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1.
“왜.”
“나 원래 걔랑 안 놀아.”
붙어만 있으면 투닥대느라고 여념이 없으시면서 안 놀기는 뭐가.
그래도 양용배라도 있어서 다행이다. 같이 운동하는 친구가 있다는 게 얼마나 힘이 되는지는 나도 안다. 운동 그만두고 나니 걔들하고도 할 말 없어서 연락은 끊기고, 내 제일 친한 복싱 동료였던 형하고는 이 꼴이 됐지만.
어린 나이에 운동을 진로로 잡으면서 또래들하고 시간을 많이 못 보내기는 나도 마찬가지였다. 나는 대다수가 공유하는 청소년기와는 다른 삶을 거치고 있었다.
그런데도 외롭지 않았던 건 최수호가 있어서다. 나한테는 늘 수호가 있었다.
어떤 시합이 있더라도 최수호는 나를 심판하지 않았다. 항상 걱정해 줬다. 응원해 줬다.
어머니를 따라 미국으로 갈 수 있었음에도 최수호는 나를 선택해 주었다. 떠나지 않고 내 곁을 지켜 줬다.
일곱 살부터 지금까지 수호는 항상 나를 지지해 줬다.
나야말로 수호한테 뭘 해 줄 수 있을까.
“복싱 다시 하고 싶은 거지.”
최수호가 아예 자기 팔을 베고 옆으로 누웠다. 완전히 내 쪽으로 돌아눕자 거리가 훨씬 가까워져 부담스럽다. 갑작스레 튀어나온 복싱 얘기도 그렇다.
“뭐야, 갑자기.”
“진이 형하고 그래서 싸운 거지. 그래서 이 대본 심각한 표정으로 보고 있었던 거고.”
심각한 표정이었나. 몰랐다. 나 관찰하는 건 천재다, 최수호.
“복싱 다시 해. 하고 싶잖아.”
참 쉽게도 말한다. 최수호 말만 들으면 복싱을 다시 시작하는 게 하나도 어렵지 않을 것만 같다.
“하고 싶다고 할 수 있는 게 아니잖아. 집안 풍비박산 낼 일 있냐.”
“그래도 네가 하고 싶으면 해. 도와줄게. 뭐든지.”
“…….”
“같이 싸워 줄게.”
사뭇 비장한 최수호의 말에 웃음이 터져 나왔다. 나도 못 이기는 우리 형하고 최수호의 싸움이라니.
“네가 우리 형한테 한 주먹 거리나 되냐.”
“그럼 내가 맞는 동안 열이 넌 도망쳐.”
얼씨구. 든든하다.
“됐어. 너 맞게 두느니 내가 싸우지.”
나 혼자 형하고 싸우라면 못 할 텐데, 최수호를 위해서라고 생각하면 왠지 할 수 있을 것 같다.
최수호를 생각하면, 나는 그 애가 없는 나보다 좀 더 강해졌다.
고개를 들자 최수호의 얼굴이 바로 앞에 있다. 강하게 쏟아진 햇살이 최수호와 내 사이를 어지럽혔다.
“나는 네가 기뻤으면 좋겠어.”
눈부시다. 찡그리자 구겨진 시야에서 햇빛이 파란색, 빨간색, 노란색으로 번진다. 눈을 감으려는 내 이마에 최수호가 이마를 기댔다.
“이상해도 어쩔 수 없어. 나는 너만 생각해. 너는 괜찮았으면 좋겠어.”
“…….”
“네가 안 참았으면 좋겠어. 복싱 진짜 그만두면, 네가 평생 어떤 기분일지 아니까…… 그게 싫어.”
너를 위해서라면 다른 건 아무래도 좋다는 게 사랑인가. 너무 절박하지 않은가.
그런 게 사랑이면 다들 너무 위험하게 사는 거 아닌가. 그렇게, 그런 식으로 다른 사람을 좋아해 버리면 어쩌겠다는 건지. 그런 식으로 사람을 좋아해도 되는 건가. 그렇게까지.
다른 사람을 위해 희생하는 건 사랑일까.
인생엔 난제가 너무 많고, 나는 아직 어렸고, 다섯 살이나 열다섯 살일 때보다 나아진 게 아무것도 없는 것 같다.
“화났어?”
최수호가 조심스레 물었다. 나는 눈을 감았다.
“아니.”
“나 안 볼 거야?”
이번엔 대답하지 않았다. 쳐다보지도 않았다.
“그러지 마. 나한테 화난 거 같잖아.”
“…….”
“나 봐 줘.”
“최수호 너는, 진짜 그렇게 내가…….”
자꾸만 말문이 막혔다. 어렵다.
“내가 그렇게…… 그렇게까지 좋냐?”
그렇게까지.
눈을 뜨자 최수호가 보였다. 거의 매일 보고 산 얼굴이 문득 낯설다. 지금껏 줄곧 바로 곁에서 봐 왔는데 왜 이제 와서.
“응. 나는 네가 그렇게까지 좋아.”
최수호는 망설이지 않고 대답한다. 너무도 당연하다는 것처럼. 말에 찔리기라도 한 양 가슴이 따끔거렸다.
달콤한 죄책감이 든다. 내가 다른 무엇보다도 중요하다는 말에 불안해지는 동시에, 싫지 않았다. 내가 그렇게까지 너무, 좋다는 말이.
이게 위험한 감상이라는 걸 알면서도. 내가 무슨 짓을 하든 최수호만은 내게 실망하지 않을 것만 같은 착각에 어지러워진다.
무슨 짓을 해도 혼자가 되지 않을 거라는 생각이 주는 안도감. 그리고 사로잡힌 것만 같은 약간의 압박감.
“대체 뭐가 그렇게 좋은데. 알 수가 없다, 너란 새끼.”
“나야말로 모르겠어, 열아.”
“…….”
“어떻게 너를 안 좋아할 수 있는지.”
어지럽다.
나를 보는 최수호가 처음 보는 사람처럼 낯설어 불편했다. 이마가 스치는 가까운 거리가 불편하다.
“어떻게 안 그럴 수가 있겠어. 네가 세상 전부였는데.”
전부라는 말이 명치에 얹힌다.
“나한테 있는 건 네가 다인데…….”
이런 막대한 고백 앞에서는 어떤 표정을 지어야 하나. 무섭다.
처음으로, 최수호가 무서웠다.
* * *
촬영을 나가는 최수호를 앞질러 집으로 돌아왔다. 최수호를 피하고 싶다는 마음도 좀 있었는데, 지금 보니 여우를 피해 호랑이 굴로 도망친 셈이다.
“일찍 들어왔네. 오늘 체육관 안 해?”
형은 무시무시한 표정으로 거실에 서서 나를 노려보는 중이다. 보아하니 집에서 나 들어오기만 별렀지 싶다.
“정열, 이리 와. 아버지한테 뭐라고 했어.”
“내가 뭘.”
이럴 줄 알았다. 형 성격에 그냥 넘어갈 리가 없다. 방에 들어가게 내버려 둘 분위기도 아니길래 부르는 대로 거실에 가서 섰다.
“너 오늘따라 왜 행패야? 왜 화풀이야.”
눈 마주치자마자 공격부터 던지는 꼴이 딱 형 복싱하던 스타일대로다. 붙으면 절대 안 떨어지는 인파이터. 인정사정 안 봐주겠다는 결기가 팔짱 낀 자세에서부터 번뜩거린다.
“화풀이? 형은 내가 내 일 때문에 화나서 형이랑 아빠한테 화풀이하는 것 같냐?”
“그럼 네가 열 내고 다닐 이유가 뭐가 있어.”
“왜 없어. 형이 병원 다니면서 가족들한테 말도 제대로 안 해 주는 게 내가 화내면 안 되는 일이야?”
“그 일로 네가 왜 화를 내.”
속이 터진다. 정진한테 이게 왜 화날 일인지 이해시키는 것보다 통일이 빠르겠다.
“됐어. 들어가게 비켜.”
“정열.”
형이 으르렁거리듯 내 이름을 불렀다. 형을 지나쳐 내 방으로 들어가려던 계획은 형이 내 앞을 가로막는 바람에 실패했다.
“넌 부모님 속 그렇게 썩여 놓고 이러고 싶냐?”
“내가 언제 부모님 속을 썩였는데.”
무시하고 지나갈 수가 없었다. 억울해서.
“복싱 계속하고 싶다고 한 거? 그래서 결국 안 하기로 했잖아. 내가 그걸로 형이나 엄마, 아빠한테 다시 뭐라고 한 적 있어? 안 하잖아. 형이 하지 말라고 해서.”
“내 탓이라고?”
그따위로 따져 물을 건 또 뭔가. 지는 방금 나한테 불효자식이라고 해 놓고.
“형은 내 걱정한다면서 형 병원 간 동안 기다리는 사람은 어떨지 생각도 안 하지?”
“그래서 얘기를 안 하는 거야. 이럴까 봐.”
“말 안 하고 가서 혼자 아프면 그만이냐? 혼자 검사받고 혼자 결과 들으면 그만이야?”
“들으면 네가 뭘 할 수 있는데? 알아서 뭘 할 건데. 그걸 네가 왜 알고 싶어 하냐고.”
“나도 형 걱정되니까! 아무것도 못 해도 걱정이 되는 걸 어떡하냐? 형이 자꾸 숨기고, 병원 가는 것도 죄스러워하는 게 싫다고. 누가 병원 가는 날마다 보고서 쓰랬냐? 그냥 상태 안 좋아지면 말하고 의지했으면 좋겠는데, 형은 안 그럴 거잖아.”
상태가 더 나빠져도 숨길 수 있는 정도인 한 형은 말 안 해 줄 거다. 돕게 해 주지도 않을 거다. 그렇지만 난 형이 혼자 감당해야 하는 게 싫었다.
무엇보다도 형이 자기가 아픈 걸 죄처럼 생각하는 게 싫다. 병원에 가는 게 뭐 어때서.
“나 환자로 보는 건 아버지나 너나 똑같아.”
아프단 얘기만 나오면, 형은 꼭 상처받은 표정이다. 어떤 얘기를 하든 형이 아프다는 사실을 말하는 것만으로 형은 다친다.
“그게 아니라…….”
“이제 체육관 나오지 마.”
단호한 선언에 눈살이 찌푸려졌다.
“형 체육관이라고 쫓아내냐. 유치하게.”
“복싱이고 뭐고 취미로도 하지 마. 재수 학원 다녀.”
이번에는 인상이 구겨지는 정도가 아니라 속이 다 찌그러지는 것만 같았다. 정진은 독선적인 개놈이다.
“야. 형, 진짜.”
“취미랍시고 계속하니까 마음을 못 잡는 거야. 그래, 내 탓해. 어차피 내 손으로 그만두게 한 거, 무슨 원망을 듣든 내가 책임지고 너 미련 접게 해야겠다. 그래야 너도 네 길 다시 찾지.”
말을 다 듣기도 전부터 속에서 천불이 치솟았다. 손에 들려 있던 걸 무작정 형에게로 집어 던졌다. 그렇게라도 안 하면 참을 수가 없었다.
“정진, 너 진짜 씹새끼다.”
가슴을 맞고 떨어진 대본을 주워 든 형이 인상을 찌푸렸다. 겉장을 펼쳐 안에 적힌 <록키>의 대사를 본 후 형은 대본을 찢었다.
두꺼운 종이가 통째로 뜯긴다. 종이 찢기는 소리가 뺨을 후려갈기는 것 같았다. 얼굴 전체가 화끈거리고 눈물샘이 시큰하게 쑤셨다.
나는 울지 않으려고 온몸에 힘을 주었다. 양말 안에서 발가락이 곱아들고, 주먹을 쥔 손톱이 살에 파고들었다.
너덜너덜해진 대본을 뺏으려 움켜쥐자 형은 놓지 않고 버텼다. 눈가로 열이 확 치받았다.
“형은 병원 얘기도 물어보지 말라고 하면서 왜 내 인생에는 이래라저래라야? 형은 그게 날 위하는 것 같지.”
“위하는 것 같은 게 아니라 위하는 거야. 내가 나 좋자고 이래?”
“내가 복싱 왜 그만둔 줄 알아? 아플까 봐 무서워서 그런 것 같아? 나는, 형한테 미안해서…….”
하면 안 되는 말이었다.
말하자마자 형의 얼굴에 이루 말할 수 없는 감정들이 어리는 걸 보았다. 분노, 당혹감, 열패감, 수치심, 좌절.
형이 대본을 잡고 있던 손을 놓았다. 끌어당기는 힘이 사라지자 나는 비틀거리며 뒷걸음질 쳤다.
“나가.”
형의 목에서 쇳소리가 났다. 나를 보는 형의 눈에 배신감이 번쩍인다.
그대로 몸을 돌려 집을 나왔다. 엘리베이터를 기다리지 않고 계단을 끝없이 걸어 내려가는 내내 울지 않으려고 애써야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