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36화 (36/88)

36.

“다른 사람을 좋아하려고 노력해 봐.”

내 말 한마디에 무너지는 최수호 표정을 보는 건 이번이 마지막이었으면 좋겠다. 최수호가 이제부터는 나를 조금씩 덜 좋아했으면 싶다.

“나 말고 다른 사람 좋아해 봐. 다정한 사람은 많아. 너 좋아하는 사람도 많을 거고. 대학도 가고, 연기도 더 하고, 사람들 만나다 보면 좋아할 수 있는 사람이 생길 거야.”

진심으로 그렇게 생각한다. 최수호를 아끼는 사람들은 지금도 많다. 최수호는 이제 놀이터에서 혼자서 움츠러들어 있던 꼬마애가 아니다.

최수호는 잘생겼고, 싸가지 없고, 고집불통에, 제멋대로에, 마음이 깊고, 성실하고, 한 번 마음을 주면 끝까지 좋아하는 방법밖에 모르는…… 좋은 애다.

그런 최수호의 모든 게 나 한 사람한테만 묶이는 건 부당하다.

나는 이미 충분히 오래 최수호의 모든 것이었다. 친구, 가족, 형제, 첫사랑.

나 하나 잃는다고 최수호가 모든 걸 잃는다고 생각하게 두고 싶지는 않다.

“그게 대답이야?”

“……어.”

이 짧은 대답이 뭐라고 어려운지. 껍질째 호두 알이라도 삼킨 양 목이 갑갑했다.

“미안하다, 최수호. 나는 너하고 못 사귀어.”

힘껏 디딘 바닥이 물렁하게 꺼진다. 그네에서 내렸는데도 그네는 완전히 멈추지 않았다. 줄이 삐걱거리며 흔들린다.

“케이크, 초콜릿, 다 그래서 준비했어? 미안해서?”

그넷줄을 쥔 최수호의 손가락 마디가 하얗게 바랬다. 힘껏 줄을 움켜쥐면서 최수호는 나를 원망하는 눈으로 바라보았다. 또는 원하는 눈으로.

“그런 거 아니야.”

“왜 안 돼?”

최수호가 줄을 놓고 일어섰다. 순식간에 나보다 눈높이가 올라가고 그림자가 시야에 드리운다.

“왜 난 안 돼?”

최수호는 다급하게 따져 물었다. 내게서 답을 얻어 내면 상황을 바꿀 수 있으리라 믿는 것같이 절박해 보였다.

“너 아니면 안 된다고 해도, 뭐든지 한다고 빌어도 나는 안 돼? 왜? 뭐 때문에.”

“최수호.”

“나는 좋아하는데. 너만 좋아하는데, 난. 내가 잘하면 되잖아. 이유진보다, 네가 좋아할 다른 사람보다 내가 너한테 훨씬 잘해 주면. 내가 제일 좋아하는데 왜 안 돼. 나만큼 안 좋아해도 되니까 받아 주기만 하는 것도 안 돼?”

“최수호, 울지 마.”

최수호가 고개를 숙였다. 굵은 눈물방울이 턱을 타고 뚝뚝 떨어졌다. 닦지도 않고 쏟아 낸 눈물이 목을 타고 흘러내려 옷을 적신다.

“항상 이래.”

마음이 아팠다.

“너는 다른 사람이어도 괜찮은데 나만 이 모양이야.”

최수호가 울어서. 최수호를 울게 만든 게 나라서.

눈물을 닦아 주고 싶어 내민 손을 최수호가 움켜쥐었다. 손바닥을 타고 열기가 내게로 옮겨 붙는다. 마른 나뭇가지로 옮아 온 불꽃처럼 화기는 재빠르게 번졌다. 불길이 내장을 핥고 있는 것만 같았다.

내 손을 꽉 쥔 채 최수호가 한 걸음 다가왔다. 위험할 정도로 가까웠다. 언제 사람이 지나갈지 모르는 아파트 단지 한복판이다. 힘주어 손을 빼내자 최수호는 오히려 나를 더 세게 당기려 들었다. 금세라도 입 맞출 것 같아 숨이 기도에서 마구잡이로 엉켰다.

뿌리치듯 손을 빼냈을 때, 최수호는 얻어맞은 사람처럼 나를 바라보았다.

주먹을 말아 쥔 손을 이마에 대고 헐떡이는 최수호가 느린 장면으로 보인다. 차마 나를 쳐다볼 수가 없다는 듯 고개를 돌린 최수호의 뺨이 눈물에 젖어 있었다.

“수호야, 나는…….”

“열아, 제발 그만해.”

최수호가 뒤돌아서서 걸음을 뗐다. 그 순간에, 나도 모르게 발이 움직였다.

최수호는 내게 잡혀 주지 않았다. 돌려세우려 하자 달음박질쳐 왔던 길로 달아나려 했다.

명백히 도망이었다. 나하고 있으면 내가 계속해 상처 줄 거라 생각해서 도망치는 거다.

그래서 수호를 그냥 보낼 수가 없었다. 왜 사귈 수 없는지 설명하고 싶었다. 다른 사람이어도 괜찮은 게 아니라고 말해야 했다.

“최수호. 수호야!”

멀어지는 최수호를 잡으려 숨이 차게 뛰었다. 폐하고 심장이 한 덩이로 뛰는 느낌이었다. 아파트 로비 안으로 정신없이 뛰어 들어간 최수호가 그대로 계단으로 방향을 꺾었다.

계단을 한참 올라 층계참에 도착하고 나서야 최수호를 따라잡았다. 안 그래도 나보다 큰데 서너 계단 앞에 올라서기까지 한 최수호를 제대로 보려면 고개를 한참 쳐들어야 했다.

“잠깐만, 멈춰서 내 말 좀…….”

“왜 따라와?”

붙잡힌 팔을 당기며 최수호가 물었다. 나는 층계참까지 비틀대며 따라 올라갔다. 그늘 속에서 최수호의 눈동자만 형형하게 보인다.

“찼으면서 왜 따라오는 건데, 열아.”

말문이 막혔다. 최수호가 떨고 있어서였다. 얼음물이라도 뒤집어쓴 사람처럼 머리부터 발끝까지 떨고 있어서, 최수호의 팔을 잡은 내 손까지 떨림이 전해졌다.

“뭐라고 하든 소용없어. 난 다른 사람 같은 거 안 좋아해. 네가 싫다고 해도 계속 네 옆에 있을 거야. 네가 다른 사람 좋아하면 그 애하고 사귈 거야. 너한테, 미움받는다고, 해도.”

“그런 얘기 하려고 한 거 아니야. 내 말 좀 들어 봐. 최수호, 내가 왜 못 사귄다고 했냐면.”

“들으면 바뀌어?”

최수호의 눈에서 다시금 눈물이 넘쳤다. 내 손등으로 떨어져 내린 눈물방울이 살갗을 녹일 것 같았다. 수호는 떠는데 나는 온몸에 도는 열 때문에 뼈에 불이 붙는 느낌이었다.

“결론이 달라져?”

아무 말도 할 수가 없다.

무슨 말을 하든 너를 아프게 할 것 같아서.

“그럼 필요 없어.”

최수호가 계단을 내려와 몸을 겹쳐 온다. 다리가 서로 얽혀 비틀거리고 입술이 서툴게 닿았다. 앞니가 부딪힌다. 최수호가 막무가내로 했던 첫 입맞춤보다 더 힘겨웠다. 최악이었다. 키스라기보다는 충돌에 가깝다.

혀끝에 비릿하게 번지는 맛으로 입술이 찢어졌다는 걸 뒤늦게 알았다. 피 냄새가 비강으로 번졌다. 피 섞인 침을 삼키면서 나는 무작정 끌어당기는 최수호에게 휩쓸려 비틀거렸다.

뜨겁다. 최수호와 겹쳐 있으면 더웠다. 어느 순간부터인가 최수호와 있으면 정신을 앗아 가는 열기를 겪었다. 찢어진 입술에 최수호의 입술이 다시 포개졌다.

“어, 엘리베이터 올라갔네.”

계단 아래에서 말소리가 들렸다. 정신이 번쩍 들어 황급히 최수호를 밀어냈다. 밀려나지 않으려 드는 최수호를, 나는 더 세게 떠밀었다.

우리는 얽혔을 때처럼 엉망으로 비틀대며 떨어져 나갔다. 거칠어진 호흡만 소란하게 쏟아져 나와 최수호와의 사이를 메운다. 최수호가 나를 조용히 노려보았다.

“네 마음 같은 거 상관없어.”

상관없다면서 왜 넌 그런 표정인가.

최수호는 내가 아니라 자기 자신한테 화가 난 것 같았다.

최수호를 상처 입히고 싶었던 적은 없었다. 맹세코 단 한 번도 없다.

하지만 가장 크게 최수호를 상처 입힌 건 다름 아닌 나다. 내가 최수호의 최악이었다.

“네가 안 좋아해도 상관 안 해. 네 옆에 있을 수만 있으면…….”

목소리가 덜덜 떨려서 내용을 알아듣기 어렵다. 최수호를 껴안고 싶다고 생각하면서도 나는 꼼짝도 못 하고 있다.

“나를…… 좋아하지 않아도…….”

“그런 말 하지 마.”

“…….”

“그래서 너하고 사귈 수가 없는 거야.”

최수호의 안색이 새하얗게 질렸다. 어떻게 들릴지 깨달았을 땐 늦었다.

아래에서부터 올라오는 소리가 울리고 있었다. 주고받는 말소리도 함께. 엘리베이터를 기다리는 대신 계단을 오르기로 했는지 인기척이 점점 가까워진다.

“가.”

지금 최수호의 얼굴을 나는 잊을 수 없을 거다. 슬픔이 낙인처럼 그 애를 오그라뜨리는 모습을.

수호야, 너한테 상처 주려고 한 게 아니었어.

하지만 그런 말이 무슨 소용이 있겠는가. 이미 말은 뱉어졌고 최수호는 다쳤는데. 어떤 사과도 벌어진 일을 되돌릴 수는 없다.

힘이 몽땅 빠져나간 다리가 후들댔다. 최수호가 멀어지는 소리를 들으면서 나는 주저앉았다.

벽에 닿은 등이 미끄러져 내린다. 일어날 수가 없었다.

* * *

시야가 눅눅하게 흔들린다. 발이 닿는 데가 다 흐무러진 골판지 같다. 집으로 돌아가면서도 여러 번 길 모르는 사람처럼 헤매야 했다.

현관문 키패드를 열었는데 번호가 기억나지 않았다. 겨우 번호 두 개만 누르고 멈춰 있는데 안에서 먼저 문이 열렸다.

“열이니?”

내 이름을 불리는 것만으로 속이 먹먹해졌다.

엄마가 현관 안으로 나를 끌어들였다. 휘청이며 딸려 들어간 나는 고개만 더욱더 깊이 숙였다. 온몸이 으슬으슬 떨렸다.

“열아, 너 진이랑 대체……. 정열, 엄마 봐.”

뺨을 감싸 올리는 손길을 따라 고개가 들린다. 바로 앞에 있는 엄마 얼굴조차 제대로 보이지 않았다. 벗겠다고 뒤축을 구긴 운동화가 발바닥에 짓밟혀 아팠다.

“너 아파?”

“몰라.”

막을 틈도 없이 눈물이 후두둑 쏟아졌다. 구멍 난 처마에 새는 빗물처럼 끊임없이. 터지기 시작하니 막을 수가 없었다.

“왜 울어.”

“몰라…….”

무릎에 힘이 빠져 무작정 주저앉았다. 머리 위에서 어쩔 줄 모르는 엄마의 손길이 느껴졌지만 울음 섞인 숨을 다스리기에도 바빴다. 아무리 빨리 숨을 쉬어도 산소가 모자랐다.

“엄마, 나 아픈가 봐…….”

머리를 감싸 안고 등을 한껏 웅크렸다. 사방이 좁고 캄캄해지도록. 입술 사이로 나오는 날숨이 뜨거웠다. 아직도 입에서 피 냄새가 난다.

이유진이 했던 말의 의미를 이제는 안다.

‘열아, 나 좋아했던 거 아니지?’

왜 내게 그렇게 물었는지.

‘아는데 그냥 좋아졌어.’

왜 고를 수 없는 재앙을 맞닥뜨리고 만 사람처럼 이야기했는지.

좋아졌다, 는 말의 무자비한 어감을 비로소 느낀다.

가슴을 움킨 손바닥 아래서 티셔츠가 엉망진창 구겨졌다. 목구멍 속에서 등유 냄새가 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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