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39화 (39/88)

39.

나는 열이가 갈증 나서, 조금만 떨어져 있어도 목이 마르고 애가 타서 아무것도 못 하는데. 왜 열이는 아닐까. 왜 내가 필요로 하는 사람들은 그만큼 내가 필요하지 않을까.

나는 수치스러울 정도로 외로웠다. 때로는 수치도 잊을 정도로 절박해졌다.

불 꺼진 집 안의 풍경이 숨 막힌다. 벅차던 호흡이 점차 가라앉았다. 폐가 무겁게 짓눌린다.

돌아서 문고리를 돌리면서 나는 또 절실해졌다.

하지만 다시 계단을 내려갔을 때 열이는 거기에 없었다.

열이네 집 문을 두드렸을 때도 안에서 답은 돌아오지 않았다. 전화조차 받지 않았다. 모든 게 거절이었다.

뒤통수를 쪼는 태양 볕이 아프다. 아래로 자꾸만 떨어지는 눈물이 무거웠다. 눈물이 고일 때마다 눈이 통째로 같이 흘러내릴 것 같다.

처음 있는 일도 아닌데 왜 상처는 매번 클까. 열이가 밀어낼 때마다 어째서 매번 이대로 죽어 버리는 게 아닐까 싶게 아픈 걸까.

돌아가지도 못하고 계속 아파트 단지를 서성거렸다. 나는 열이가 아무리 밀어내도 떠나지 못하는 사람이었다.

어머니를 포기하지 못했듯 도무지 미련을 접지 못하는 나약한 인간.

열이는 나를 버리지 않을 거란 생각은 그저 나만의 바람이었는지도 모른다. 나는 드디어 그 애에게조차 버림받았는지도 몰랐다.

아무렇게나 걸은 끝에 닿은 건 놀이터였다. 놀이터에는 여전히 아무도 없다.

열이가 앉았던 그네에 앉아 생각했다. 이대로 영영 열이하고 만날 수 없다면. 계속 나를 봐 주지 않는다면.

계속 살아 있을 이유 같은 건 없지 않나?

바닥만 보고 있으면 그대로 발이 꺼지는 느낌이 들었다. 이대로 땅에 삼켜져 사라질 수 있을 것만 같다.

발치에 사람 그림자가 드리웠다.

운동화 위로 진이 형 체육관 이름이 쓰인 스포츠백이 보인다. 급하게 고개를 들자 내 앞에 선 사람이 누구인지 보였다.

“수호 씨? 맞지.”

삐죽삐죽 제멋대로 뻗친 수염에 두툼한 덩치의 소유자.

“혼자서 여기에서 뭐 해? 얼굴은 또 왜 이렇고. 울었어?”

“황…….”

“어어, 맞아. 나야. 황춘식.”

하하, 너털웃음을 터뜨린 황춘식 감독님이 내 옆에 앉았다. 그네가 삐그덕, 소리를 냈다. 앉아도 된다고 말한 적 없는데. 자리를 피할 힘도 없다.

“무려 최수호 배우님이 왜 여기서 혼자 울면서 그네를 타고 있었어? 연기 연습 중이야?”

“…….”

“어쩐지. 고백하러 간다더니…….”

“네?”

“아무것도 아냐. 혼잣말이야, 혼잣말.”

“저요.”

“응? 말해 봐. 나 시간 많아. 다 들어 줄게.”

잘 모르는 사람이라 오히려 무슨 얘기든 할 수 있을 것 같았다. 아무래도 상관없는 사람한테는 어떤 말이든 할 수 있다.

“죽을까 봐요…….”

“응……? 아니, 그, 그, 그건 안 되지. 세상에, 죽으면 안 되지. 어쩌다 그런 생각을 하게 됐어? 아이고, 죽는 건 절대 안 되지.”

“제가 좋아하는 사람이 저랑은 절대 사귀기 싫대요. 제가 뭘 해도 안 된대요.”

“정열 씨가 그렇게까지 말했어?”

열이 이름이 나와 옆을 보자 황 감독님이 스스로 입을 틀어막았다.

“어떻게 아세요?”

“……뭐, 뭐가?”

“열이라는 거 어떻게 아셨어요.”

“사실은 내가 서로 연분이 있는 사람들을 기가 막히게 알아차리는 직감이 있어서. 저주받은 초능력이라고 할 수 있지.”

“…….”

“……수호 씨, 그런 얼굴로 쳐다보면 나 너무너무 부담스럽다? 아무리 얼굴 쓰는 게 직업이라도 그렇지, 그렇게 쳐다볼 건 없잖아.”

“저는 거짓말하는 사람이 제일 싫어요.”

“미안. 정열 씨가 말해 주더라고.”

“…….”

“진짜 사람 가슴 조마조마하게 쳐다보네. 이게 미남의 위력인가. 배우의 눈빛이란 건가. 윤서화 선생님 아들이라 그런가.”

이실직고해 놓고도 황 감독님은 옆에서 계속 혼자 중얼거렸다.

“열이랑 친하세요?”

그러고 보니 이 사람이 왜 이 시간에 여기 있는 거지. 이 근처에 사나. 한참 생각하고 나서야 진이 형 체육관에 다닌다는 게 기억났다. 그때는 열이하고 친해 보이지는 않았는데.

“약간? 난 정열 씨 좋아해.”

“열이는 저 안 좋아해요.”

“갑자기 얘기가 그렇게 가네? 그럴 리가. 정열 씨가 수호 씨 무진장 챙기던데, 무슨.”

“저랑은 못 사귄대요.”

“그…… 왜 그랬을까. 왜 못 사귄대?”

“모르겠어요. 열이는 완벽하고 전 아니니까. 더는 저를 참아 주기 힘들어진 거 아닐까요.”

“응……? 에이, 그건 너무 자신감 없는 거 아닌가? 객관적으로 봤을 때 수호 씨가 부족한 게 뭐 있어. 경력 빵빵하지, 돈 많지, 잘생겼지. 일단 얼굴로는 압승이야.”

“열이가 훨씬 귀여워요.”

“엥.”

“열이는 잘생겼고 예쁘고 귀여워요.”

“물……론 나도 정열 씨가 못생겼다는 건 아닌데. 뭐, 사람을 얼굴로 평가하고 그러면 안 되지만 정열 씨가 살짝 취향을 탄다면 수호 씨는, 아니. 수호 씨는 연예인이잖아. 일반인하고 비교하려고 하면 안 되지. 자기 얼굴에 자신감 있는 줄 알았더니. 거울 안 봐?”

“전 잘생겼어요.”

“응? 응…… 그렇지. 잘생겼지. 알고 있네……?”

“그렇지만 열이가 훨씬 귀여워요. 아는 연예인 중에서 비교하라고 해도 열이가 제일 귀여워요. 취향 타는 건 모르겠지만 본인들 눈이 낮은 건 어쩔 수 없죠. 열이가 안 귀엽다니 그런 시력으로 일상생활은 멀쩡하게 가능한지 궁금하지만.”

“수호 씨 은근히 말 심하게 한다. 수호 씨야말로 일상생활 가능한가 싶어.”

“일상…… 이제 열이가 저랑 안 만나 줄 테니까 불가능하겠네요.”

“갑자기 또 대화가 어두운 쪽으로 가네. 깜빡이 좀 켜고 방향 틀어 주라. 그리고 둘이 친구잖아. 실연 정도로 영영 안 만나겠어? 지금은 어색해서 그런 거겠지.”

“집에 가도 문 안 열어 주고 전화도 안 받는데요.”

“차이자마자 그랬다고? 안 열어 줄 만하네.”

“그러면 안 되는 거예요?”

“안 된다고 할까. 이거 참.”

황 감독님이 한숨을 푹, 내쉬며 뒤통수를 긁적댔다.

“수호 씨는 정열 씨한테, 음, 의지하는 것 같아. 그것도 평균 이상으로. 관계야 각자 특수성이 있는 거니까 내가 뭐라고 말하긴 그렇지만 문제는 본인의 모든 에너지를 정열 씨한테 쏟아붓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는 거?”

“그러면 안 돼요?”

허어, 황 감독님이 바람 빠지는 소리를 냈다. 끄응, 팔짱을 끼고 고개를 몇 번 주억거리다 황 감독님이 다시 입을 열었다.

“이해해. 나도 그럴 때가 있었으니까. 세상에서 오직 이 사람만이 날 이해해 주는 것 같았던 때가 있었더란 말이지. 그 자식이야 자긴 게이 아니라고 내 뒤통수만 홀랑 때리고 협박이나 하는 천하의 개호로 잡놈이었다만, 물론 정열 씨는 안 그러겠지.”

“열이는 안 그래요.”

“아이고, 그러십니까.”

황 감독님이 한탄했다.

“그래도 그러면 안 돼. 한 사람한테 모든 걸 의지해 버리면 안 돼. 그 사람은 얼마나 무겁겠어.”

“열이도 제가 무거웠을까요.”

내려놓고 싶을 만큼.

싫지는 않더라도 무거웠을까. 이제 견딜 수 없다고 생각했을까.

눈물이 소리 없이 떨어졌다. 손등으로 문질러 닦자 눈가가 쓰렸다. 어차피 닦아도 계속 흐를 거라면 무슨 소용이 있나 싶기도 하다.

“그보다는 걱정됐겠지. 정열 씨는 수호 씨 엄청 걱정하잖아. 촬영장에서도 안절부절못하고 수호 씨만 쳐다보더라고. 누가 싫어하는 사람을 그렇게 쳐다봐. 야, 완전 사랑이던데.”

“열이는 원래 다정해요.”

“누구한테나 그럴 거라고? 그거는 솔직히 콩깍지다. 아무한테나 그러는 사람이 어디 있어. 두 사람에 대해서 잘 몰라서 큰 조언은 못 해 주겠지만 확실한 건 정열 씨는 수호 씨를 좋아한다는 거야. 옆에서 보기만 해도 알아.”

아마 그래서 여기까지 왔나 보다. 욕심이 났다.

열이는 내가 열이한테 소중하다는 걸 느끼게 해 줬다. 그리고 나는, 그 정도로 만족할 수가 없었다. 그 애의 한 조각도 다른 사람한테 빼앗기고 싶지 않았다.

내가 이런 인간이 아니었다면 좋았을 텐데. 열이를 좋아하지 않을 수 있었다면.

이렇게까지 너를 원하지 않았더라면.

하지만 아무리 돌이켜도 네 전부를 원하지 않을 방법을 모르겠다. 네 첫 번째가 될 수 없다는 게 괴롭고, 괴롭다.

“싫어하게 되면요?”

“그럴 리가 없다……고 말해 주고 싶은데 내가 해 줄 수 있는 말이 아니네. 수호 씨가 노력해야겠지? 관계는 두 사람이 노력해서 지키는 거니까.”

“저 그런 거 잘 못해요.”

관계를 망치는 데만 재능이 있는 것 같다, 나는.

“나는 내 코가 석 자인데 어쩌다 분수에도 안 맞는 청소년 심리 상담을 해 주고 있나. 이제 청소년 아니지, 아무튼. 일단 정열 씨 입장에서 생각해 보는 건?”

“열이 입장에서 어떻게요?”

“정열 씨가 사귈 수 없다고 했으니까 그 뜻을 존중해 주려고 한다거나.”

“열이 앞에 나타나면 안 되는 거예요?”

“뭘 또 그렇게까지……? 친구로 잘 지내면 되지.”

“열이는 저더러 다른 사람을 좋아하라고 했는데 저는 열이만 보면 다른 건 아무래도 상관없어져요.”

열이가 그러지 말라고 했는데.

황 감독님은 한참을 나를 보기만 하다가 내 등에 손을 얹었다. 무언의 동의처럼 느껴졌다. 그 좁고 명료한 시야를 겪어 본 적 있다는.

“혼자 있는 법을 배우면 어떨까.”

하지만 나는 인생의 대부분이 혼자였다.

오직 그 애하고 함께 있는 시간에만 겨우 내가 혼자가 아니라고 느낄 수 있었다. 그랬었는데.

아래를 내려다보자 눈이 빠질 것처럼 눈자위가 욱신댔다. 속눈썹에 걸려 있던 눈물이 바닥으로 툭, 떨어져 터진다.

“그러면 될까요.”

원하지 않을 방법은 없더라도 아닌 척 가장은 할 수 있다.

다른 사람을 좋아하는 척하면 열이도 괜찮다고 생각하지 않을까. 열이를 더는 좋아하지 않는 척하면 된다. 중학교 때처럼 참으면 열이 옆에 있을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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