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32화 (32/88)

32.

복싱을 그만둔 건 다치는 게 무서워서가 아니다.

눈앞에서 형의 사고를 보고 무섭지 않았다면 거짓말이지만, 그런데도 계속하고 싶었다. 가족들이 극구 반대해서도 아니다. 나를 때려눕힌 마지막 카운터는 따로 있다.

형이 재활로 얼마나 괴로워했는지 옆에서 봤다. 실패하는 것도 똑똑히 봤다. 쓰러졌을 때 차라리 그대로 죽는 게 나았을 거라고, 형은 말했다.

내가 계속하면 형은 뭐가 되는지, 어떻게 되는지, 생각하고 또 생각했다. 아무렇지 않게 뛰다가도 뒤처진 형의 눈길이 내 다리에 머물렀다고 느낄 때면 걸음이 더뎌졌다.

내가 나아간다는 사실이 두려웠다.

지면을 박차는 순간. 내딛는 걸음. 그게 나를 기쁘게 한다는 사실. 나만이 전과 같다는 게.

체육관에서 나를 가끔 물끄러미 바라보는 형이 무슨 생각을 하고 있을지 짐작도 가지 않는 게 무서웠다. 형은 아파도 말 안 할 테니까.

다른 사람을 상처 주는 게 내 뜻대로 결정할 수 있는 일이 아니라는 걸 알지만, 나쁜 의도 없이도 사람은 사람을 크게 다치게 할 수 있다는 걸 알기에.

그런 일도 있는 법이라고 나를 다스리기엔 형과 나의 삶은 너무 가까이 붙어 있었다. 나는 태어났을 때부터 형과 함께 자랐다. 형은 나를 잘 돌봤고 내가 좋아하는 것과 싫어하는 것의 대부분은 형을 따라 하며 만들어졌다.

형 때문에 운동을 시작했다. 형처럼 되고 싶어서. 늘 동경했다.

형을 배반하고 싶지 않았다. 링에서 형이 쓰러졌을 때도, 병원에서 죽은 듯 누워 보낼 때도, 형이 생사의 벼랑을 가쁘게 오갈 때 나는 형을 도울 방법이 하나도 없었다.

그러니 지금이라도 할 수 있는 게 조금이라도 있다면 하고 싶었다. 그게 나를 포기하는 일이라도.

형이 나를 포기시키는 게 나를 위한 일이라고 믿었듯, 나도 내가 포기하는 게 형을 위한 일이라고 생각했다.

계단이 끝났다.

아파트 로비를 걸어 나가자 바람이 들이닥쳤다.

나는 계속 걸었다. 어디로 갈지도 모르는 채.

사람은 살아 있는 한 어쩔 수 없이 나아가야 한다. 그게 다른 사람을 상처 입힐지라도.

* * *

버스 정류장에 앉아서 30분째, 바람이 차가워서 코가 찡하다.

버스가 도착하자 서 있던 사람들이 줄을 서 그걸 타고 떠났다. 나는 버스가 아니라 사람을 기다리는 중이다.

형한테 스트레이트 훅을 갈겨 맞고 나면 비틀거리는 나를 잡아 주던 사람. 지금 내가 다짜고짜 형 욕만 늘어놔도 내가 정말 하고 싶은 말이 뭔지 다 알아들을 수 있을 것 같은 사람. 어쩌면 유일하게 지금의 나와 같은 감정을 겪어 봤을 것 같은 그 사람을 말이다.

“아이고, 여기 혼자 있었어? 어디라도 들어가 있지.”

저 멀리 차를 세우고 뛰어온 거구의 남자가 내 앞에서 멈춰 섰다. 저 큰 몸으로 엄청 빠르게 뛰는 바람에 정류장에 있던 사람들 시선이 모조리 한군데로 몰렸다.

“관장님 금방 오셨는데요, 뭐.”

나는 바지를 털고 일어섰다. 천 관장님이 바로 나를 차까지 안내했다.

“갑자기 잘 데는 왜 필요해. 쫓겨났어?”

천 관장님 차도 오랜만에 타 본다. 안에는 더울 정도로 히터가 돌아가고 있었다. 날 위한 배려다. 이럴 땐, 아주 많은 사람의 배려로 내 체온이 유지되고 있다는 생각이 든다.

“형이 나가래요.”

안전벨트를 매면서 대답하자 천 관장님이 끙, 앓는 소리를 냈다.

“진이랑 싸웠구나.”

“형 걱정돼요.”

“…….”

“근데 걱정하면 싫어하니까 마음 놓고 걱정하지도 못하겠어요. 정진은 자존심이 하늘을 찌르잖아요.”

“책임감이 커서 그래. 항상 맏이고, 주장이고, 지금도 관장이잖아.”

“형은 다 형 책임이라고 생각하나 봐요. 부모님도 그렇고, 저도.”

어디까지 짊어지고 싶은 건지. 쓰러진 게 형 탓도 아닌데. 아픈 게 형 잘못은 아닌데.

“열이 너하고 진이하고 비슷해. 닮았어. 다른 사람 걱정 많이 하는 건.”

“저는 형처럼 우악스러운 짓은 안 해요.”

같은 인파이터라도 코너에 몰아서 쓰러질 때까지 죽어라 두들겨 패지는 않는다, 이거다. 무릎에 올려 뒀던 대본을 말아 쥐자 구겨진 끝이 손바닥을 찔렀다. 어느덧 출발한 차의 진동이 등으로 느껴진다.

“그건 뭐야?”

천 관장님이 내 손에 들린 찢긴 대본을 가리켰다. 절반은 찢어져서 내용도 못 알아보게 됐는데 나는 어쩐지 그걸 버리지 못하고 계속 쥐고 왔다.

“관장님, 황춘식 감독님이라고 아세요?”

“응?”

“옛날에 관장님하고 같은 체육관 다니셨다는데요.”

“체육관 같이 다닌 선수들이 많아서 잘 모르겠네.”

짐작도 안 간다는 반응이다. 하긴 프로 데뷔도 전 일이니 생각나는 게 신기하다.

“이번에 형 체육관 등록한 분인데 같이 스파링했거든요. 오랜만에 재밌게 하긴 했는데요.”

“했는데?”

“예전처럼 안 움직이더라고요. 그래도 계속 훈련했으니까 기량이 그렇게까지 떨어지지는 않았겠지, 했는데 생각한 만큼 무빙도 안 되고, 예전이었으면 안 속았을 동작에도 넘어가고.”

그랬다. 왕년에 날렸다고 자만한 건 황 감독님이 아니라 나였다. 아무리 혼자 훈련해 봤자 선수로 뛸 때 실력이 유지될 리 없다는 걸 알면서도 내심 나는 다르다고 생각했다.

“막판에는 스파링에서 힘 조절도 못 해서 남의 턱뼈 나가게 할 뻔했어요.”

“허허.”

“웃을 일이 아니라 뺨이 이따 만큼 부었다니까요.”

웃을 일이 아니라는데도 천 관장님은 더 크게 웃었다. 비슷한 스파링 보면 누구보다 빠르게 주의 주실 분이.

“분하더라고요.”

황 감독님한테가 아니라, 나 자신한테 분했다.

“잘했잖아요, 저.”

“잘했지.”

“적어도 지금보다 잘했었는데.”

“…….”

“더 잘할 수도 있었는데.”

더 잘하고 싶었다.

내가 갈 수 있는 데까지 가 보고 싶었다. 거기가 어디든 내 팔이 닿는 데까지는 가고 싶었다.

창문에 이마를 박고 내 입김이 유리를 부옇게 만드는 걸 구경했다. 어느 순간부터 창밖 풍경이 제대로 보이지 않는다.

“열아, 우리 체육관 구경 안 할래?”

운전석에서 불쑥 권유가 들려왔다. 김이 서린 창문을 소매로 문질러 닦았다. 거리는 분주하다.

“네, 갈게요.”

* * *

천 관장님의 체육관은 댁에서 10분 거리다. 어릴 때도 체육관에서 훈련하다가 관장님 댁에 가서 밥 먹고 다시 운동하러 돌아오곤 했다. 방학 합숙 때는 아예 관장님 댁에서 살다시피 한 적도 있고. 다 추억이다.

리모델링했다더니 건물 외관부터 내 기억하고 다르다. 감상할 틈도 없이 천 관장님이 건물 안으로 향했다.

간판에 천 관장님 이름이 붙은 복싱 체육관은 2층이지만 천 관장님은 1층 입구로 곧장 들어갔다. 1층의 분위기는, 어딜 보나 애들용이다. 알록달록한 어린이용 캐릭터들이 그려진 입구에서 유도복을 입은 여성이 걸어 나왔다.

“여보, 열이 왔어요.”

천 관장님이 사근사근하게 말하며 나를 가리켰다. 애정이 듬뿍 담겨 촉촉해진 천 관장님의 목소리는 언제 들어도 적응이 안 된다. 텍스트로 표현하자면 여보 뒤에 하트가 두 개는 붙어 있을 느낌이랄까.

“열이! 이게 얼마 만이야.”

천 관장님의 여보가 내 어깨를 와락 끌어안았다. 거기서 그치지 않고 머리가 까치집이 될 때까지 헝클어 놓는 것도 잊지 않는다. 사범님은 참, 언제 봐도 표현이 격하시다.

“잘 지내셨어요?”

유도 전 국가대표, 아시안게임 금메달리스트, 현 한체대 교수 겸 유소년 체육 클럽 공동 운영자. 예성미 사범님이다.

어릴 때 형하고 내 유도 사범님이기도 했다. 부부한테 가르침을 받은 셈이고, 예 사범님 말씀에 따르면 키워서 남편 준 셈이다. 그래도 남이 아니라 남편이라 덜 분하다고 하셨다.

천 관장님이 곰이라면, 예 사범님은 토끼다.

왜. 토끼는 생김새와 달리 참을성 없고 성질이 포악한 동물이라고 하지 않나.

천 관장님이 링 아래서는 꿀만 먹고 사는 한없는 평화주의자라면, 예 사범님은 불의를 보면 바로 메다꽂는 혈기의 소유자셨다. 기술은 관장님한테, 기세는 사범님한테 배웠다고 할 수 있을지도.

“잘됐다. 오늘 자고 간다며.”

“하룻밤만 신세 지겠습니다.”

“얘는, 우리 사이에 신세는. 대신 저녁도 먹여 줄 테니까 밥값은 하는 거다?”

“밥값이요?”

어째 불길한 예감이 들었다. 마구 뻗친 머리카락을 매만지는 틈에 예 사범님이 도장 안을 향해서 양손을 번쩍 들어 올렸다.

“얘들아, 일일 사범님 오셨다!”

* * *

“이렇게 알차게 부려 먹으실 줄은 몰랐네요…….”

활력이 넘치는 열댓 명의 애들을 상대했더니 귀가 다 먹먹하다. 농담이 아니라 고막이 잘못된 건 아닐까 의심스럽다.

예 사범님한테는 나나 형 외에도 선수급 제자들이 넘쳐 났는데 제자들이 찾아오면 겪게 되는 시련이 바로 이 일일 사범인 모양이다. 나한테 얼추 맞는 도복을 찾아 주고 홀랑 올라가 버리신 천 관장님의 언질에 따르면 그렇다.

“우리 체육관 애들 귀엽지?”

“네, 다들 건강하던데요…….”

어찌나 건강한지 나를 아주 타고 노는 바람에 내가 하고 있는 게 유도인가, 짐마차 일일 체험인가 궁금해졌다. 나도 저랬나? 안 저랬는데?

예 사범님은 호흡 하나 안 흐트러졌다. 역시 매일 단련을 게을리하지 않는 고수는 다르다. 단전에 내공 같은 게 들어 있지 않을까.

“열이 너도 딱 저랬는데. 고사리 손으로 야무지게 기술 거는 게 얼마나 귀여웠다구. 도복 내려 봐, 어깨 보게.”

“제가 진짜 저랬어요? 안 저랬는데? 어깨는 어떻게 아셨어요.”

“딱 봐도 불편하게 움직이더라고. 그래도 별로 심하진 않네. 며칠이면 멍 가시겠다.”

내 어깨를 확인한 예 사범님이 손에 연고를 쥐여 주었다. 티를 안 내려고 무진 애를 써도 남들 눈에는 보이나 보다. 비슷한 부상을 많이 겪어 본 사람한테는 더.

“좀 환기가 됐니?”

“옛날 생각나더라고요.”

“예전엔 마음 편히 운동만 하면 되고 좋았지?”

“좋아서 시작했던 건데…… 지금은 왜 이럴까요.”

“그러게. 힘들지.”

한마디만 들어도 단순한 맞장구가 아니라 이해가 담겨 있다는 느낌이 들 때가 있다. 이 사람이 나와 비슷하게 지난한 구간을 겪어 봤다는 느낌이.

예 사범님한테는 이 자리에 오기까지 무슨 일이 있었을까. 남들한테도 내가 모르는 일이 많겠지. 가장 가깝던 최수호조차 다 몰랐듯.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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