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3.
“그래도 즐거웠던 기억이 있으니까 계속했던 거잖아. 소중한 경험이야. 내가 여기 최선을 다했다는 거 말이야.”
“…….”
“뭔가를 좋아하면 동력이 생겨. 좋았던 기억만으로 사는 데 힘이 되기도 해. 저 애들이 계속 운동을 하지 않더라도 여기서 보낸 시간이 좋은 기억으로 남으면 좋겠어.”
좋아하면, 동력이 생긴다.
복싱을 그만두더라도 복싱을 좋아했던 기억으로 잘 살아갈 수 있을까. 아직 자신 못 하겠다. 난 역시 욕심이 많다.
“올라가 봐. 수관 씨가 기다리겠다.”
예 사범님이 문 바깥을 가리켰다. 바로 위층은 천 관장님 체육관이었다.
형이 운영하는 데 말고 다른 복싱 체육관에 와 보는 건 오랜만이다. 여기서 천 관장님이 가르치는 선수들이 훈련하는 거겠지. 약간은 부럽다.
체육관 안에는 흔한 샌드백이나 펀치볼부터 온갖 헬스 기구가 골고루 갖춰져 있다. 공간은 우리 체육관 두세 배는 되는 것 같다. 링도 딱 프로 시합 규격이고, 신경 써서 관리하는 기색이 역력하다. 형이 체육관을 열 때 도와준 것도 관장님이었다.
소독용 천으로 헤드기어를 닦던 천 관장님이 막 올라온 내게 손을 흔들어 보였다. 이 시간에 사람이 없는 걸로 봐선 쉬는 날이거나 나 때문에 닫으신 거다.
아마 후자겠지. 관장님은 도대체 왜 나하고 형을 아직도 돌봐 주는 걸까. 둘 다 복싱도 접었는데.
“잠깐 쳐 볼래?”
천 관장님이 스파링용 미트를 들어 올렸다. 관장님하고 매일 저거 치는 게 일상이던 때도 있었다.
“아뇨.”
해 보고 싶다. 지금 치는 걸 보면 천 관장님이 뭐라고 하실지도 궁금했다. 내 단점을 짚어 주고 발전 방향을 정확히 인도해 줄 수 있는 훌륭한 지도자가 있다는 건 행운이었다.
새삼스럽게, 천 관장님하고 훈련할 때 정말 즐거웠구나 싶다. 다른 건 신경 쓰지 않고 앞을 향해 달려 나가는 쾌감이란. 난 여러모로 운이 좋았다.
하지만 지금 여기서 글러브를 끼는 건 형에 대한 배신처럼 느껴졌다. 형을 다치게 하고 나 혼자 즐거울 수는 없다.
나는 형을 배반할 수 없다.
천 관장님이 미트를 내려놓고 벤치로 갔다. 아래층에서 벗어 둔 내 겉옷이 거기 있었다.
“이거. 너 아래 있는 동안 맡아 뒀어. 중요한 거지?”
찢어진 채로 들고 오느라 더 구겨지고 넝마가 된 대본을 천 관장님은 조심히 건네주었다. 어딜 보나 중요해 보이는 물건은 아닌데.
하긴 중요한지는 겉을 보는 게 아니라 다루는 사람의 태도를 보고 헤아리는 거다. 나는 그걸 천 관장님과 예 사범님께 배웠었다.
“이거 복싱 얘기예요.”
“언뜻 보니 그런 것 같더라.”
거의 찢어져 나간 겉장 너머로 잘린 문장이 보인다.
[종소리가 울릴 때까지 두 발로 서 있으면…….]
“진이 사고 후에 너도 경기 있었잖냐.”
천 관장님이 벤치에 앉아 옆자리를 두드렸다. 거기 앉으면 체육관이 한눈에 들어온다.
“경기야 많았죠.”
내 경기는 형 경기 며칠 뒤였다. 형이 링 위에서 쓰러졌는데 가족들이 내가 경기에 나가도록 내버려 둘 리 없었다. 나는 말 그대로 링에 올라보지도 못하고 졌다.
“다른 사람들이 막지 않았다면 난 네가 그 경기 나갔을 거라고 생각한다.”
“모르죠. 저도 그땐 형 쓰러지는 거 보고 무서웠어요.”
“열이 넌 출전했을 거야. 진이처럼 부상 입은 것도 아니었고, 그만한 압박감은 이전에도 이겨 내 봤으니까. 네가 하고 싶은 대로 하게 뒀으면 넌 안 그만뒀을 거야.”
아무도 나를 막아서지 않았더라면 형이 쓰러졌어도 난 글러브를 꼈을까. 나도 궁금했다.
“제가 정말 그랬을까요?”
그때 경기에 나갔다면 무엇이 달라졌을까. 이겼을까? 다음 경기에도 나갔을까. 누가 알려 줬으면 좋겠다.
“내 생각은 그런데, 또 모르지. 난 네가 아니니까.”
“가끔은 관장님이 저보다 더 절 잘 아시는 것 같던데요.”
“남은 널 몰라. 내가 아는 건 과거의 너야. 그 순간에 네가 어떨지는 그때의 너밖에 모르는 거지.”
나는 영영 경기에 나간 후의 나를 모르게 되었다.
내가 아는 건 지금 천 관장님과 벤치에 앉아 있는 나뿐이다.
“그만두고 싶으면 그만둬도 돼.”
무릎에 올려 두었던 손이 꽉 움츠러들었다. 악력으로 쥐어짠 뼈가 아렸다. 천 관장님의 커다란 손이 내 손등에 얹혔다.
“하지만 네가 그만두고 싶을 때 그만둬야 한다, 열아.”
천 관장님의 말을 되뇌며 나는 눈앞의 링을 바라보았다. 평방 6.1m의 공간. 세상에서 저 조그만 정사각형을 잃었을 뿐인데 왜 이렇게 허전한지.
답은 이미 알고 있다. 그만두고 싶지 않다.
아직은 내 인생에서 복싱을 끝내고 싶지 않았다.
* * *
“신세 많이 졌습니다.”
체육관이 문을 열 준비를 하는 아침이었다. 머리 숙여 인사를 마치고 관장님하고 사범님 댁에서 나서는 발걸음은 가벼웠다.
셋이 같이 새벽 운동까지 간단히 하고 훌륭한 식사도 했다. 역시 천 관장님 요리 솜씨는 죽지 않았다. 집에서 먹은 손맛은 못 잊는다더니 관장님 밑에서 훈련 그만두고 제일 그리웠던 건 이 손맛 아니었나 싶을 정도다.
집 떠나면 고생이라던데 관장님하고 사범님 댁에서 더 잘 먹고 잘 쉬다 가는 기분이다. 집 같은 데라 그런가.
“정말 안 태워다 줘도 돼? 어차피 오래 걸리지도 않는데 타고 가지.”
“버스 타도 얼마 안 걸리잖아요. 체육관 여셔야죠.”
아침에 안 데려다주셔도 된다고 한 후로 이 대답만 몇 번짼지. 버스 타고 가는 게 무슨 큰일이라고 천 관장님의 두툼한 눈썹이 한껏 처졌다.
“그래도…….”
“그만해, 여보. 열이가 됐다잖아.”
예 사범님이 팔꿈치로 옆구리를 찌르자 천 관장님의 눈썹이 그제야 제자리를 찾았다. 말이 찌른 거지, 단련된 유도 선수의 팔꿈치라 되게 아파 보인다.
“또 놀러 와.”
“그래, 열아. 언제든지 와.”
‘언제든지’를 거듭 강조하면서 천 관장님이 크게 손을 흔들었다. 팔이 아플 때까지 손을 흔들고 나서야 두 분 시야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언제든 날 반겨 줄 장소와 사람이 있다는 건 안심이 되는 얘기다.
최수호한테도 그런 데가 더 있다면 좋을 텐데. 우리 집이 있기는 하지만, 걔한테는 우리 집뿐이니까.
최수호도 어릴 때 관장님 밑에서 배운 적도 있고, 천 관장님하고 예 사범님이라면 최수호를 기꺼이 환영하시겠지만 최수호가 낯을 가린다.
최수호 20년 인생에 딱 나 하나만 최수호한테 잘해 준 건 아닐 거다. 최수호가 나만 유독 크게 받아들인 거지.
좋은 사람을 만나는 것도 중요하지만 믿음에는 선택이 필요하다. 누가 손을 내밀었을 때 잡을지, 안 잡을지. 사는 데는 인복이 중요하다고 했는데 그 복이란 것도 그냥 주어지는 게 아니라 자기 결정이 미치는 일이 아닌가 싶다.
시간을 맞춰 나타난 버스에 오르자 생각보다 많은 사람이 안에 타고 있었다. 사람은 많다. 나는 빈자리에 앉아 예 사범님이 아침을 먹기 전 기어이 나를 불러 약을 발라 주신 어깨를 만지작거렸다.
이 많은 사람 중에는 나를 다치게 하는 사람도 있고 약을 발라 주는 사람도 있다. 두 개를 다 하는 사람도 있다.
최수호도 알고 있을까?
최수호가 배우가 되지 않았다면 사람하고 부대낄 기회가 더 있었을지도. 하지만 연기는 수호가 선택한 일이니까.
정류장에 정차한 버스에 한 사람이 더 올라탔다. 근처 중학교 교복을 입은 여자애다. 버스는 이미 만석이었다.
자리를 찾아 불안정하게 두리번거리던 여자애가 손잡이를 잡고 섰다. 그 모습이 왠지 마음을 끌었다. 사람들 속에서 자기 자리를 찾는 불안감.
문 옆에 붙은 버스 노선도를 힐긋 확인하자 중학교까지는 아직 역이 한참 남아 있었다.
“여기 앉을래?”
말을 걸자 여자애는 놀라서 나를 쳐다보았다.
“여기.”
자리를 가리키며 일어났더니 여자애가 고개를 저었다. 나를 쳐다보는 눈에 모호한 경계가 서려 있었다.
“난 금방 내려서.”
일어나 자리를 비키고 나자 그제야 머뭇거리며 좌석에 앉는다. 나는 벨을 누르고 기다렸다.
“감사합니다.”
뒤에서 조그맣게 감사 인사가 들렸다. 왜 최수호가 생각났는지 모르겠다.
수호가 믿을 만한 사람이 주변에 더 많으면 좋을 텐데.
수호가 더 많은 사람을 믿기로 하면 좋을 텐데.
난 수호를 위해 뭘 해 줄 수 있을까.
내가 하고 싶은 일조차 그만두지도, 계속하지도 못하는 내가.
버스에서 내리면 고개만 모로 틀어도 우리 체육관 간판이 보인다. 형의 이름이 달린 간판을 보면서 나는 천 관장님이 어제 들려줬던 얘기를 생각했다.
그만둬도 괜찮지만, 내가 그만두고 싶을 때 그만둬야 한다.
체육관 건물 밑에 서자 불이 들어온 체육관 내부가 얼핏 보인다. 형 성격에 오늘도 지원 누나한테 맡기진 않았을 것 같고, 불 켜진 걸 보니 어제 병원에서 큰일이 있었던 건 아닌가 보다. 하긴 집에서도 찢고 뜯고 역정을 내는 게 팔팔해 보이기는 했지.
올라가서 형 앞에 나타나면 뭐라고 할까, 궁금하기는 하지만 마주칠 엄두는 안 났다. 체육관 아래에서 죽치고 있으려니 수상한 스토커가 된 기분이다.
슬슬 나타날 때가 됐는데. 핸드폰 시계를 확인하다 거리를 봤더니 아니나 다를까, 왔다.
“안녕하세요.”
나를 지나쳐 체육관으로 올라가려던 사람이 다시 뒷걸음질 쳐 내 앞에 섰다.
“응? 정열 씨?”
황 감독님이 눈을 휘둥그레 뜨며 삿대질을 했다. 좌우로 흔들리는 검지를 잡자 황 감독님의 눈이 더 크게 뜨인다.
“잠깐 얘기 좀 하실래요?”
* * *
갈 데라고 해도 집 앞 공원 정도다. 카페에서 할 얘긴 아니고, 술집 어떠냐는 황 감독님의 의견은 내가 거절했다. 아침 시간이라 갈 만한 데가 없기도 했고.
“나 오는 시간은 어떻게 알았어?”
“지원 누나한테 물어봤어요.”
접수는 지원 누나가 도와줬을 것 같길래 몇 시에 온다고 했는지 물어봤다. 그랬더니 황 감독님은 내가 몇 시에 오는지 도리어 물어봤다는 거다. 진짜 팬인 모양이라고 지원 누나가 그랬다. 사실 내 팬이라기보다 사심과 계략이 포함된 거겠지만.
겉옷 안주머니에 넣은 대본을 슬쩍 만져 봤다. 종이가 찢긴 부분이 닳아서 보드라웠다.
“대본 읽었어요. 다는 못 읽었지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