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30화 (30/88)

30.

“네가 부탁 안 했으면 다른 애하고 같이 안 앉았어.”

“……내가 부탁했다고?”

“응. 네가 다른 애랑 앉으라고 그랬어.”

“내가 왜 그랬는데?”

내가 말했지만 멍청한 소리다. 그거야 그 당시의 내가 알겠지. 최수호한테 물어보면 어쩌자는 건지.

“열이 너는 착하니까.”

어찌나 부드럽게 말하는지, 오히려 최수호가 더 선량해 보인다.

“너는 나 걱정했으니까. 항상. 나한테 지나치게 다정했으니까.”

다정했으니까, 이야기하는 최수호의 발음이 달착지근하다. 대체 내가 네게 뭐가 그렇게 대단하게 다정했는지 아직도 알 수가 없다.

“그래서 나는 네가 너무 좋았어.”

“……다른 애들이랑 앉기는 했냐?”

“아니.”

묻기 무섭게 대답이 돌아왔다. 그럴 줄 알았다. 최수호한테 다른 애들하고 앉으라고 한 기억은 없어도 최수호가 항상 내 옆에만 앉았던 건 기억한다. 심지어 다른 애하고 짝이 되고 나서도 최수호는 어김없이 내 옆으로 돌아왔다. 항상 그랬다.

최수호가 내게 몸을 기댔다. 무게 대신 체온만 닿는다.

추위를 잘 타는 최수호. 몸이 쉽게 식는 최수호. 그런데도 내가 붙어 있으면 금세 따뜻해지는 최수호.

“네가 너무 좋아, 열아.”

나를 너무 좋아하는 최수호.

‘너무’는 ‘좋아’ 같은 긍정형 앞에 쓰는 말이 아니었다고 하던데.

최수호의 ‘너무 좋아’는 나한테 딱 그런 느낌이다. 아슬아슬하다. 모든 게 흘러넘칠 것만 같다.

“너무 좋아.”

눈을 질끈 감았다. 어슴푸레한 햇빛이 눈꺼풀에 스민다.

최수호가 내 손을 잡았다. 너무 단단하게. 너무, 꽉.

* * *

[너 아버지한테 무슨 얘기 했어?]

최수호네 거실에 누워 형한테 온 문자를 읽고 있으려니 잊었던 짜증이 솟구친다. 최수호 다시 재울 때까지만 해도 심장이 다 말랑말랑해지는 기분이었는데 거기에 바로 잽을 얻어맞은 기분이 됐다.

한마디로 기분 더럽다.

[집에 들어오기만 해.]

형을 앞에 두기라도 한 듯 액정을 한껏 노려보았다. 내 눈만 아프다.

“들어가면 어쩌시려고.”

말은 그렇게 했어도 집에 들어가기 싫어졌다. 형하고 한 판 붙게 될 게 불 보듯 뻔하다.

핸드폰을 바닥에 엎어 놓고 팔을 펼친다. 거실에 대자로 누워 베란다에서 들어오는 햇볕만 쬐고 있으려니 수석 같은 게 된 기분이다. 거실에서 아무것도 안 하는 우리 아빠 돌들 말이다. 걔들은 유지비라도 안 들지.

나는 뭐냐. 아무것도 안 하네. 최수호는 밤샘 촬영을 하고도 아직 촬영 덜 끝나서 일어나자마자 또 나간다는데, 나는 뭐.

“재수나 할까…….”

재수하면? 하고 나서는?

매번 거기서 막힌다. 이유진은 난 성실해서 뭐든 잘할 수 있을 거라고 했지만 잘 모르겠다.

복싱을 열심히 한 건 복싱이 좋아서였으니까. 억지로 한 게 아니라 너무 좋아서 한 거다. 최수호가 좋아서 옆에 있었던 것같이.

다른 것도 그렇게 좋아할 수 있을까.

그럴 수 있을지도 모르지만, 그러고 싶지 않다.

울적하게 고개를 옆으로 돌리자 구겨진 대본이 보였다. 최수호한테 주려다 타이밍을 놓치는 바람에 계속 들고 있었다.

나한테도 읽어 달라고 했지. 부탁이 생각나 대본을 한 권 집었다.

바로 제목이 쓰인 표지를 넘겼다. 종이 정중앙에 타이핑된 글이 익숙했다.

[난 보잘것없는 인간이야.

하지만 상관없어.

아폴로가 내 머리를 박살 내도 신경 안 써.

15회까지 버티기만 하면 돼.

그때까지 버티면, 종소리가 울릴 때까지 두 발로 서 있는다면, 내 인생 최초로 뭔가 이뤄 낸 순간이 될 거야.]

<록키>에 나오는 대사다.

챔피언 아폴로 크리드와의 시합을 앞두고 주인공인 록키가 하는 다짐이었다. 황 감독님은 왜 이 대사를 맨 앞장에 썼을까.

[이 영화를 H에게 보낸다.]

대사 바로 밑에 헌사가 적혀 있다. H? 이름 약자인가. 언젠가 최수호가 자기 인터뷰에 날 Y라고 부른 거랑 비슷할까.

다음 장부터는 본격적인 영화 장면이 시작되었다. 어느 순간부터 홀린 듯이 페이지가 넘어갔다. 나는 어느새 집중해서 대본을 읽고 있었다.

황 감독님 말이 맞았다. 이건 황 감독님의 얘기였다.

학교에서 얻어맞아 다친 다리로 절뚝거리며 집에 들어가, 전화로 양육비를 요구하던 어머니와 자신을 버린 아버지가 수화기를 사이에 두고 서로 욕설을 퍼붓는 걸 듣던 남자애가 <록키>를 보는 걸로 영화는 시작한다.

맞는 게 죽도록 싫었던 남자애는 삼류 복서가 챔피언과의 시합에서 죽도록 맞으면서도 쓰러지지 않는 장면에 전율한다.

아무것도 내세울 게 없고 하고 싶은 게 없던 남자애는 영화를 찍겠다고 마음먹는다. 영화를 찍어서, 보는 사람들한테 인생이 바뀌는 경험을 남기는 사람이 되겠다고.

그는 근처 체육관에 등록해 복싱을 배운다. 친다. 달린다. 맞는다. 일어선다. 다시 맞는다.

영화를 찍는다. 사람이 나오지 않는 영화다.

[난 다큐멘터리 감독이 되어야 할지도 몰라.]

남자애가 혼잣말한다.

[난 사람을 찍는 게 싫으니까.]

남자애는 학생들에게 카메라를 빼앗긴다. 부서진 카메라를 주워 그 안의 필름을 그에게 돌려준 사람이 있다.

한 소년이다.

남자애는 속으로 생각한다. 저 애를 찍고 싶다.

나는 어쩐지 이 장면을 보고 있는 것만 같았다.

세상이 한 바퀴 돌면서 현기증이 느껴지는 게 보인다. 화면은 더욱 확장되고 소리는 크게 들린다. 포커스는 오직 한 사람에게만 맞춰진다.

그 애는 화면 한가운데에 있다. 다른 것들은 배경이고 소음이다.

“열아, 뭐 읽어?”

최수호가 내 인생에 들어왔던 그 순간.

대본을 내리자 최수호가 보였다.

화면이 전환되고 한가득 최수호의 모습이 비치는 연출을 보는 것 같다. 영화의 모든 초점이 최수호를 향해 있다.

“대본.”

“대본? 내 거야? 내가 대본 거실에 뒀어?”

“네 것도 있고 내 것도 있어.”

최수호 몫으로 가져온 대본을 내밀자 최수호가 여전히 의아한 기색으로 건네받았다. 페이지를 넘겨 보면서 최수호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누가 준 거야?”

“황춘식 감독님.”

본격적으로 대본을 읽기 시작한 최수호가 내 옆에 드러누웠다. 종이가 팔락팔락 넘어가다 갑자기 느려졌다.

“이거 꼭 내 얘기 같다.”

최수호가 말했다.

“어떤 부분이?”

편모 가정인 부분일까. 애들이 괴롭히는 부분인가. 아니면 최수호도 복싱을 배웠으니 그 부분일 수도 있겠다.

“좋아하는데 아무 말도 못 하는 거.”

“…….”

“들킬까 봐 계속 걱정하는 것도.”

이 대답은 생각도 못 했다.

나는 대본을 읽는 최수호의 옆얼굴을 멍청하게 쳐다보았다. 글씨를 읽어 나가는 최수호의 태도가 진지하다.

“최수호, 넌 언제부터 나 좋아했냐.”

“음, 처음부터.”

“진짜로? 일곱 살 때부터 좋아했다고?”

“응. 난 처음부터 널 그냥 친구라고 생각하지는 않았던 것 같아.”

“……그러면 초등학교 때도 나 좋아했어? 중학교 때도?”

“응.”

“…….”

“본격적으로 자각한 건 아마 중학교 때? 어머니가 미국으로 가겠느냐고 했을 때.”

“최소 5년은 짝사랑이었다, 이 말이네.”

혼잣말처럼 중얼거리자 최수호가 대본을 가슴에 내려놓았다. 최수호의 시선은 이제 온전히 나를 향한다.

“중학교 때, 밸런타인데이에 네가 나한테 초콜릿 준 적 있어. 기억나?”

“초콜릿……. 그거 그냥 편의점에서 파는 거 아니었나.”

심지어 밸런타인데이라서 준 게 아니라 당 보충용으로 샀다가 최수호한테도 나눠 줬던 것 같은데.

“그거 받고 너무 기뻐서 먹지도 못하고 계속 주머니에 넣어 다녔어.”

“……먹지 그랬냐.”

제일 싼 초콜릿이었을 텐데 그게 뭐라고. 타박하는 나를 보며 최수호가 웃었다.

“먹으면 없어지잖아. 그래서 못 먹었어. 며칠은 주머니에 넣고 다녔던 것 같아. 그런데 어느 날 촬영 끝나고 집에 와 보니까 초콜릿이 다 녹아 있는 거야.”

“…….”

“그게 충격적이었어.”

“겨우 초콜릿인데?”

“나한테는 겨우 초콜릿이 아니었으니까.”

최수호한테는 달랐다.

그 말이 무게를 실은 잽처럼 나를 치고 갔다.

나한테는 고작 초콜릿에 불과했는데 최수호한테는 그렇지 않았다. 나는 최수호의 마음을 몰랐다.

“녹았다가 다시 굳어서 겉은 하얗고, 모양은 다 뭉개지고, 주머니에도 묻어서 지저분하고. 내 마음도 이렇게 되는 건가, 하는 생각이 들었어, 그때.”

그런 생각을 하고 있었을 줄 꿈에도 몰랐다. 초콜릿을 줬던 것도 최수호한테 듣기 전까지는 기억 못 하고 있었다. 나한테는 기억할 만큼 특별한 일이 아니었다.

“너한테 들키지 않게 주머니에 깊이 넣고 혼자서 오래 간직하고 있다가 흉해지고 상하는 게 아닐까. 그래서 너한테 미움받게 되면 어떻게 해야 하나. 중학교 때는 계속 비슷한 고민을 했어.”

그렇게나 예전부터 계속.

쉽게 고백한 게 아니었다. 착각도 아니었던 거다. 아주 예전부터 최수호는 자기 마음과 싸우고 있었다.

아무렇지 않게 누워 있던 거실 바닥이 살에 배긴다. 딱딱한 바닥이 살을 짓눌렀다.

내가 모르는 사이에 최수호는 나 때문에 괴로웠구나.

몇 년 동안이나. 소리도 없이.

“네가 이유진하고 사귀는 거 알았을 때 내 마음이 꼭 그 초콜릿 같았어. 먹기도 싫게 엉망진창인 마음이라도, 너한테 주기라도 하고 싶었어. 어떤 식으로든.”

“…….”

“네가 이유진 왜 좋아했는지 알아. 좋은 애라는 것도 알고. 내가 잘못한 거 알고 있어. 좋은 애라서 겁났어. 나한테는 더 기회가 없을 것 같아서.”

“유진이는…….”

“이유진한테 사과했어.”

그래도 이유진은 끌어들이지 않았어야 한다는 생각을 최수호는 이번에도 읽은 것만 같았다.

“잘했네.”

이유진도, 최수호하고 다른 식으로 만날 수 있었더라면 좋았을지도.

최수호하고 내가 다녔던 학교엔 좋은 애들이 많았다. 안 그래도 출결이 감 안 잡히는 우리 둘이 매일같이 붙어 다니느라 다른 애들하고 더 못 친해진 것 같기도 하다.

“나 때문에 오늘 촬영장에서 양용배랑 괜히 안 놀지 말고.”

“열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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