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4.
“재미없었어?”
다 못 읽었다는 말이 마음에 걸렸는지 황 감독님이 조심히 되물었다. 이 사람 이렇게 기죽어 보이는 건 처음이다.
“아뇨, 그게…….”
보여 줘도 되나 망설이다가 찢어진 대본을 꺼냈다. 황 감독님이 입을 헤, 벌렸다.
“제가 찢은 거 아니에요.”
“아……. 혹시 내용 때문에? 부모님이 읽으셨는데 무지 보수적인 분들이시라거나, 독실한 기독교인이라거나…….”
“아뇨. 내용 때문은 맞는데 부모님은 아니고 형이.”
황 감독님의 표정이 더욱 애매해졌다.
“형이 호모포비아야? 정열 씨도 힘들겠네.”
“형이 제가 복싱하는 거 싫어하거든요.”
“응?”
“네?”
“복싱?”
“호모포비아요?”
의문과 이해가 나와 황 감독님 사이에서 속사포 잽처럼 지나갔다. 아, 호모포비아. 거기까지 읽지도 않았을 텐데, 무슨. 내 생각에 형은 록키란 단어를 봤을 때부터 꼭지가 돌았다.
“근데 제가 왜 힘들어요?”
“응? 아? 아, 아니…… 아니면 말고. 그래서 오늘은 왜? 대본 얘기 하려고? 어땠어?”
어째 찝찝한 대답이다. 당장 본론이 중요하니 넘어가긴 하겠는데.
“이거 정말 황 감독님 얘기예요?”
“어느 정도는.”
“부서진 카메라 주워 주는 것도요?”
“거기부턴 픽션이야. 내 청소년기는 그보다 훨씬 어둡고 칙칙한 환경이었지. 혐오가 판을 치고 말이야. 설레는 청춘 연애 같은 것도 없었고.”
“그 뒤에 연애도 해요? 이렇게 찢어질 줄 알았으면 미리 뒤까지 읽어 볼걸 그랬네요.”
문장 일부만 겨우 남아 있는 대본을 들춰 보는 내게 황 감독님이 히죽 웃음을 보였다.
“내 고등학교 시절이야 암울했지만, 영화는 보여 주기 위해 찍는 거니까 관객들한테 그런 것만 체험하게 하고 싶진 않았단 말이지. 퀴어 영화니까 더.”
“카메라 주워 주는 애가 H인 줄 알았어요.”
첫사랑한테 바치는 달콤한 연서라도 되는 줄 알았다. 황 감독님이 고개를 뒤로 젖혀 가며 박장대소했다. 한참 후에야 웃음을 그친 감독님이 눈가에 맺힌 눈물을 닦으며 대답했다.
“H는 내 에이드리언이 아니라 아폴로에 가깝지. 뭐, 아무튼 지금은 그래.”
에이드리언은 영화 <록키>에서 록키의 연인, 아폴로는 경기에서 붙는 챔피언이다. 즉, 애인이 아니라 적수란 소리다.
“실은 그 친구 때문에 지금까지 영화 못 찍었던 거거든.”
“무슨 사연이 있으시길래.”
“협박.”
무슨 협박인지까지 물어봐도 되나, 고민하는데 황 감독님이 말을 이었다.
“게이라고 커밍아웃하지 말라고.”
정체성을 밝히지 말라는 압박이 막 성공 궤도에 오른 일을 포기할 만큼 힘겨운 일인가. 겪어 보지 않아서 짐작이 안 간다.
하긴. 나는 형이 쓰러지는 바람에 그만뒀으면서. 당사자가 되기 전에는 그 상황의 하중을 알 수 없다.
“<악과>가 출세작이긴 했는데, 뭐 그 직후에 영화 찍으려다 엎어지기도 하고 사기도 당하고, 그 친구한테 엿 먹기도 하고 이래저래 상태가 안 좋았거든. 약으로 버티던 시기기도 했고. 정열 씨 말대로 지금은 힘드니까 내일 훈련해야지, 아니 모레, 하루만 더 쉬고……. 그러다 여기까지 온 거야.”
겪어 온 얘기를 듣는 건 간단하지만 겪어 내는 건 전혀 다른 문제다. 관객석에 앉는 것과 링에서 시합을 벌이는 게 다른 것과 같다.
“그사이에 아폴로는 승승장구 챔피언 벨트를 땄고, 나는 4회전 복서로 뛰던 록키처럼 이 일 저 일 마다하지 않고 투잡 중. 그나마 불러 주던 영화 관계자들한테도 잊혀지는 중이고, 시나리오는 죽어도 안 써지고. 이렇게 된 거 커밍아웃이나 해야겠더라고.”
[H에게 보낸다]는 헌사가 아니라 도전장이었다는 소리다. 입 다물라고 협박하던 사람한테 본인이 고스란히 자백한 내용을 보내겠다니. 패기만만이다.
“나름대로 절박하다는 거지, 나도.”
“그래서 최수호가 필요하신 거예요?”
궁금했다. 왜 하필이면 나한테, 최수호한테 이 대본을 보여 주고 싶어 했는지.
“돈 때문에 필요한 거냐고?”
“네. 말하자면요.”
“물론 내가 잊혀 가는 가난한 영화인인 탓도 있고 수호 씨가 영화에 합류해 주면 영업에 큰 도움이 될 것도 사실이지만, 어울리지 않아?”
“사실 주인공하고 어울리는지는 잘.”
“엥? 어떤 면이 안 어울려?”
“최수호는 눈에 안 띄는 타입은 아니잖아요.”
교실의 끝자리, 운동장 가장자리, 사람들의 가외에서만 지내는 남자애가 최수호와 쉽게 겹치진 않았다. 나한테 최수호는 어디 있든 단번에 보일 정도로 반짝반짝했다.
그래서 최수호와 같이 다닐 때 조심스러워지기도 했다. 최수호는 뭐만 하면 소문이 되고 비난거리가 되는 처지였다.
혹시 수호한테 해가 될까 봐 말 한마디도 조심히 하고 다녔던 게 생각난다. 물어보지 않는 한 남한테 최수호 친구라는 말도 잘 안 했다.
“그런가. 그런데 수호 씨, 주변에 사람 잘 안 두잖아. 쉽게 다가가는 쪽도 아니고, 다가가게 두지도 않아서 일 거들어 주러 간 촬영장에서 보면 항상 혼자였어.”
그 얘기가 뭐라고 가슴이 아팠다. 복싱 경기는 관람이라도 할 수 있지, 촬영장은 최수호 일터라서 자주 구경 가기도 눈치가 보였다. 나한테 보이지 않던 곳에서 최수호가 혼자였을 걸 상상하면 이상할 만큼 슬프다.
“연예인이란 직업 빼면 외톨이잖아, 수호 씨도.”
“외톨이 아닌데요.”
“응? 뭐가?”
“최수호한테는 제가 있으니까 외톨이 아니에요. 수호는 혼자가 아니에요.”
“이야.”
황 감독님의 표정이 오묘하게 변했다. 뭘 뜻하는 표정인지 도통 알 수가 없어서 기분 나쁘다.
“두 사람, 정말.”
“왜요.”
“수호 씨는 좋겠다 싶어서. 정열 씨도 부럽긴 한데, 수호 씨가 왜 그러는지 알겠네.”
정체 모를 말투성이다. 최수호가 뭘 그런다는 건지.
“아무튼 그 주인공 역할, 수호 씨도 심경을 알 거라고 생각했거든.”
“뭘 알아요?”
“수호 씨도 정열 씨 좋아하잖아?”
들은 순간 나도 모르게 벌떡 일어섰다. 황 감독님은 싱글벙글 웃으면서 나를 올려다보았다.
“그거…… 어떻게……. 티 나요?”
“이 나라가 이성애에 미치지만 않았어도 주변 사람들이 사귀냐고 백 번은 물어봤을 거다. 티가 나긴. 아주 대놓고 하던데, 무슨.”
“…….”
“청춘들이란.”
입을 꾹 다물어도 입매는 절로 일그러지고 얼굴은 활활 타올랐다. 그렇게 티가 나나? 딴 사람들도 혹시 눈치챘을까? 최수호, 그러게 내가 밖에서 달라붙지 말라고 했는데.
진정하고 알아서 앉으려면 한 천 년이 걸릴 걸 알았는지 황 감독님이 내 팔을 잡아내려 다시 앉혔다. 앉아서도 얼굴에 붙은 불은 쉽게 꺼지지 않았다.
“수호 씨도 대본 읽었어?”
“네.”
“그래, 본인이 하고 싶으면 연락하겠지.”
황 감독님은 어제 장담했던 것처럼 나한테 최수호에게 더 뭐라고 말해 달라고는 하지 않았다. 나도 최수호한테 따로 대본 얘기를 할 생각은 없다. 내가 상관할 일이 아니기도 하지만 최수호는 내 말에 지나치게 영향을 받는 면이 있다.
내가 최수호 커리어를 책임질 수 있는 것도 아닌데 최수호를 휘두르고 싶진 않다. 저번에 양용배 때문에 열 내고 나서는 더. 실수로라도 안 그러려고 노력 중이다.
“아니면 정열 씨가 같이 찍을래? 이걸로 신인 배우 데뷔, 어때.”
“됐습니다.”
“내가 잘 찍어 줄게.”
“됐다니까요. 그런 좋은 기회는 지원 누나한테나 주시든지요.”
배우는 무슨. 말도 안 되는 소리를 하고 있어. 옆에서 에이, 그래도, 어쩌고 하면서 질질 늘어지는 게 한도 끝도 없을 것 같길래 화제를 바꾸기로 했다.
“만약 이번 영화 잘 안 되면 어떻게 하실 거예요?”
“잘 안 돼도 계속 영화 찍고 살 거라고 멋지게 말할 수 있으면 좋을 텐데, 나도 잘 모르겠네.”
“꿈 있다고 먹고살 걱정을 잊을 수 있을 정도로 인생이 만만치가 않단 말이지” 하고 황 감독님이 중얼거렸다.
“늘 비밀이었던 정체를 사람들이 알게 되면 어떻게 될지도 모르겠고. 일단 우리 어머니가 나하고 인연 끊으실 건 알겠다.”
하나밖에 없는 가족에게 부정당하는 게 어떤 건지, 옆에서 봐 와서 조금은 안다. 나는 최수호를 생각했다.
“어떻게든 되지 않을까.”
하늘을 올려다보던 황 감독님이 내게로 고개를 꺾었다.
“일단은 나가떨어지지 않고 버티는 게 목표야. 그러고 나면 길이 보이겠지.”
챔피언 아폴로 크리드와의 경기를 끝까지 버텼던 록키 발보아처럼. 최선을 다했다는 경험은 나를 믿게 해 준다. 즐겁게 나아갔던 기억은.
좋아했던 것이 동력이 되어 준다. 심지어 좋아했던 것으로부터 떨어져 나온 후에도. 내가 원해서 버티다, 원해서 그만둘 수만 있다면.
“끝까지 못 읽어서 여쭤보는 건데, 주인공은 행복해져요?”
질문을 들은 황 감독님이 머뭇거렸다. 그리고 고개를 끄덕였다.
“저도 이거, 수호가 하면 좋겠어요.”
구겨진 종이를 손바닥으로 쓰다듬으면서 수호가 했던 말을 떠올렸다. 자기 얘기 같다고 했다.
“저는 수호가 행복했으면 좋겠어요.”
최수호가 가진 게 먹지도 않고 주머니에 담아 놓다 녹아 버리는 대신 달콤하게 음미할 수 있는 마음이었으면 좋겠다. 최수호는 행복할 자격이 있다.
“어떻게 해야 수호를 행복하게 해 줄 수 있을지 모르겠어요. 수호한테는 나밖에 없는데. 그렇게 생각하면…….”
무섭다.
최수호가 너무, 무섭다.
나를 너무 좋아하는 최수호가.
내 발치에 고인 그림자가 구름을 따라 퍼져 나갔다.
“오늘 최수호한테 고백하려고요.”
* * *
가는 길에 케이크를 샀다. 낯간지럽지만 꽃도 샀다.
집에는 오후에 들어온다는 최수호의 문자를 받고 미리 최수호의 집에서 기다리는 중이다. 최수호더러 언제 도착하는 지 다시 물어볼 필요도 없었다. 본인이 처음 말한 시간에 맞춰 아파트 복도를 내달리는 소리가 들렸기 때문이다.
뛰는 소리가 거실까지 들린다. 뭐가 저렇게 바빠.
“어서 와라, 최수호.”
일찌감치 현관에 와서 기다린 보람이 있게, 예상한 타이밍 그대로 문이 벌컥 열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