 바로 알아들었다. 대본이 마음에 들어 감독했던 지난 작품을 다 봤다는 얘기까지 할 필요는 없을 거다. 예전 작품엔 큰 임팩트를 못 느꼈는데, 이번 시나리오는 꼭 내 얘기 같아서 좋았다.

“읽어 봤어요. 좋던데요.”

내 대답에 황 감독님의 얼굴에 화색이 돌았다.

“그래? 그럼 혹시…….”

“전 못 해요.”

대답을 듣자 환해지던 안색이 바로 바뀐다. 고개를 끄덕이며 수긍하는 듯하던 황 감독님이 다시 내 쪽을 눈짓했다. 포기가 안 되는 걸 거다.

“음. 왜? 역할이 마음에 안 들어? 아무래도 소속사에서 안 된다고 하려나? 물론 최수호 씨가 하기에는 사이즈가 작은 영화일 수도 있는데…….”

“아뇨. 그런 게 아니라 다른 영화 들어가야 해서요.”

“윤서화 선생님이 제작하시는 거?”

“네.”

“그게 더 나아?”

내게 묻는 황 감독님의 얼굴이 어중간하게 일그러진 채 경련했다.

“아뇨. 전 감독님 영화가 더 좋아요.”

대답하자 어떻게 둬야 할지 모르는 것 같던 황 감독님의 표정이 비로소 편안해졌다. 안심시키려고 한 말은 아니다. 지금까지 내 얘기를 들어 준 게 고마워서 한 아부도 아니었다.

진심으로 황 감독님의 시나리오가 더 좋다고 생각한다. 고르라면 연기하고 싶은 것도 그쪽이다. 조건이나 영화 규모는 비교가 안 되겠지만, 그런 건 애초부터 상관없었다.

“제작비랑 몸값이 문제라면 내가 어떻게든.”

“저는 좋아하는 사람이 원하는 건 다 해 주고 싶어요. 그것밖에는 방법을 모르니까.”

맥락을 끊으며 튀어나온 얘기에 황 감독님의 낯빛이 다시 흔들린다.

나는 본래 유명세나 출연료를 원해서 연기를 한 게 아니었다. 차라리 그랬더라면 만족이 쉬웠을 텐데.

“어머니가 원하니까 할 거예요. 다른 이유는 없어요.”

나를 잘라 내고 비틀어서라도 그 사람이 나를 좋아해 주었으면 좋겠다.

내가 너무 무겁다면, 나를 토막 내서라도 그 마음에 담기고 싶다.

이 맹렬한 외로움이 천한 것이라고 한다면 나는 평생을 비천하게 살아왔다. 단 하루도 귀했던 적이 없다.

어쩔 수 없다. 이것 말고는 모르니까. 제대로 성공해 본 적도 없는 방법인데 그래도 그것밖에는.

“그렇다면 수호 씨가 원하는 건?”

“없어요, 이제.”

열이하고 연인이 되고 싶었지만 버림받을 거라면 포기하겠다. 열이는 날 좋아하지 않는다. 열이의 가장 소중한 사람은 될 수 없다. 어차피 나는 안 된다.

받아들이면 된다.

열이가 원하는 대로 하면 미움받지 않을 거다. 그거면 된다.

“그 영화 수호 씨도 하고 싶기는 해?”

“아니요. 별로. 저 원래 그 감독님 영화 안 좋아해요.”

“역시 수호 씨가 사람 보는 눈이……. 이게 아니라. 근데도 하겠다고?”

“네.”

이건 다짐이다.

“열이가 하라는 대로 다른 사람도 좋아할 거예요. 아무나.”

“……수호 씨.”

내가 뭘 원하는지는 중요하지 않다. 사람들이 원하는 대로 나를 만들면 필요한 사람이 될 수 있다. 연기하고 똑같다. 적어도 배우 최수호는 쉽게 거부당하지 않는다.

“제가 세상에서 좋아하는 건 두 사람밖에 없어요. 그중에서 날 좋아하는 건 한 사람뿐이고.”

어머니를 사랑하는 건 고를 수 없었지만, 열이는 나를 선택해 주었다. 그러니까 나도 열이를 위해서라면 뭐든지 할 수 있다.

“저는 열이를 위해서면 죽을 수도 있어요. 그러니까 열이가 하라는 대로 할 거예요.”

황 감독님이 어정쩡하게 입술을 여닫았다. 그, 저기. 띄엄띄엄 나오던 말이 문장이 되기까지는 시간이 걸렸다.

“수호 씨 다짐이 무시무시한 건 그렇다 치고 정열 씨가 다른 사람을 좋아하라고 한 거는 그런 뜻이 아니었을 것 같은데. 오히려 정반대 같단 말이지.”

“…….”

“내가 아는 척하기도 그렇지만. 이걸 어떻게 말해야 하나. 남의 일에 함부로 충고하는 게 아닌데, 참.”

계속해 중얼거리면서 황 감독님이 머리를 싸쥐었다.

“수호 씨, 이런 말 꼰대 같겠지만 말이야……. 삼촌뻘인 걸 생각하면 꼰대 맞지만, 내가 살아보니까 인생은 한 번뿐이야.”

살기보단 죽어 봐야 느낄 수 있을 교훈 같은데요. 굳이 대답할 필요는 없을 것 같아서 입 다물었다.

“사람은 누구나 자기 인생을 살아야 해. 혼자서. 그걸 아무리 남의 몫으로 떠넘겨도 결국 사는 건 자기 자신이야.”

전에 없이 진중하게 말하는 황 감독님을 보며 앞꿈치로 바닥을 짓눌렀다. 고무 매트가 물렁물렁 들어간다. 망설임 끝에 어렵사리 나온 얘기가 내 가슴을 꿰뚫었더라면 드라마 같았을 테지만, 솔직히 못 알아듣겠다.

“무슨 말인지 잘 모르겠어요.”

“그래, 사실 나도 모르겠다. 에효, 내가 누굴 가르치냐.”

그네에서 내려온 황 감독님이 주머니를 뒤져 볼펜과 메모지를 꺼냈다. 황 감독님은 그대로 볼펜으로 뭔가를 휘갈기더니 메모지를 쭉 찢어서 내게 건넸다.

“할 말 있으면 언제든지 전화해. 영화 찍잔 소리 안 할게.”

종이에 쓰인 전화번호가 손아귀에 잡혔다. 열한 개의 숫자를 나는 이유도 모르고 오래 주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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